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 *
그렇게 헤일리안 대공저에 들어온 지 어느덧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떠올려 보자면…… 눈에 띄는 괴롭힘은 없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종종 사용인들이 대꾸하지 않거나, 중간중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 빼고는.
그 이유는 의외로 로베릭 덕분이었다.
‘이디스, 아버지와 후원에 가 볼래? 네가 좋아할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단다.’
‘지난번에 봤던 말이지? 이름이 뭔지 안 궁금해? 네가 지어 볼래?’
‘……이디스를 하루 온 종일 방에만 방치했다고 하던데. 왜, 아예 감금을 시키지 그러나? 자물쇠도 걸어 잠그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보러 와 귀찮게 구는 것도 모자라,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저 홀로 수틀렸는지 사용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기색으로 빈정거리지를 않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아무래도 이디스 아가씨께서 보통 어린아이같지 않으셔서……!’
아무튼 로베릭의 달갑잖은 세심한 보살핌 때문에 사용인들은 나를 좀 배척하다 말았다.
“간식 드셔야지요.”
달그락.
물론 지금도 매우 딱딱한 태도로 굴긴 했지만.
참 대단한 의리였다.
나는 따끈한 스콘을 포크로 뭉그러뜨리며 조소했다.
너에게는 아무런 아군도 없으니, 밝고 행복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뭐 이런 작당이라도 모의한 걸까.
그런데 이럴 거라고는 충분히 예상했던지라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으으, 늙고 못된 인간! 빨리 나가!]
“…….”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던져주는 정령들이 곁에 있었기에 더더욱.
“닉스, 그만해.”
[……그렇지만 저 눈빛 좀 봐! 아까부터 이디스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걸.]
정령의 적대적인 시선이 제게 쏟아지자, 나이 지긋한 시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갔다.
[닉스, 내가 분명 이디스 님께 존대를 사용하라 엄히 일렀을 텐데.]
네레이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닉스를 꾸짖었다.
닉스는 풀이 죽은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총총히 뛰어갔다.
“괜찮아, 네레이드. 또래 친구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은걸.”
그 말에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던 네레이드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문가를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디스 님…… 저 망할 인간들을 전부 바닷물에 담가 버릴까요?]
“아니…… 그건 좀.”
확실히 상위 정령으로 분류되는 네레이드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닉스와 언딘과 달리 자의식이 아주 강했으며, 인간을 경시하는 태도가 짙었다.
자신들의 왕이 축복한 내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깍듯이 예를 다했지만.
아무튼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나를 향해 소극적인 배척을 가했고, 알레아는 내가 대공저에 처음 왔던 날을 제외하면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때는 로베릭이 인사하라고 하니까 형식적으로 상냥히 행동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샤스티아는 오다 가며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바로 자리를 피해 버리는지라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눈 적 없고.
……아무래도 나를 마리에트랑 겹쳐 보는 것 같았다.
[대공비라는 여자, 진짜 겁쟁이인 것 같아. 어떻게 이디스같이 쪼끄마한 아이를 보고 매번 몸을 벌벌 떨어?]
[닉스! 감히 이디스 님을 그런 식으로 지칭하다니! 당장 사죄드리지 못해?]
[히잉…… 죄송해요…….]
“괜찮아, 닉스. 그리고 대공비가 겁쟁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아니야, 아무것도.”
그리고 이 세계관에서 정령사는 기본적으로 매우 귀한 존재였다.
인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범인凡人들은 닉스와 같은 하위 정령마저 두려워하며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한번은 나이아드를 소환해서 함께 정원을 거닐다가 마주친 시녀 한 명이 기절해 버린 사건까지 일어났었다.
정령사로서의 재능이 하나도 없는 범인들은 정령왕과 같은 강대한 정령에게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고 하여, 괜한 분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일리피아와 나이아드에겐 잠시 이별을 고했다.
대신 나이아드의 권속인 물의 정령들을 소환하였으므로 크게 외롭지는 않았다.
매일 밤마다 할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일어나면 책을 읽기도 하고 후원을 거닐거나 정령들과 노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활을 영위했다.
“이디스. 네가 정식으로 황제 폐하께 작위를 부여받을 날이 머지않았다.”
그날 밤, 상기된 표정의 로베릭이 나를 불러내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헤일리안의 대공녀 작위는 황제가 직접 수여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정식 대공녀가 아니었다.
한 달 내로 작위 수여식이 거행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요?”
로베릭의 기쁜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로베릭은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펼쳐 내게 보여 주었다.
“정식 수여식 전, 황제 폐하께서 헤일리안의 숨겨진 대공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전언을 보내오셨구나.”
아.
“황궁에 가게 되는 거야. 기대되지 않니, 이디스? 아버지는 정말 기대되는구나.”
……망할.
“마침 의복을 새로 맞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다, 이번에 디자이너를 불러 드레스를 맞추자꾸나. 악세서리도 전부 새로 구입하고. 처음이니 가볍게 백여 개 정도로 맞추면 되겠지.”
그냥 수여식이나 해 주면 되지, 무슨 얼굴까지 미리 보겠다는 거야…….
* * *
황제,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
그는 원작의 배경이 되는 로샨 제국의 20대 황제였다.
남주 로베릭과는 부모 대에 얽힌 깊은 악연이 있었지만.
‘……우리의 우정에 부모의 악연을 끼어들게 하지 말자.’
‘고마워, 정말 고마워……. 로베릭.’
로베릭의 아버지인 선대 헤일리안 대공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해 버린 것도 모자라, 친아들 오스발트마저 맹렬히 질투하여 학대했던 선황제의 만행 덕분에 두 사람은 원수지간임에도 우정을 쌓아 갈 수 있었다.
오스발트는 로베릭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서로의 정치적 동반자였다.
신분상 흠결 많은 샤스티아가 로베릭과 결혼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조력자이기도 했다.
“……아직 어리신데도 자태가 남다르시군요. 성장하시면 분명 대공비님 못지않을 미인이 되실 거예요.”
“당연하지. 누구의 여식인데. 오늘 맞춘 의복들은 일주일 이내로 제작하게.”
“알겠습니다, 대공 각하.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디스 대공녀님.”
즉, 나한테는 로베릭이나 샤스티아, 페리온과 다를 바 없는 원수라는 뜻이었다.
……그딴 인간 만나자고 이렇게 빼입고 가야 하는 건가?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회의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라벤더빛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말려 허리까지 늘어뜨렸다.
뽀얗고 조막만 한 얼굴 속에 들어찬 커다란 눈동자, 오뚝한 콧날, 팬지꽃처럼 앙증맞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언뜻 보면 순하고 천진해 보이지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예리한 느낌을 주는 눈은.
“정말 예쁘구나, 우리 딸.”
싱글벙글한 기색으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로베릭과 똑같은, 영롱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세계관 최강 미남 로베릭과 미모로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던 마리에트의 우월한 유전자를 한 몸에 물려받았으니, 예쁠 수밖에 없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내 출중한 외모를 마냥 좋아했는데.
똑똑-
“대공 각하. 리엘라입니다.”
“아, 들어와.”
조용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 샤스티아의 시녀들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소리 없이 걸어들어온 시녀는 공손히 묵례하며 입을 열었다.
“황궁 방문에 대해서인데…… 마님께서 현재 몸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못하실 것 같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라 명하셨습니다.”
내가 대공저로 온 후 샤스티아는 노골적으로 아픈 티를 냈다.
나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제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을 정도였으니.
간혹 얼굴 볼 일이 생기면, 창백하게 질려서는 몸을 휘청거리고.
……완전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 서 있었을 뿐인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듯 아프고 괴로운 티를 혼자 다 내니 말이다.
아무튼 그녀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야 다행이었다.
로베릭이 샤스티아보다 다루기는 훨씬 쉬웠으니.
“대신 알레아 대공녀께서 각하와…… 이디스 님과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뭐?
“그래? 다행이구나. 알레아가 참으로 속이 깊어.”
로베릭은 반색하여 말했다.
네가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거야……. 골이 지끈지끈 울렸다.
나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통증을 삼켰다.
“이디스, 알레아가 함께 가면 네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란다. 알레아는 황태자 전하, 2황자 전하와 친분이 있는 사이니 어울리기에도 수월해질 거야.”
대공저에 들어온 뒤 첫날을 제외하고 내게 눈길 한번 안 주던 애와 황궁에 가야 한다고?
……아무래도 불길했다.
황궁에 갔을 때, 무언가 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다.
* * *
로샨 제국.
빛, 대지, 물, 바람, 불, 숲, 전기, 얼음.
각각 대자연의 일부를 이루는 여덟 명의 정령왕 중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사랑을 받은 나라.
[친애하는 아르얀로드, 너와 너의 자손들은 나의 끊기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원을 살아갈 것이다.]
시조의 서에 적힌 말 그대로, 시황제 아르얀로드 루에이리의 후손들은 모두 불의 정령의 축복만은 반드시 지니고 태어났다.
끊기지 않는 정령사의 핏줄.
그것은, 루에이리 황가에게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는 것과 같았다.
“조심하렴.”
“……알아서 갈 수 있어요.”
화르륵-!
황제궁의 계단을 오르는 순간 양옆에 자리한 피닉스 조각상이 불꽃을 확 뿜어내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