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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9)화 (20/141)

<19화>

이, 이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는 물음에 나는 당황에 빠져 아무런 대답도 내뱉지 못했다.

얘 진짜 뭐 하는 녀석이지?

“저곳은 황태자 전하와 2황자, 대공녀께서 계신 방인데!”

그 순간, 긴박한 외침이 황망한 와중 귓가에 내리꽂혔다.

……뭐?!

나는 기겁하며 내 목을 틀어쥔 소년의 팔을 잡아 떼어 냈다.

“…….”

만약 그 소년이 계속해서 버텼다면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 그는 별다른 반발 없이 순순히 내 목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게 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우선 고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얼음의 산이, 아까 전 내가 나왔던 황태자의 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나이아드, 저걸 좀 막아 주세요!”

맙소사, 나는 다급히 나이아드에게 도움을 구했다.

나이아드는 이미 물의 정령들을 보낸 뒤였다.

그러나.

[꺄아아악!]

[나이…… 아드…… 님…….]

얼음 결정체에 가까이 닿는 순간 물의 정령들은 얼어붙다 못해 새하얀 빙벽과 동화되어 서서히 그 형체를 잃어버렸다.

[내 권속을 앗아 가는구나, 프린셔……!]

나이아드는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물 속성은 얼음 속성을 이길 수 없다. 인간들을 살리고 싶다면 차라리 일리피아를 부르거라!]

예상치 못한 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낭패감에 사로잡혀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아드의 말은 옳았다.

일리피아는 다른 무엇도 아닌, 생명의 정령왕.

원칙적으로 그는 죽은 사람도 부활시킬 수 있지만…….

“그건 안 돼요!”

[어째서지?]

나이아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마 전, 일리피아가 내게 당부했던 충고가 스쳐 지나갔다.

[이디스. 나는 죽은 자도 되살려내는 권능이 있다. 하지만 너는 그걸 사용하기에 너무 어려.]

[훗날 너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지고의 자리에 오르겠지.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도래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네 기력은 내 권능을 온전히 감당해내지 못한다.]

[중상에 달하는 상처를 입은 자를 회복시키거나, 오염된 것을 정화하는 수준의 권능은 사용해도 돼. 하나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힘은 결코 구사하지 말거라. 만약 억지로 감행한다면 되레 너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니.]

“……제가 아직 어려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힘은 쓸 수가 없어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맙소사……. 이럴 때 네 마지막 남은 속성이 발현된다면 좋으련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역시 때가 아니란 말인가.]

나이아드는 침음을 삼키며 읊조렸다.

[그렇다면 저곳에 있는 인간들의 왕자와 네 피 섞이지 않은 자매가 죽지 않을 만큼만 다치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구나.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뭐라고?

나는 패닉에 빠진 채 황태자의 침실 코앞까지 닥친 빙벽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참담했다.

“네 이름을 가르쳐 줘.”

그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가르쳐 주면, 저 얼음을 모두 없애 줄게.”

나는 망연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토록 다급한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한 남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이름이 뭐라고, 그걸 알려 주면 저걸 모두 없애 주겠다는 거야? 그리고 네가 저걸 어떻게 없…….”

나는 황당함에 물었다.

“안 알려 줄 거야? 그럼 계속하고.”

그러자 소년은 내 말을 자르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얘가 이 일의 주범일까?

그냥 회까닥 돈 꼬맹이 아니야?

애초에 이름 하나 가지고 이 상황을 멈춰 주겠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꺄아아악-! 황태자 전하!!”

그때, 다시금 시녀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거대한 얼음 더미가 황태자와 2황자, 알레아가 있는 방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나는 저 소년에게 이름을 알려주어선 안 된다는 본능이 경고하는 직감과 갈등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이디스라고! 빨리 멈춰!!”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온 것 같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뭐야……?”

황태자가 있던 방의 외벽까지 부서뜨렸던 빙벽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나는 망연히 숨을 몰아쉬며 그 믿지 못할 광경을 응시했다.

……진짜였어?

정말로, 저 남자아이가 빙벽의 움직임을 조종하던 배후였다고?

“으아아앙!!”

“세상에, 2황자 전하!”

그때 2황자가 눈물 바람으로 부서진 궁전의 잔해 속에서 뛰쳐나왔다.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가 2황자를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온몸에 힘이 쭉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남자애, 그 녀석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정말로 이 일을 네가 일으킨 것이 맞는지 추궁해야……!

나는 부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그 소년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내 이름에 그리도 집착했던 것인지.

“……어?”

모두 물으려 했건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뒤에 다가와 있던 남자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갑자기 상황이 해결되었구나. 이상한 일이야. 아무튼간에 이디스, 나는 이만 가 보마.]

“아.”

텅 빈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던 때, 뒤에서 나이아드가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

나는 그가 떠나기 전에 재빠르게 물었다.

“저, 그런데 아까 전부터 제 뒤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보셨어요?”

내가 소년과 대화하는 모습을 나이아드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내 곁에 있었으니까, 어디로 갔는지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남자아이?]

그런데, 나이아드의 반응이 이상했다.

[너 말고 다른 아이가 이곳에 있었느냐?]

나이아드는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네?

[미안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아까부터 이 자리에 있던 이는 나와 이디스, 너뿐이었단다.]

나이아드는 내 주변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주위가 소란스럽다 보니 헛것을 본 모양이구나. 그럴 만도 하지. 지난번의 일에 이어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이아드는 거기에 한술 더 떠 내가 가엾은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디 들어가서 푹 쉬고,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부르렴.]

포로롱-

수많은 물방울이 물거품처럼 피어올랐고.

나이아드는 형체 없이 사라졌다.

“……아니.”

온몸에 피가 싹 빠지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손끝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말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네 이름을 가르쳐 줘. 가르쳐 주면, 저 얼음을 모두 없애 줄게.’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차가웠던 손.

나타나자마자 내 목을 조르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나이아드.

거짓말처럼 모든 의문이 맞춰졌다.

그리고 그 귀신인지 뭔지, 정체도 모르는 놈에게 이름을 말해 버린 나…….

“할아버지…….”

나는 흐느끼며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너 뭐야, 진짜 뭐냐고…….

“이디스!!”

그때 내 이름을 외치는 로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는 차가운 돌바닥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에 주저앉아 있어!”

저 멀리 서 있던 로베릭은 다급히 달려와 내 몸을 일으켰다.

불안함에 미칠 것 같은 눈빛으로, 내가 딱히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한참 동안에 걸쳐 확인한 그는 있는 힘껏 내 몸을 끌어안았다.

“정말 다행이구나, 다친 곳은 없어? 응? 어서 말해 보렴, 아버지가 치유해 줄 테니까…….”

로베릭은 언뜻 울먹인다고 착각할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숨이 막혀 왔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안 다쳤어요. 바깥에 나와 있었으니까.”

“……다행이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로베릭은 나를 끌어안은 손에 더 힘을 주며 속삭였다.

“……아버지.”

그 순간, 가느다란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알레아의 것이었다.

“알레아.”

로베릭은 그제야 알레아가 떠올랐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처를 입은 건지, 붉은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리는 왼쪽 팔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싼 채 알레아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했구나. ……팔을 다친 거니?”

로베릭은 알레아를 부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살펴볼 거면 가까이 다가가야지, 이게 뭐 하는 거야?

여전히 나를 품에서 떼어 놓지 않는 그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며 가만히 미간을 좁힐 때, 알레아는 로베릭과 그 품에 안긴 나를 번갈아 응시하다 설핏 미소를 떠올리며 답했다.

“네. 심하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아버지께서 치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로베릭은 그제야 나를 놓고 알레아에게 다가가 피가 흐르는 팔을 치유했다.

로베릭의 작은 속삭임과 함께 그의 손아귀에서 희미하게 빛무리가 반짝였다.

그 광경을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어난 기상천외한 일.

또 그 기묘했던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름 알려 준 것 때문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온몸에 소름이 죽 돋았다.

난데없이 악녀와 남주의 딸이 된 걸로도 모자라, 귀신인지 악마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지 모를 삿된 존재와 엮이기까지 하다니.

나는 내 기구한 운명을 진심으로 한탄하며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소매로 닦아 냈다.

* * *

그 난리가 났으니 예정보다 일찍 대공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알레아!”

눈물 바람으로 내려와 있던 샤스티아는 알레아가 들어서자마자 다급히 달려왔다.

“어머니!”

샤스티아는 알레아를 힘껏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아가……. 이게 무슨 일이니, 다친 곳은? 없는 거야?”

“아버지께서 치유해 주셨어요.”

한동안 알레아의 몸을 살피던 샤스티아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로베릭,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황궁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건가요?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로베릭은 샤스티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용히 대꾸했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알레아를 챙겼어야 했는데.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 거야. 황제 폐하께서도 이제는 결단을 내리시겠지.”

위험한 사고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온 딸을 끌어안으며 우는 엄마, 그런 아내를 달래며 딸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아빠.

그 애틋한 가족의 모습에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

나는 조용히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이디스 대공녀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였다.

뚜벅, 뚜벅.

느릿한 발소리. 익숙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음성.

나는 눈빛을 사납게 굳히며 뒤돌았다.

대공저에 온 이후, 늘 경계했으나 어찌 된 일에서인지 마주칠 일 없던 사람.

페리온이었다.

어느새 나타난 페리온이 무표정한 낯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페리…….”

“오늘.”

로베릭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페리온의 말이 빨랐다.

“오늘, 알레아 대공녀님과 함께 황태자 전하, 2황자 전하와 만남을 가지셨다 들었습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네.”

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리를 비우셨다고요.”

……잠깐,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페리온,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로베릭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페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이디스 대공녀께서 자리를 비우셨던 때, 정체 모를 거대한 빙벽이 알레아 대공녀님께서 계신 장소를 공격했군요.”

“……!”

설마……!

“대공 각하, 이디스 대공녀의 남은 한 가지 속성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불길한 직감이 맞아 들어갔다.

페리온은 눈을 커다랗게 뜨는 나를 마주 응시하며 그 눈을 고요히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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