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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2)화 (23/141)

<22화>

* * *

다음 날 아침.

로베릭이 식사를 같이하자며 내 방으로 찾아왔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밤잠을 설친 터라,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디스. 오늘은 황궁에 가 보아야 할 것 같구나.”

“……네?”

그런데 로베릭이 대뜸 그런 말을 꺼내 왔다.

작위 수여식까지 아직 시일이 남았을 텐데, 또 왜?

“황제 폐하께서 헤일리안 대공 일가가 잠시 입궁하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오셨단다. 별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렴. 이제는 결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테니.”

로베릭이 나를 달래듯 뭐라 지껄이든 말든, 없던 입맛도 싹 달아나는 소식에 나는 축 처진 기분으로 수저를 들었다.

* * *

“…….”

지금 당장 오리에드를 불러 탈주할까.

나는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은 헤일리안 일가의 틈바구니에 끼인 채 생각했다.

지난번 나를 모함하려다 오리에드의 등장으로 인해 역공당한 페리온은 아직도 대공저의 감옥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로베릭과 샤스티아의 관계는 전에 없이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페리온이 공개적으로 나를 모함했을 때 샤스티아가 그의 주장을 지지하며 나섰고, 로베릭은 그런 샤스티아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모든 권력을 잃을 위험도 감수하고, 은인이고 뭐고 다 버려 가면서까지 사랑했던 여인을 이토록 냉대할 만큼 나를 애지중지하는 건…… 나도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덩달아 알레아마저 전처럼 로베릭에게 살갑게 애교를 부리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될 일은 당분간 요원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샤스티아는 자신에게 차가운 로베릭을 바라보며 눈물짓다 종종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응시하곤 했다.

……내가 뭘 했다고? 어이가 없었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시기를, 로샨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미소를 머금고 로베릭을 반겼다.

한동안은 서로의 속내를 감춘 의미 없는 대화만 이어졌다.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했지, 로베릭.”

그러던 어느 순간, 황제가 운을 띄웠다.

“그대의 작은 여식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자태가 참으로 곱다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저리 말을 빙빙 돌리나 궁금했는데 갑자기 나를 화두에 끌어들이네?

나는 황제의 말을 경청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제는 편안히 등을 기대며 읊조렸다.

“게다가 발레리안과 나이 차도 그리 나지 않지. 외모며 혈통이며, 출중한 재능 또한 흠잡을 데가 없어.”

“폐하, 잠시만…….”

슬슬 불안감이 올라올 즈음 로베릭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고심한 끝에 결심했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와, 짐의 후계자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의 약혼을 성사시키기로.”

……뭐?

나는 망연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개소리를 들은 거지?

“폐하! 그 무슨, 갑작스러운 말씀이십니까!”

로베릭의 목소리가 멍멍한 귓가에 아득히 울렸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은 이레 안으로 황궁에 들어와 황태자비 교육을 이행하도록.”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약혼식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대공녀 작위 수여식에 함께 거행할 예정이다.”

폭탄을 내리꽂은 듯 충격적인 선언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뒤, 그는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끝. 이제 질문해.”

황제의 말이 내뱉어진 후, 단 일 초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립니까! 미치셨습니까?! 이디스를 누구와 약혼시키겠다고요?!”

로베릭의 고함이 알현실을 가득 울렸다.

반역죄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험악한 기세와 격렬한 반발이었다.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이디스 대공녀만큼 황태자비에 적합한 영애가 없다고.”

황제는 여유롭게 답했다.

로베릭은 퍼런 힘줄이 돋을 만큼 손을 억세게 그러쥐며 외쳤다.

“농은 그만하시지요, 애초에 혼담이 오가던 대상은 이디스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만. 로베릭.”

서늘히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가 로베릭의 격분을 잘랐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황족의 피에 새겨진 축복이 옅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로베릭은 황제의 말에 헛숨을 들이켜며,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 그대의 여식에게 내려진 축복이 필요해. 부탁이다, 로베릭. 내 명을 따라 줘.”

그건 네 사정이고, 갑자기 불똥 튄 나는 뭔데?

나는 황망하다가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토해 냈다.

보아하니 내가 정령왕들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천재라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생각을 이어 가다 알레아를 돌아보았다.

이전에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며 얼굴을 붉히던 수줍은 모습과는 달리, 알레아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낯빛으로 마치 작금의 상황을 좌시하듯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래 황태자와 이어 주려던 알레아를 내치고 나로 대상을 변경한 것 같은데.

황족에게 새겨진 축복이 옅어지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입을 꾹 다물며 생각했다.

내겐 원수나 다름없는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의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안 됩니다.”

“로베릭!”

“간신히 되찾은 제 여식입니다! 이 어린 나이에 황실로 들여보낼 생각은 추호도 품어 보지 않았단 말입니다.”

로베릭은 잇새를 악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예상 밖으로 강경한 그의 대응에 황제는 표정을 굳혔다.

로베릭이 이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내겐 다행인 것일까.

기분이 복잡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로베릭은 내 손을 잡아채듯 붙들며 돌아섰다.

“로베릭. 이는 항명하겠단 뜻인가?”

그를 따라 두어 걸음 옮기던 순간, 황제의 목소리가 로베릭의 발길을 잡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제 가문을 몰락시키실 의중이 피어오르십니까?”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황제가 격분한 듯 고함을 내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했던 오랜 친우를 저버리실 뜻이 정녕 아니시라면.”

그러나 로베릭은 황제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를 흘긋 돌아보며 내뱉었다.

“약혼에 대한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

황제는 아무런 답도 내어놓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흐르는 매섭고 치밀한 기류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 * *

“로베릭, 이건 말도 안 돼요!”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로베릭이 이끄는 대로 알현실 바깥으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살아 나올 것 같은 불사조의 형상이 양각된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샤스티아의 간곡한 외침이 들려왔다.

“원래 황태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던 건 알레아였잖아요. 그런데, 이건…….”

샤스티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망울로 로베릭을 올려다보며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나 또한 이디스를 황태자비로 들여보낼 생각은 없어.”

로베릭은 냉랭히 대꾸했다.

“……아! 고마워요, 로베릭. 당신도 우리 알레아를 생각해 주는군요…….”

샤스티아는 안도한 목소리로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로베릭은 자신의 옷깃을 붙든 샤스티아의 손을 떨쳐 냈다.

“로베릭……?”

샤스티아가 방금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로베릭의 이름을 속삭였다.

“알레아를 위한 선택이 아니야.”

로베릭은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굳은 표정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또 이런…… 무거운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약속하마. 절대 네가 원하지 않는 혼약은 강요하지 않을 거란다.”

로베릭은 간곡히 약조하며 내 손을 꼭 붙들었다.

그의 뒤편에서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세게 쥐어 우그러뜨리는 샤스티아의 모습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불쌍한 내 아기…… 엄마가 미안해…….”

샤스티아는 알레아를 끌어안으며 나직이 흐느꼈다.

그럼에도 로베릭은 끝내 샤스티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뒤엉킨 심경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다방면에서 망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 * *

답답하다.

짜증이 불쑥불쑥 치솟고, 머리는 명쾌하지 못한 채 늘 흐리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얼굴이 죽상이군.]

“아야.”

정령 친화도를 올릴 겸 소환해 놓은 오리에드가 그런 나를 지그시 들여다보다 대뜸 양 볼살을 쭉 늘어뜨렸다.

“하지 마세요.”

나는 그의 손을 탁, 쳐내며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리에드의 손은 예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프잖아.

나는 붉게 변한 볼을 문질렀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지?]

“네?”

그리고 불쑥 건네어진 물음은 생경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역광을 등지고 창가에 기대앉은 오리에드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도 싫어하는 친부를 따라 대공저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

[애초에 여기서 무엇을 이루고자 한 것이지? 너만큼의 재능이라면 로샨의 대공녀 지위 따위, 얻지 않아도.]

그는 느른히 말을 이었다.

[충분히 영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외조부와 함께.]

……그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사소하지만, 결코 묻어 둘 수 없는…… 복수심 때문이에요.”

나는 꼭꼭 씹듯이 말을 고르고 골라 그의 물음에 답했다.

[복수?]

오리에드가 내 대답을 나직이 되풀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잃으셨던 모든 것을 온전히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욕심.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모멸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복수심.”

[그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이군.]

오리에드는 딱 잘라 말했다.

이렇게 확인 사살을 받으니 내가 정말 저열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아니, 사실인가?

속도 좁고, 욕심도 많고.

내 사람들이 저지른, 혹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죄를 외면하고 그들이 그랬어야만 했던 이유를 끝내 찾아내려는 이기적인 심성 또한.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요.”

나는 자조하듯 야트막하게 웃음을 그리며 답했다.

녹진한 황금을 녹여 낸 것처럼 진하고 깊은 빛을 머금은 금안이 나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가리지 말고 이용해.]

“…….”

[네게 필요한 것만 뱉어 내게 만든 뒤 내버리란 말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세상천지 널리고 널렸다. 그렇다면 너도 모든 양심과 거리낌을 버리고, 철저히 너만을 위해 살아가.]

코앞까지 드리워진 조각처럼 우미한 낯이 내 마음을 거쳐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네가 뭘 하든, 내 전적으로 너의 편이 되어 줄 테니.]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감히 앞으로 일어날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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