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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8)화 (19/141)

<18화>

* * *

불타오르는 새의 형상을 띤 피닉스 조각상은 황태자 궁의 곳곳에도 세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이 돈다는 점 또한 황제궁과 다를 게 없었다.

“헤일리안 대공을 아주 많이 닮았구나?”

그리고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 옆에서 아까부터 계속 나를 쳐다보며 입을 헤벌리고 있던 2황자가 대뜸 외쳤다.

“정말 예쁘다. 요정 같아!”

……칭찬은 고마운데.

나는 어딘지 약간 모자라 보이는 2황자를 향해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 지금은 고인이 된 전 바스테반 공작 영애도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하니까.”

마리에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쩔 수 없이 몸이 경직되었다.

황태자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의도를 지니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전하, 리테라에 관한 서적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때, 논외로 비켜났던 알레아가 살가운 태도로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리테라?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몇 달 전, 할아버지와 함께 로베릭에게서 도망치던 때.

‘……옛 친우가 머무르는 곳.’

할아버지께서 옛 친우분이 머무르시는 곳에 대해 지나가듯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분명히 리테라, 라는 이름을 중얼거리셨다.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경황이 없어 그냥 넘겼는데.

“정말? 이 자리에 갖고 온 거야?”

“네, 사실 가져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께 간청해서 겨우 허락받았어요.”

……리테라가 그저 지명이 아니었던 건가?

나는 열렬히 반색하는 황태자의 안색을 멀뚱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고마워.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는데 그걸 기억해 줄 줄은 몰랐어.”

황태자는 환한 웃음을 피워 올리며 알레아를 향해 말했다.

“리테라? 그건 2급 이상 정령사가 아니면 접근도 못 하는 단체잖아. 그런데 헤일리안 대공이 너한테 그 책을 주었다고?”

옆에서 피낭시에를 입안 가득 베어 물던 2황자가 우물거리며 끼어들었다.

“네, 이렇게 말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아버지께선 제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주려 하시니까요.”

알레아는 수줍은 듯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니샤 왕국의 날씨와 관련된 기묘한 메커니즘을 드디어 리테라에서 밝혀냈다고 하더라고요.”

……리테라가 대체 뭐 하는 데야?

기후 변화 연구에, 상급 정령사가 아니면 접근도 못 하는 단체라니.

할아버지의 친우분께서 그곳에 계신다고 하셨는데,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뒤늦게 궁금해졌다.

“니샤의 국왕도 강대한 정령사지. 아버님께서 언제나 경계하시는 이야. 어둠의 힘을 배척하기는커녕 여전히 숭상하고 있으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화제로 담소를 이어 가거나 말거나, 나는 홀로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건 그렇고…….”

황태자가 한숨을 폭 내쉬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버님께서 계속 내 혼처를 고르신다고 성화셔. 한두 달 안으로 약혼자를 내정해서 약혼식을 거행하실 거라는데. 정말 하기 싫다…….”

알레아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황태자의 말을 받아 주었다.

“부디 전하께서 그 약혼자분을 마음에 들어 하시길 바라요. 부모님께서 정해 준 약혼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만한 행운이 어디 있겠어요.”

황태자는 피식, 웃음을 토해 내며 말했다.

“……고마워. 알레아, 어째서인지 너와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과분한 칭찬이세요. 저야말로 그런걸요.”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황태자와 알레아, 걸신들린 듯 디저트를 욱여넣기에 여념이 없는 2황자의 틈에 끼어 있으려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를 공기로 취급하는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서 소리 없이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얼핏,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게 알레아의 눈길이 향한 것도 같았으나 별다른 반응이 돌아온 것도 아니라, 나는 그냥 가던 길을 꿋꿋이 유지했다.

* * *

달칵.

내가 문을 닫기 직전까지 황태자와 2황자는 내가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네.”

혹시나 내가 홀로 나온 것을 시종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황태자 궁의 회랑은 화려함과 왠지 모르게 쓸쓸한 고요함만이 깃들어 사람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매끄러운 복도를 걸어 다니는 내 발소리만 잠잠히 울릴 뿐.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기이하리만치 조용하다.

어째서일까,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추워.”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감싸며 인상을 찡그렸다.

적막함만이 아니라,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미친.”

하아-

급기야 숨결도 하얗게 얼어붙는 게 아닌가?

나는 두 팔을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무엇일까.

폐를 얼릴 듯 차가운 이 기운은.

평소 느끼던 물의 정령의 기운과 비슷하면서도, 마치…….

쾅-!

서늘하고, 불길한.

내가 불길함을 감지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증기를 얼어 붙이기라도 한 듯, 거대한 얼음의 산이 황태자 궁의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어?

“저게…… 뭐야?”

나는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빙벽을 황망하게 올려다보았다.

……꿈을 꾸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절대로.

쿠궁-

“어.”

그 순간, 발밑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두어 번 울렸고.

콰아아앙-!

거대한 빙벽이 황태자 궁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뭔데, 갑자기 왜 재난 블록버스터 전개가 벌어지는 건데!

나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저, 저게 무슨!”

“황제 폐하, 황제 폐하께 어서 누구라도 알려!”

“꺄아아악-!”

이때까지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거대한 빙벽이 황태자 궁을 뭉개며 진격해 오자 그제야 튀어나온 시종들이 곳곳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쿠쾅- 와장창!

궁의 외벽과 여러 잡다한 부속물들이 깨부숴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뭔데!

나는 바쁘게 내달리던 것을 다급히 멈추고, 다시금 그 얼음의 산을 돌아보았다.

상황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종들은 일을 수습하기는커녕 달아나기 급급했다.

또한, 그 얼음의 외벽에는…….

“으윽.”

곳곳에 가시나무처럼 돋아난 날카로운 얼음 기둥으로 인해서일까, 붉은 피가 새하얀 얼음의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그 광경을 목격하고 혀를 깨물 뻔했다.

“끄아아아악!”

“살려, 살려 줘!”

아우성치는 비명, 그럼에도 멈출 기미 없이 밀어닥치는 얼음의 산.

“……이게, 뭐야.”

나는 이를 꾹 깨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이 일을 해결하려 나서지 않는다면, 나라도 정령을 소환해야 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가고 있잖아.

나는 빙벽에게서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바쁘게 발을 놀리며 맹렬히 생각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는…… 공격 가능한 권능이 없는 일리피아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태산 같은 빙벽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내가 소환할 정령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나이아드]!”

통-

긴박하던 상황 속.

고요한 수면 위 하나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이구나, 이디스.]

“나이아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너무 보고 싶었어!

나는 울먹이며 나이아드에게 달려갔다.

나이아드는 나를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며 주위 상황을 살폈다.

[이제는 좀 평안해지길 바랐건만. 이번에도 위급한 상황이구나.]

“나이아드, 도와주세요, 저 이상한 얼음 산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황태자 궁을 다 깨부수고 있어요!”

말하면서도 어이없는 상황에 이게 정녕 현실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이아드는 거대한 빙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커졌다.

그다음 순간,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건…… 프린셔의 기운이잖아!]

엥?

……프린셔?

나는 나이아드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프린셔라면…… 얼음의 정령왕의 이름이 아니던가?

[어째서…… 이곳에.]

하지만 처음으로 보는 나이아드의 당황한 기색에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나이아드, 프린셔가 왜…….”

조심스레 말을 꺼내던 그때였다.

사아아아-

내 등 바로 뒤에서, 섬뜩한 한기가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나를 집어삼켜 저와 함께 얼려 버릴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반사적으로 뒤돌아섰고, 그 순간.

“!”

시체처럼 차가운 손이 내 목을 그러쥐었다.

나는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코앞에서 푸른 안광이 번쩍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시리도록 형형한 푸른 눈동자.

고작 나보다 두어 살 정도 많을까.

내 목을 쥔 손의 주인은, 까닥 정신을 놓았다간 영혼을 팔아 버릴 듯 기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린 소년이었다.

뭐, 뭐야? 얘는?

왜 다짜고짜 사람 목을 쥐는 거지……?

나는 당황에 눈알만 굴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그 순간, 나를 똑똑히 응시하던 소년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그 소년이 내 목을 당장이라도 조를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웃음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네가…….”

내 목을 당장에라도 조를 듯 그러쥔 소년이 천천히 말했다.

“헤일리안의 딸이구나?”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의아함은 상관없다는 듯, 그 소년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내 이목구비 구석구석을 뜯어 살폈다.

그리고 다시금 말했다.

“이름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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