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사방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떳떳하지 못하니 단 한마디의 말도 내놓지 못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나이아드에게 기대며 곁에 선 두 명의 정령왕을 올려다보았다.
오리에드의 등장으로 오늘의 사고는 내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이로써 밝혀진 내 속성은 생명, 물, 대지였으니까.
그러나 이 난리를 만든 원인 제공자인 페리온은 분한 기색을 보이며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 젖은 시금치 같은 몰골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가 차서 페리온을 마주 노려보았다.
“[……실프.]”
로베릭은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여 자신의 몸을 말렸다.
그는 말끔해진 모습으로 바닥에 꿇어앉은 페리온을 향해 다가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디스의 속성은 생명, 물, 대지. 이로써 얼음 속성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베릭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분기로 가득했던 페리온의 낯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리온 미하일 할데바르트. 너는 네가 했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페리온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로베릭이 등을 돌리는 것이 더 빨랐다.
“현 시간부로 페리온 미하일 할데바르트의 직권을 정지한다. 대공녀의 명예를 끌어내리려 한 행동은 입에 담기도 힘든 중죄나 마찬가지. 지금 당장 죄인을 감옥에 구금해라.”
“로베릭!”
알레아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샤스티아가 화들짝 놀라 로베릭을 불렀다.
“…….”
하지만 로베릭은 샤스티아를 차갑게 내려다보다, 이내 눈길을 거둘 뿐이었다.
“……!”
평소처럼 달래는 말 한마디 없이.
샤스티아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제게서 멀어지는 로베릭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디스, 괜찮니?”
로베릭이 내게 다가와 자상한 말씨로 물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베릭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많이 지쳤겠구나. 이만 방으로 올라가자.”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나만 한 이가 있을까.
나는 로베릭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오리에드와 나이아드는 떠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문득,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샤스티아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망연히 로베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품속에 끌어안긴 알레아는…….
“……!”
나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작은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갓 꽃망울을 틔운 생명처럼 무구한 분홍빛 눈동자가 이유 모르게 섬뜩하게 비쳐졌다.
나는 황급히 앞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잘 해결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찜찜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 *
작은 소년은 얼음으로 뒤덮인 바닥에 내던져졌다.
“윽…….”
소년은 피가 터진 입가를 손을 들어 훔쳤다.
거친 불길이 그 눈동자에 선연히 비쳤다.
“버러지 같은 것.”
젊은 황제는 이날의 알현실에서 호탕하게 웃어 보이던 것과는 달리 냉혹함이 서린 낯으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하리만치 넓은 방은 봄의 한중간에도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황제는 소년을 밀어 넣은 방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읊조렸다.
“너는 오늘 마음대로 바깥으로 나가 황태자와 2황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헤일리안 대공녀까지 죽이려 했다.”
황제는 말을 이으면서도 섬뜩한 분노가 깃든 눈빛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노려보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또 한 번 확실해졌다. 네놈은 정녕 아무런 교화도 되지 않는 짐승이라고.”
“그게…… 왜 잘못된 거야?”
그 순간, 소년이 내뱉은 말에 황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소년은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그 낯빛엔 두려워하는 기색 한 점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황제의 주위에서 너울대는 불길을 담았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둬 놓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소년은 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당신이 아끼는 아들은 아무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한심한 실패작에 불과하니까.”
콰앙-!
황제는 격분을 참지 못하고 얼음으로 뒤덮인 방의 측면을 향해 거칠게 채찍을 휘둘렀다.
“풋……. 하하!”
새하얀 눈송이가 비산하며, 어둔 방을 설원처럼 물들였다.
소년은 즐겁게 웃었다.
아이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와 입가에 맺힌 붉은 핏방울이 이질적으로 뒤섞였다.
황제는 그 모습을 경멸하듯 응시하며 뇌까렸다.
“내 두 아들들이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한 한낱 인간이라 해도, 너 같은 것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정이다.”
짓씹듯 내뱉고 몸을 돌리던 황제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읊조렸다.
“두 번 다시 이 방 밖으로 기어 나왔다간 정말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방을 떠났다.
쿠구구궁-
하늘에 닿을 듯 드높게, 천장까지 뻗은 육중한 문이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냉혹한 방에 소년은 혼자 남겨졌다.
“허억…….”
뜨거운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소년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라간 입꼬리를 한 채 바닥에 힘겹게 드러누워, 새하얀 성에가 가득 낀 천장을 응시했다.
피에 흠뻑 젖은 붉은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소환의 주문이었다.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아득한 북해의 별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트레가드].”
그 이름이 언어로 흘러나온 순간.
[에시메드.]
소년의 머리맡에서 검은 안개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검게 이지러져 본 모습조차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정령은 몸을 굽혀 아이의 피 묻은 입가를 조심스레 쓸어 주며 작게 속삭였다.
에시메드.
이때껏 그 누구도 불러 주지 않았던 소년의 이름이었다.
“어서 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에시메드는 푸른 눈망울을 가만히 감으며 읊조렸다.
“헤일리안 대공저를 보여 줘.”
* * *
황궁에 또다시 원인 모를 변고가 일어난 후 대공저는 연일 소란스러웠다.
“세상에, 이디스 대공녀께서 세 속성 모두 정령왕의 축복을 받으셨다니.”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마리에트 바스테반의 딸이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피를 그토록 짙게 이어받았을 줄은.”
“무려 생명, 물, 대지의 정령왕께서 이디스 대공녀를 축복하셨다니. 이게 말이 돼? 정령들은 선악의 개념이 없나?”
“……그동안 너무 대공녀께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아. 이제부터라도 잘 보여야 하는데…….”
“야! 그래도 대공비와 알레아 대공녀님을 향한 의리가 있지.”
“하, 대공비? 대공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헤일리안 대공 위는 강대한 정령사에게 먼저 계승된다는 거 잊었어? 그래서 선선대 때에도…….”
평소 굴러온 돌 취급하며 공공연히 배척하던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가 세 정령왕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아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또 한 명의 규격 외 정령사가 로샨 제국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결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각자의 불안과 탐욕으로 떠들썩한 것은 비단 대공저의 사용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소식 들었나! 우리 제국에 또다시 위대한 정령사가 나타났다는 것 말이야!”
“다행인 일일세.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각하의 뒤를 이어 우리를 지켜 주실 새로운 제국의 수호자께서 나타나신 것 아닌가.”
“우리 로샨은 영원히 번성할 것이오!”
로샨 제국의 백성들 또한 새로이 등장한 헤일리안의 두 번째 대공녀가 위대한 정령사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뒤를 이어 정령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귀한 아이라는 소식을 기쁘게 나누었다.
그 달가운 소식 아래,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의 생모가 공공연히 지탄받던 악녀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이라는 사실은 순식간에 묻혀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세 속성 모두 정령왕의 축복을 받았다. 이는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기적입니다. 부모를 이어 자식에게도 이러한 성질이 발현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며…….”
그리고 황궁의 가장 내밀한 곳 또한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저명한 정령학자의 감탄사 어린 보고를 귀 기울여 듣던 황제는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 대에서도 그 우수한 형질이 발현될 확률이 높단 말인가?”
노쇠한 학자는 눈을 끔뻑이며 젊은 황제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요.”
무어라 목소리가 더 이어졌으나 학자의 말은 더 이상 황제의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황제는 유려한 입매를 살며시 올려 미소를 지었다.
* * *
아직도 퍼뜩퍼뜩, 꿈에서 떠올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네가……. 헤일리안의 딸이구나?’
홀연히 나타나,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를 듯 위협적으로 틀어쥐던 정체 모를 소년.
‘네 이름을 가르쳐 줘. 가르쳐 주면, 저 얼음을 모두 없애 줄게.’
그리고 이어진 뜻 모를 요구.
그 말대로 다급히 이름을 들려주자 정말로 모든 것이 멎어 버렸던 순간.
‘……어?’
찰나의 순간에 사라진 그림자.
“으음.”
섬뜩하고 기묘했던 그날의 일.
“……무슨 괴담도 아니고.”
잠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나는 깜깜한 방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툴툴거리듯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대공저에서 내게 주어진 방은 광막하리만치 넓다.
밤이 찾아오면 어찌할 수 없이 외로운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작위 수여식 후에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로베릭에게 약속받았으니까.
나는 그 일을 위안 삼으며 잠을 재촉했다.
편지를 보내면 답장은 빠르게 돌아온다.
할아버지께선 우리가 함께 살아오던 작은 마을로 되돌아가지 않고, 테르마 시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셨다고 한다.
어째서 그 도시에 머무르시는 걸까.
……좋은 기억도 없는 곳인데.
할아버지를 생각하다 보니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며 떠오르는 상념을 억지로 지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