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로베릭은 내가 그것 때문에 놀랄까 싶었는지 다급히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내가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그는 멋쩍은 듯 손을 놓았다.
“아버지, 오늘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뵙는 날인데 저 어때 보여요?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이때까지 기척 없이 조용히 걷던 알레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알레아는 언제나 더없이 예쁘지.”
로베릭의 말에 차분한 인상의 어여쁜 소녀는 두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로베릭은 흐뭇하게 웃으며 알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께 너무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샤스티아의 바람이 네게 부담이 된다면 나는 네 뜻을 존중할 테니.”
“헤헤, 알겠어요.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참 화목한 부녀지간이었다.
나는 짜게 식은 눈길로 알레아와 로베릭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
“참. 이디스, 아버지가 며칠 전부터 설명했지? 황태자 전하의 존함은…….”
알레아가 무어라 말을 더 하려는 듯했으나 로베릭은 내게 관심을 돌렸다.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 올해로 열 살을 맞이하시고 황태자 전하의 이복형제이신 2황자 헨델 하날 루에이리 전하께서는 저보다 두 살 아래시죠.”
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총명하기도 하지.”
내가 그것도 기억 못 할까 봐.
로베릭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는 어쩐지 씁쓸한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서우면 언제든 의지하렴. 아버지가 곁에서 지켜 줄 테니까.”
뭐라는 거야.
나는 로베릭의 손을 떼어 내려다가, 아까와는 달리 주위에 인파가 늘어난 것을 깨닫고 참았다.
“헤일리안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빛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그때 우리의 앞을 지나가던 한 귀족이 아는 체를 해 왔다.
“유프스 백작. 오랜만이군. 황제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
유프스 백작이라 불린, 백발이 성성한 노귀족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한 시간 전부터 와 계셨습니다. 언제나 철두철미하신 분이니까요. 아, 이분께서……!”
그러던 때, 백작의 눈길이 로베릭의 옆에 서 있던 내게 닿았다.
어쩐지 할아버지를 닮은 노귀족의 모습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겠군. 내 친딸,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다. 곧 정식으로 대공녀 작위를 수여 받을 예정이지.”
“아……! 그러시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헤일리안의 작은 카멜리아시여.”
대공저로 오고 나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낯선 이의 호의적인 인사에 나는 머뭇거리며 내게 건네진 주름진 손에 손끝을 살짝 겹쳤다.
유프스 백작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헤일리안의 따님이시라면, 역시 빛의 축복을 받으셨을까요?”
“아니, 이디스는 일리피아의 축복을 받았어. 아마 남은 속성들은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겠지.”
“그렇군요. 하지만 생명의 정령왕께서 축복하셨다니, 이는 제국에 다시 없을 길조입니다. 죽은 자조차 다시 살려 내는 것이 일리피아 님의 권능이시니까요.”
유프스 백작은 경탄하는 눈빛으로 다시금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리피아는 한 시대에 한 명의 필멸자에게만 축복을 내린다는 격언이 존재할 만큼 생명 속성 정령사는 귀한 존재이지요. 대공 각하에 이어 대공녀님께서도 그 속성을 물려받으셨다니, 더할 나위 없는 길조로군요.”
……너무 띄워 주니까 조금 부담스럽다.
“아버지,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아요.”
그때, 그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알레아가 입을 열었다.
로베릭은 알레아를 흘긋 내려다보고 유프스 백작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작위 수여식 때 다시 보도록 하지.”
“예, 각하.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어린 대공녀님.”
유프스 백작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던 대로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해 보였다.
본래대로라면 대공녀가 백작보다 지위가 높지만, 아직 나는 정식으로 작위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적절한 예를 취해야 했다.
백작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껄껄 웃으며 멀어져 갔다.
“…….”
입을 꾹 다문 알레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저 할아버지…… 알레아에겐 인사 한번 안 건네고 가셨네?
“어서 들어가자. 이디스.”
조금 의아했지만 로베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다시 돌아본 알레아는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서늘한 기류가 여린 소녀의 낯빛에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꺼림칙했다.
나는 알레아를 바라보던 것을 중단하고 홱 고개를 돌렸다.
끼이이익-
당장이라도 눈앞으로 살아 나올 것 같은 휘황한 불사조가 음각된 문이 서서히 열렸다.
“어서 와, 로베릭.”
황좌에 턱을 괴고 편안히 기대앉은 남자의 단단한 음성이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원작의 주요 인물을 또 한 명 만나는 자리구나.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바로 마주치는 시선에 입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열적인 붉은 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는 달리, 짙은 코발트블루 색을 띤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기색을 머금고 나를 응시해 왔다.
턱을 괸 한쪽 손은 불의 정령의 힘을 감당하기 위해서인지 검은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반대쪽 손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
그는 소설의 묘사대로였다.
“네가 바로 그 소문의 아이구나.”
매섭고 강건하며, 동시에 유혹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미남자.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지칭하자 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저자는 샤스티아가 로베릭과 이어지는 것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또한 할아버지와 공작가의 몰락에 일조했던 인물이었다.
내게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긴장하지 말거라.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구나.”
“!”
그 순간, 오스발트는 웃음기를 머금고 마치 나를 놀리듯 말했다.
그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진하게 미소 지었다.
“제 생모를 꼭 빼닮았어.”
그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을 때, 나는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만하시지요, 폐하. 제 여식은 놀림감이 아닙니다.”
로베릭이 내 앞을 막아섰다.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하마터면, 황제를 노려보는 대역죄를 범할 뻔했으니.
로베릭에 의해 가려진 앞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난도 못 치나? 방금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었고, 생각 외로 마음에 드네. 마리에트의 자식이라기에 조금 궁금했는데…… 부모를 아주 고르게 닮았군. 누구 하날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얘기는 그만 좀.”
로베릭은 이곳이 공석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오스발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읊조렸다.
“그래, 장난은 이쯤 해 두고. 나오거라, 내 자식들아.”
상황이 일단락된 듯했다.
황자들을 부르는 황제의 목소리에, 나는 로베릭의 다리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황좌의 뒤편, 붉은 휘장으로 가려진 곳에서 두 개의 작은 인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아이는 나보다 더 컸고, 다른 아이는 나보다 더 작았고…….
“헤일리안의 새로운 대공녀다. 발레리안, 어떠하냐? 처음 본 감상은.”
발레리안. 황태자의 이름이었다.
원작에서 주연들의 2세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어린 황태자로 추정되는 소년을 마주 응시했다.
“아…….”
황제의 오른편에 선 소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제와 비슷한 색을 띠었으나, 그보다 채도가 옅은 머리카락이 천장의 불빛을 반사하며 부드러운 적색으로 빛났다.
순하게 쳐진 눈망울 속 가득 들어찬 녹색 눈동자가 자잘한 떨림을 머금고 나를 마주 응시했다.
잘생겼다기보단 예쁘게 생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린 외양의 소년이었다.
조금 띠껍긴 해도 감히 비할 바 없는 로베릭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내 외모를 보며 살아와서일까.
어린 황태자는 분명 잘생긴 축에 속했으나 내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
그러나 황태자의 반응은 어딘지 심상찮았다.
어린 소년은 벌어진 입술조차 다물지 못하고, 두 볼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내비쳤던 것이다.
“풋! 하하! 이 녀석 표정 보게!”
황제는 박장대소했다. 로베릭은 은근히 눈매를 찡그렸다.
뭔……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를 떨고 있네.
나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리저리 궁금한 게 많으니, 잠시 아이들을 물려 놓고 대화하는 게 좋겠지.”
한바탕 웃어 젖힌 후, 황제는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 로베릭에게 말했다.
“그리하지요. 이디스, 알레아. 바깥에서 조금만 기다리렴.”
로베릭이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가 황태자를 향해 명령했다.
“발레리안. 네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라.”
황태자와 2황자, 알레아의 사이에 남겨진다라.
별로 달갑지 않은 전개였지만, 아예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황태자는 반색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만나서 반가워, 이디스 대공녀.”
황태자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길을 살짝 옆으로 돌려 알레아를 응시했다.
“…….”
알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악수를 청하는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답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시기를, 로샨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라고 해요.”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 매우 기뻐.”
내 인사에 화답한 황태자는 몸을 돌려 자신의 동생과 알레아를 향해 말했다.
“헨델, 알레아. 내 궁으로 가자. 이디스 대공녀는 황궁에 방문한 게 처음이지? 내가 안내해 줄게.”
“감사합니다.”
내게 친절히 대하는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
나는 생긋 웃으며 황태자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황자 전하들이랑 알레아랑 잘 놀고 있으렴. 금방 돌아갈게.”
막을 새 없이 로베릭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서 대놓고 손을 떼어 낼 수도 없고.
“어서 가요, 황태자 전하.”
대신 나는 몸을 홱 돌리고 황태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황태자는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래, 어서 가자.”
우리는 알현실을 벗어났다.
로베릭과 황제만 남은 알현실의 육중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