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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0)화 (21/141)

<20화>

페리온의 발언은 이 사태의 범인을 나로 조장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품고 있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장에 코웃음을 쳤을 주장이었다.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제 의붓 자매를 죽이기 위해 정령의 힘을 빌려 수십 명이 다치고 죽어 나가는 끔찍한 사고를 계획했다고?

당장에 무슨 개소리냐고 일축했겠지.

그러나, 이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

샤스티아는 당장에 알레아를 끌어안으며 극심한 경계 서린 눈빛을 내게 보냈다.

주위의 눈총은 걷잡을 새 없이 차갑게 식어 갔다.

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졸지에 웃기지도 않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비록 이전에도 비슷한 변고가 여럿 존재하긴 하였으나 하필이면 이디스 대공녀께서 자리를 비우신 때 이러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알레아 대공녀님께서 상처를 입으셨지요.”

페리온은 평온한 안색에 한 점 변화 없이 말했다.

“대공 각하의 피를 유일하게 물려받으신 이디스 대공녀께선 당연히 세 속성 모두 정령왕의 축복을 받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한 속성이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라는 가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지요.”

“…….”

다물린 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또한 대공녀께서 이미 발현된 속성을 숨기셨다면 저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페리온의 추론을 수긍하는 듯했다.

사방에서 나를 노려보는 눈총에 온몸이 따끔거려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 나는 정말로 혼자였구나.

이 대공저에 악녀의 딸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 한 명 없었구나.

[저 심해에 처박아도 모자랄 놈이!]

숨 막히는 공기, 무어라 반박이라도 해야 하는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몸이 굳어 어째서인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던 때.

천장에서 둥둥 떠다니던 닉스들 중 하나가 포르르 날아와 잔뜩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디스, 나이아드 님을 불러! 그분께서 이디스의 결백을 증명해 주실 거야!]

아, 나는 퍼뜩 정신을 붙들었다.

그래, 이렇게 침묵해서는 안 돼.

나이아드는 오늘 일어났던 일을 모두 목격했던 명백한 증인이니까.

“…….”

나는 페리온을 한 번 노려본 다음 닉스의 말대로 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순간, 대뜸 로베릭이 나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미처 소환 주문을 읊지 못했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사람을 해치기 위해 정령을 소환했다고?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그따위 저급한 의심을 품을 수가 있지?”

……니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나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로베릭을 쳐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분개한 기색으로 페리온을 노려보았다.

페리온은 로베릭의 분노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의 기색을 내비치다, 곧바로 평정을 되찾고 반박했다.

“이디스 대공녀의 생모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으셨습니까? 갓 걸음마를 뗐던 알레아 대공녀님을 죽이려 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아직 어리다 한들 그러한 본성을 물려받지 않았을 리 있겠습니까!!”

참으로 정성스러운 개소리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덕지덕지 붙여 검증된 것처럼 지껄이고 있는 걸까.

어미가 살인마라면 딸도 살인마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는 건가?

진저리가 나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톡.

“……?”

그 순간.

코끝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잠깐. 실내에서 눈송이?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차가움을 느꼈으나, 광활한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베릭, 어떻게 그러실 수 있나요! 우리 딸이, 우리 딸이 죽을 뻔했다고요!”

기묘한 촉감에 정신을 빼앗겼던 나를 다시 현실로 잡아끈 것은 페리온의 주장을 두둔하고 나선 샤스티아의 목소리였다.

……하.

나는 기가 차 시선을 내렸다.

“샤스티아, 네가 어떻게…….”

로베릭은 충격받은 듯 읊조렸다.

“알레아만 생각해요, 자칫했으면 알레아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그럼에도 샤스티아는 물러서지 않은 채,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얼굴로 외쳤다.

이 상황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 보아도, 누구나 안타까워할 정도로 처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그녀가 주장하는 말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천사 같던 여주인공이 저런 말도 하는구나.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정말로, 자기 의붓 언니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자고 하는구나.

“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당당하게 받아치며 외쳤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고요한 공간에 오직 내 목소리만이 울렸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짓씹는 페리온을 똑똑히 응시하며, 나는 그 이름을 읊었다.

“[나이아드].”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물방울이 꽃처럼 피어났다.

점점 그 수가 늘어나며 하얀 파도 거품으로 변했고.

사아아아-

하나의 형체를 이룬 그것은 가벼운 베일처럼 걷어졌다.

[이디스.]

흰 거품 속에서 나이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분이…….”

“나이아드……!”

정령왕의 소환에 사람들은 나를 노려보던 것도 멈추고 넋을 놓았다.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나를 불렀구나. 그건 더없이 기쁘지만…….]

나이아드는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냉랭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다시 좋지 않은 일 때문에 부른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

[나이아드 님!]

구석에서 이를 박박 갈고 있던 닉스들이 달려가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한동안 권속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이아드는 가벼운 손짓으로 닉스들을 물렸다.

그는 무표정한 기색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내 작은 아이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정작 너희는 은혜도 모르고 나의 아이를 악인으로 몰아가는구나.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자야. 너는 정녕 네 생각이 옳다고 여기느냐?]

낮게 내려앉은 음성은 그가 분개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흑, 흐읍…….”

샤스티아는 겁에 질린 채, 이까지 닥닥 떨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가설은 신빙성 있는 추론입니다!”

겁에 질린 샤스티아를 보호하듯 페리온이 앞으로 나섰다.

진짜 간덩이가 붓다 못해 터져 나갔구나.

나는 이젠 감탄마저 자아내는 샤스티아를 향한 페리온의 지극한 사랑에 혀를 내두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물의 정령왕께서는 마리에트 바스테반을 축복한 정령이셨으니 그 딸인 이디스 대공녀를 감싸 주시는 것 아닙…….”

휘오오오-!

거대한 물보라가 페리온의 말을 자르고 몰아쳤다.

놀라 흠칫할 새도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거센 물보라에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나는 멍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나이아드는 그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감히 정령왕을 추궁하는 오만은 어디서 굴러먹다 나온 것이지? 네 발언은 가상한 용기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열한 악의로 점철된 방종함일 뿐이다.]

물에 젖어 엉망이 된 녹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페리온은 눈을 홉떴다.

[너 같은 건 심해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 압력에 갈가리 찢겨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세상에게 있어서도 더없이 이로운 일이겠지.]

나이아드는 푸른 지느러미가 돋아난 손을 페리온을 향해 뻗었다.

처참한 최후였지만, 아무런 감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잠시만……!”

저놈은 그래도 싸다.

페리온이 다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끔찍한 최후가 시시각각 가까워지던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두 발로 딛고 선 저택의 바닥이 거세게 진동했다.

“뭐야?”

몸이 흔들려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나이아드를 붙들고 버텼다.

“나, 나이아드 님!”

“그만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저희의 죄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이아드가 진노하여 벌어진 현상이라 생각하였는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나 또한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이아드가 일으킨 진동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어디다 대고 비는 거지?]

돌아온 것은, 나이아드의 음성이 아니었다.

생경한…… 낮고, 깊은.

사내의 목소리.

나는 천천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대공저의 한복판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황금빛 빛무리를 몸에 두른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 있었다.

“저자는 누구…….”

나이아드에게 애원하며 바닥에 머리를 박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갈색의 짙은 피부를 가진 젊은 남자는 굴곡진 몸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헐벗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황금과 지하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을 보옥들이 그의 탄탄한 팔과 훤히 드러난 목에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미남자는 나른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

홀을 좌시하던 황금빛 눈이 정확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화들짝 몸을 떨며 나이아드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오리에드……?]

머리맡에서 나이아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리에드?

나는 입을 헤벌렸다.

그건, 대지의 정령왕의 이름이잖아.

[꽤 오랜만이군. 나이아드.]

그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답했다.

[그대가 이곳엔 무슨 일로…….]

나이아드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 당신이 이곳엔 어째서!”

오리에드를 알아본 것인지, 로베릭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소란스러운 고함에 오리에드는 로베릭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네 여식의 마지막 남은 한 속성의 정령이지, 뭐겠나.]

그는 로베릭을 비웃듯 대꾸했다.

……네?

“……마지막 한 속성? 잠시만, 그렇다면 할데바르트 경의 주장은…….”

아니, 잠시만요. 당신이 내 마지막 부속성의 자리에 앉은 정령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겠지! 대지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으셨는데, 얼음이 말이 돼?”

주위에서 경악에 찬 말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맙소사, 이디스 대공녀의 남은 속성 정령은 빙황 프린셔일 거라 의심치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이디스 대공녀께선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거잖아요, 할데바르트 경이 괜히 모함한 거고!”

나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여론의 변화에 눈만 깜박였다.

[작군.]

“흐악!”

바로 그때, 오리에드가 순간적으로 내 코앞까지 다가와 툭 내뱉었다.

내가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하든 말든, 그는 거대한 체구를 숙이고 내 이곳저곳을 뜯어보듯 살피며 말했다.

“잠시만, 그렇다면 당신이…… 이디스를 축복한 마지막 정령이란 말입니까?”

로베릭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은 티가 여실히 묻어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리에드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 원래 이렇게 일찍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가만 놔두다간 네놈들이 내가 축복한 아이를 죽이기라도 할듯싶어.]

“그게, 무슨…….”

로베릭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오리에드는 선연히 인상을 찌푸리다, 무기질적인 미소를 머금고 로베릭을 돌아보았다.

[왜, 틀렸나? 땅에 붙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이 꼬맹이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정령을 이용했다, 뭐 그런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던가. 내가 잘못 들었다고 발뺌하기라도 할 것이냐? 지금 대지의 정령왕의 귀가 먹었다고 몰아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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