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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3)화 (24/141)

<23화>

“……감사, 합니다.”

나이아드도, 일리피아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다.

나는 얼이 빠져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오리에드는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묵직한 시선은 어째서인지 몇 마디 말보다 더한 안온함으로 와닿았다.

그 앞에서 나는 결심했다.

“아버지.”

황태자와의 약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저,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비록 원수의 자식과 혼약해야 하나 이는 내게 얻을 것이 더 많은 선택이었다.

로베릭의 헤일리안 대공 작위를 쟁취해 내는 것이 내 목표였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모든 염원을 이루겠다고 다짐했으나 사실 그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아무리 로베릭이 내게 우호적이라 해도 제가 쥔 막대한 권력을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기회를 노리며 숨을 죽이기에는…… 할아버지께 남은 시간이 그만큼 넉넉하리라 단정할 수가 없다.

비록 황제가 나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으로 황태자비 지위를 내미는 것이라 하여도, 황태자와 약혼으로 묶이게 된다면 황실의 권력과 지지가 자연스레 뒤따라오게 된다.

또한 결혼이 아닌 명백히 파혼이 가능한 약혼이므로 훗날 빠져나갈 구멍도 존재하니, 황제가 내게 내민 손을 지금은 붙잡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다면 가리지 말고 이용해.]

[네게 필요한 것만 뱉어 내게 만든 뒤 내버리란 말이다.]

[네가 뭘 하든, 내 전적으로 너의 편이 되어 줄 테니.]

종래에 오리에드가 한 약속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이디스, 그게 무슨……. 안 된다, 벌써 약혼이라니!”

로베릭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주저앉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황실과의 혼약이다.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의무와 압박을 평생 동안 견디며 살아가야 해! 이디스, 아버지는 결코 허락하지 못하겠구나.”

내겐 이 대공저에서 버티는 것이나,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 모든 게 결과적으로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권력과 정략혼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평화롭게 살아가던 나를, 저만의 이기적인 집착으로 끌고 오는 바람에 나는 암살 위협까지 당해야 했으며 본의 아니게 개화한 능력으로 곳곳에서 나를 이용하기 위해 손을 뻗쳐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이용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저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

“그게 무슨……?”

나는 지친 심경으로 뇌까렸다.

“헤일리안 대공 위는 저보다 먼저 대공녀 작위를 수여 받은 알레아가 물려받게 될 테니까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꽤나 유용한 기회가 찾아왔으니 한 번이라도 살짝 떠보자.

만약 이 남자가 제 목숨이 다하기 직전의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과연 제 작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인지.

“……이디스. 왜 알레아가 대공 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로베릭은 정말 한 번 떠올려 보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당연히, 알레아도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딸, 그래. 딸은 맞지.”

그는 딸이라는 단어를 곱씹듯 반복했다.

그리고는 불현듯 내 손을 꼭 붙들어 쥐며 말했다.

“하지만 이디스, 알레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 아니란다. 대공 위는 헤일리안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자는 결코 물려받을 수 없어. 아버지는 선조의 규율을 깨뜨려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는 지척에서, 그 자신의 것과 똑 닮은 내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내 뒤를 이어 헤일리안 대공이 되는 사람은 네가 될 거란다.”

“…….”

그래도 알레아를 진심으로 아끼는 줄 알았는데.

나는 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생각했다.

이토록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고한 답이라니.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향한 사랑보다는, 피가 이어진 혈육을 향한 집착이 더 강했던 건가.

“그러니 황태자비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내 뒤를 이어 대공이 되어야 하는데, 황태자비가 되면……. 황실의 일원은 작위를 겸할 수 없다. 그러니, 이디스…….”

“저는 가족을 만들고 싶어요.”

……아무튼 네 속내는 대강 안 것 같으니까 내 할 일이나 해야지.

“……뭐?”

옅은 미소를 그리며 조곤조곤한 말씨로 나를 설득하던 로베릭의 낯이 순간적으로 물에 씻어 내린 듯 무표정해졌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면서 가족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늘 바라왔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생겼지만, 어차피 대공녀가 되고 나면 정략결혼을 해야 할 테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그 상대는 미리 정해 놓고 싶어요. 지난번에 황궁에서 뵈었을 때 황태자 전하께선 상냥하고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제 미래의 부군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안전장치 하나 더 마련해 놓겠다고 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다 지껄이는구나.

순간 헛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꾹 참고 로베릭을 응시했다.

“그러니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

로베릭의 새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은.

“……알겠다, 이디스.”

내 예상대로였다.

* * *

내가 정식으로 황궁에 입성하기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황궁은 전에 없이 소란스러웠는데, 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작위를 몰수당하고 추방당한 전 바스테반 공작 영애와 헤일리안 대공 사이에서 태어난, 그 출생 배경마저 놀랍기 그지없는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가 황태자의 약혼녀로 내정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정령 소환이 금지되었다니요……!”

황궁 내에 황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정령 소환을 금지하는 주술이 걸린 것이었다.

황궁 살림을 관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하위 정령의 소환은 허용했지만, 그 이상으로 등위가 높아지는 정령은 그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소환이 일체 금지당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에 잠겼으나 그 연유를 전해 듣고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거대한 빙벽이 황태자 궁을 습격했던 일은 이미 한두 번 일어난 변고가 아니었다.

몇 해에 걸쳐 수차례 벌어져 왔던 일이었고, 점차 그 규모와 위협의 세기가 강해져 곳곳에서 말이 흘러나오던 와중이었다.

‘감히 짐의 자리를 물려받을 후계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불온한 움직임을, 이번 기회에 싹을 잘라 버리겠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더 이상 그 원인 불명의 사건을 좌시하지 못하겠다는 듯 황제가 선포한 것이었다.

……이런 연유가 있으니 뭐라 항의할 수도 없고.

황족이라는 명칭은 두 대 위 안으로 루에이리 황가의 피가 섞인 이들을 뜻하는 표현이었기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졸지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을 겪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분간 소환을 못 할 것 같아요.”

사정을 전해 들은 정령왕들이 보인 반응은 각자 다 달랐다.

[프린셔…….]

오리에드는 프린셔의 이름을 낮게 짓씹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똑바로 하라고 단단히 이르고는 정령계로 되돌아갔다.

[이럴 수는 없다. 앞으로 너를 보지 못하게 되다니…….]

“영영 이별하는 건 아니에요. 문제가 해결되면 예전처럼 소환할 수 있을 거예요.”

나이아드는 보는 내가 다 뻘쭘해질 만큼 절절한 태도로 이별을 거부했다.

꼭 붙든 내 손을 놓으려 하질 않아 난감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디스가 곤란해하잖니. 그만하고 돌아가렴.]

일리피아의 달램으로 나이아드는 겨우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을 더 머뭇거리다, 부디 몸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뒤에야 정령계로 돌아갔다.

[나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일리피아는 늘 그랬듯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내게 과분한 기대를 보여 주었다.

“……최대한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아무튼 내가 선택한 길이니 최선을 다해야겠지.

[그래. 곁에 있지 않더라도, 언제나 내가 너를 축복하며 더없이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말려무나.]

일리피아는 그런 나를 향해 눈이 부시도록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산란히 반짝이는 여러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나는 손을 꼭 쥐고 가슴께로 가져다 대었다.

낯설고 외따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은 대공저에서도 느끼던 것이었어.

황궁에 간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할아버지가 없는 한, 내겐 다 똑같은 장소일 뿐.

* * *

다음 날.

황혼이 저무는 시각, 나는 황궁에 들어섰다.

그리고 황제의 뜻에 따라 가장 먼저 알현실로 불려갔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르진 않았으나, 너도 이제 황가의 사람이 되었다.”

황제는 시종이 들고 온 붉은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자, 받거라.”

나는 황제가 내민 무언가를 받았다.

“……펜던트?”

그 물건의 정체는 펜던트였다.

로샨 제국의 상징인 화려하고도 강렬한 불사조의 모습을 한 불의 정령왕 피닉스가 펜던트의 중심에 당장에라도 날아오를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알현실로 들어서는 문에 양각되어있던 모양새와 꼭 같았다.

펜던트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가넷이 촘촘히 박혀 그 외관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반려이자 미래의 황후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물건이다. 중히 간수하도록.”

“……네.”

“본래는 황후가 지니던 유물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어차피 황후가 될 네가 지니고 있는 게 낫겠지.”

대대로 로샨의 황후가 지녀오던 유물이었구나.

나는 펜던트를 들여다보던 것을 멈추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떠올리는 듯 차갑게 식은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그에 잠시 의아함을 품을 때, 시종이 황태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황태자는 나를 바라보며 상기된 낯을 보였다.

“일전에 말했던 대로, 네 약혼자이자 황태자비가 될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앞으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사이니, 일찍 친해지는 게 좋겠지.”

황제는 그의 낯에 떠올랐던 이유 모를 서늘한 기색을 완전히 거두고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감도는 낯으로 그의 장자를 바라보았다.

“함께 정원이나 산책하고 오거라.”

“네, 아버지. ……에스코트를 해도 괜찮을까? 이디스 대공녀.”

……그 기색의 변화가 어딘지 찜찜하게 느껴졌다.

나는 손에 들린 펜던트를 한 번 꾹 쥔 뒤, 황태자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황태자 전하.”

그리고 펜던트를 목에 걸고 황태자의 팔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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