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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5)화 (16/141)

<15화>

* * *

대공저로 가는 데 소요되는 시일은 예상보다도 훨씬 길었다.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본가가 아닌 성도의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네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도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 기다리고 있단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하긴, 제국의 끝과 제국의 중심은 멀고 또 멀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나는 마차에 드러누워 지루함에 천장만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내 예상대로 로베릭은 나를 아주 귀찮게 만들었다.

사사건건 내게 말을 걸고, 부족한 것은 없는지, 원하는 것은 없는지.

가장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인데.

그래도 명색이 대공인지라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이런저런 해야 할 의무가 많아, 몇 시간 정도는 온전히 홀로 남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점이었다.

[이디스 님. 덥진 않으신지요?]

“응? 아니, 괜찮아.”

나이아드의 충고대로 나는 정령왕의 소환을 유지하진 않았지만 그 대신 하위나 중위 단계에 속하는 정령들을 곁에 두고 있었다.

두 가지의 속성이 동시에 밝혀진 뒤,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받았으나 아직 육신의 나이가 어려서일까.

정령왕의 소환을 지속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물에 잠긴 듯 푹 처졌던 것이다.

그 때문에 당분간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정령 소환을 유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목이 마르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물의 중위 정령, 언딘이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생명의 정령왕인 일리피아는 휘하에 따로 정령들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소환하는 건 필연적으로 나이아드의 권속인 물의 정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딘은 귀 대신 지느러미가 달리고 푸르스름한 색을 띤 피부와 허공에 촘촘히 떠다니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물의 결정을 두른 것만 빼면, 인간 여성과 매우 흡사한 외관을 지닌 정령이었다.

[네레이드 님들은 나이아드 님과 매우 흡사한 외관을 지니셨어요. 하반신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이루어져 있으시거든요. 하지만 결코 나이아드 님처럼 지느러미를 두 다리로 바꿀 수는 없답니다. 또 그분의 머리에 드리워진 정령왕의 왕관은 결코, 저희 같은 천한 존재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지요.]

언딘은 나이아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눈을 선망과 강한 충성심으로 빛냈다.

모든 정령들은 자신들의 왕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모양이다.

“혹시 다른 정령들에 대해 아는 것도 있어? 지혜의 정령왕, 이라든지.”

마리에트의 주 속성, 지혜의 정령왕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나는 언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 그분은, 저 같은 것이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할 위대하고 고귀하신 분이세요.]

언딘은 언뜻 두려움으로 보일 만큼 무거운 경외심을 내비치며 조심스레 답했다.

[아는 이야기도 극히 적고요.]

“괜찮아, 조금이라도 좋으니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줘.”

나이아드는 어쩐지 로어에 대한 이야기를 은근히 꺼리는 듯하고, 일리피아는 늘 웃기만 할 뿐 나중에 더 자라면 차차 알게 될 거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렇다고 로베릭에게 지혜의 정령왕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껄끄럽다.

그도 마리에트의 주 속성이 지혜였던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까.

……괜히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내비쳐 봤자 좋을 건 없겠지.

내 질문에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던 언딘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선 바람의 정령왕님과 불의 정령왕님, 대지의 정령왕님…… 아, 그리고 생명의 정령왕님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셨대요.]

……엥?

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친밀하게?”

언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그 외의 다른 정령왕님들과 사이가 나쁘셨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요, 다만 방금 말씀드린 분들과 특별히 가까우셨다고 해요.]

바람의 정령왕은 로베릭을 축복한 정령이고, 불의 정령왕은 로샨 제국이 숭배하는 정령왕이었으며.

대지의 정령왕은 모르겠지만 생명의 정령왕은…….

“일리피아잖아……?”

뭐야, 언딘도 알고 있을 만큼 사이가 막역했다면 당연히 로어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을 텐데.

그런데도 나한텐 하나도 알려 주지 않았던 거야?

[……이 외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으음, 동등한 격을 지니신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 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령이 없어요.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를 중시하셨으며, 냉혹하리만치 이성적이신 분이셨거든요. 어떨 때는,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지니신 것도 같았대요.]

……미래를, 꿰뚫어 본다.

어째서일까.

유독 그 말이 귀에 선히 박혔다.

[이 외엔 말씀드릴 만한 게 없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 고마워.”

우선 일리피아부터 추궁해 봐야겠다.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면 끈질기게 매달려서라도.

“이디스!”

마차 바깥에서 로베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온 건가. 나는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이곳이 헤일리안 대공저란다.”

내 손을 꼭 붙든 로베릭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니?”

“……네.”

나는 웅장하다 못해 압도적인 외관의 석조 저택을 우러러보듯 응시했다.

이곳이 바로 헤일리안 대공저였다.

정확히 말하면 본가가 아닌 수도의 저택이었지만, 여기도 이 정도의 규모인데 대체 본가는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장엄했다.

“계단이 조금 높구나. 안아 줄까?”

“……괜찮아요.”

나는 로베릭의 제안을 거부하고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까마득하게 드높은 대공저의 정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드러난 광경은…….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족히 수백 명은 될 듯한 사용인들이 절도 있게 허리를 굽히며 대공의 귀환을 반기는 광경이었다.

“미리 서신을 보내 놓았으니 알고 있겠지.”

흠잡을 때 없이 매끄럽고 고고한 목소리가 너른 홀 가득히 울렸다.

“여기 있는 이 아이가 헤일리안의 두 번째 대공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다.”

로베릭이 사용인들에게 나의 신분을 알렸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사용인들은 일제히 내게 인사를 올렸다.

조금 움츠러들 만큼 거대한 몇백 명의 목소리가 드넒은 홀에 겹겹이 울렸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역시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구나.

주인인 헤일리안 대공이 눈앞에 있어 애써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게 향하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껄끄럽고 달갑지 않다는 뉘앙스는 분명히 눈치챌 수 있었다.

어쩜 이렇게 예상과 한 점 다를 바 없는지.

“……로베릭.”

첫 번째 인사를 올린 이후 기묘한 적막이 흐르던 때였다.

힘없이 가냘픈 목소리가 드높은 층계참 위에서 들려왔다.

“샤스티아!”

로베릭이 화색을 띠며 얼굴을 들었다.

……샤스티아.

나는 로베릭의 눈길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수척한 낯빛이 오히려 가련함을 부각시키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 계단 위에 멈추어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분홍색 머리칼은 새하얀 진주가 박힌 관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우수에 젖은 커다란 눈망울은 믿지 못할 광경을 응시하는 듯 나를 향해 있었다.

원작의 여자주인공.

샤스티아 프라이움이었다.

“갑작스럽게 아이를 데려와서 미안해. 하지만 샤스티아,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로베릭은 간곡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내 손을 꼭 쥐었다.

“…….”

순간 치미는 불쾌함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로베릭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처연한 표정을 지은 채 샤스티아를 향해 말했다.

“아이에겐 잘못이 없잖아.”

“…….”

……너무 쓰레기 같은 대사라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요, 아이에겐 잘못이 없어요. 하지만, 나는…….”

샤스티아는 고운 손으로 옷자락을 우그러뜨리듯 쥐며 말했다.

“그 아이를 내 자식으로 대하진 못하겠어요. 그것까지 내게 바라진 말아 주세요.”

그건 나도 바라지 않아.

“……그래. 강요하지 않을게.”

로베릭은 곧바로 대꾸하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샤스티아는 내게 한 번 더 눈길을 주었다.

질척이는 감정을 담은 시선이 거북스러웠다.

“…….”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먼저 피해서는 안 된다.

맞서 싸우기 위해 들어온 곳이었으니까.

타다닥-

그 순간, 깃털 같은 발걸음이 낙수 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아버지!”

작은 몸집의 소녀가 로베릭의 품에 뛰어들었다.

내 눈앞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버지?

로베릭을 아버지라고 부를 아이는…… 그 아이밖에 없었다.

“알레아.”

알레아 프라이움.

아니, 이제는 알레아 세라피나 헤일리안이라고 지칭해야 할까.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께서 언제 돌아오시나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어요.”

샤스티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그래, 늦어서 미안하구나.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읽었지?”

로베릭은 알레아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알레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지척에서 알레아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말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커다랗고 맑은, 분홍빛 장미 꽃잎을 녹여 낸 듯 오묘한 색채를 띤 눈망울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 왠지 모를 연유로 기묘하게 느껴졌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간 낯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알레아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제 동생이죠?”

“그래. 이름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란다. 친하게 지내야 한다. 동생을 많이 아껴 주렴. 이제부터 너흰 누가 뭐라 해도 자매니까.”

하! 나는 헛웃음을 토해 내고 싶은 것을 꾹 눌렀다.

자매는 무슨. 원수라고 표현해도 모자랄 관계를 가지고.

“네! 안녕, 이디스. 반가워. 내 이름은 알레아라고 해.”

하지만 알레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나는 내 앞으로 불쑥 들어온 뽀얗고 보드라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득, 로베릭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로베릭은 흐뭇한 기색으로 알레아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디스?”

오래도록 저가 내민 손을 마주 잡지 않자, 알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아, 그래.

“만나서 반가워, 알레아.”

나는 생긋 웃으며 알레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

“저, 저게 지금……!”

한참을 말 한마디 않고 물끄러미 알레아의 손만 응시하던 내가,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한 말에 곳곳에서 놀란 반응이 빗발쳤다.

“이디스. 알레아는 네 언니…….”

로베릭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귀족가에서 자매끼리 이름으로 부르는 건 흔한 일이라고 들었어요.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데, 서로 편하게 부르는 게 빨리 친해질 것 같아서요.”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마주 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알레아는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알레아의 손을 놓고 고개를 뒤로 젖혀 로베릭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러면 안 돼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로베릭은 내가 의기소침하게 말꼬리를 내리자 다급히 외쳤다.

“아, 아니다. 빨리 친해지려면 쓸데없는 위계는 없애는 게 좋겠지. 알레아, 이디스는 또래보다 훨씬 영특한 아이란다. 네가 헤아려 주렴.”

“……네, 저도 괜찮아요. 아버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알레아는 제 어깨에 손을 올린 로베릭을 올려다보며 순하게 웃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언니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헤일리안 대공위를 쟁취할 생각으로 이 역겨운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명백히 나보다 먼저 대공녀 작위를 수여 받은 알레아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쓴다면.

그건 나 스스로 후계 서열에서 밀려나겠다는 표시나 다름이 없었다.

바보 천치도 아니고.

명백히 따지자면 헤일리안의 핏줄도 아닌 알레아에게 그런 예의까지 지켜 줄 필요는 없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알레아.”

웃기지도 않는 가족 놀이에 동참할 생각 없다.

나는 오직 헤일리안 대공 작위를 앗아 가기 위해 그의 딸로 들어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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