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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4)화 (25/141)

<24화>

* * *

황제를 대면하느라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바깥 하늘은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카만 그림자가 내려앉은 밤의 정원에 붉은 장미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있었다.

한동안 곁에서 말없이 걷던 황태자가 말했다.

“지난번의 일로…… 몸이 상하지는 않았어?”

“아, 괜찮았어요.”

“다행이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된 안부도 챙기지 못했던 걸 계속 후회하고 있었어.”

황태자는 그 나이대 소년 같은 풋풋한 말씨로 재잘거렸다.

옅은 녹안이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향했다.

“그걸 받았구나. 잘 어울려.”

“과분한 말씀이세요.”

황태자는 내 대답에 작게 웃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지니고 계셨던 황가의 유물이야. ……돌아가시면서 주인 없이 홀로 남겨졌지만.”

2황자, 헨델 하날 루에이리는 황후의 소생이 아닌 황후가 죽고 새로 들어온 황비가 낳은 아들이었다.

내가 목에 건 이 펜던트는 오직 황제의 반려, 황후만이 지닐 수 있는 유물.

……목적을 이루면 파혼할 생각으로 들어온 내가 지니기에는 조금 양심이 찔리는데.

“으악!”

사소한 양심의 가책과 앞날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던 순간, 옆에서 얌전히 잘만 거닐던 황태자가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전하?”

나는 당황스럽게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 미안. 갑자기,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서…….”

황태자는 희게 질린 낯으로 대답했다.

“……?”

나는 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버석하다 못해 흙가루가 흩날릴 만큼 건조했다.

대체 어디가 미끄럽다는 거지?

황태자도 제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사실을 아는지, 붉어진 얼굴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뭐야, 이게…….”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뭐야?

확연히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리던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의 엉덩이와 맞닿은 흙바닥이 꽝꽝 얼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정확히, 황태자가 주저앉은 부분만 반질반질하게 얼어 있었다.

나는 그 해괴한 광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황태자는 땅과 하나로 붙어 버린 제 엉덩이를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왜,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은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그러니까……. 흡…….”

당혹스러운 그 광경을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 더듬거리며 말을 잇던 황태자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저, 전하.”

눈물을 뚝, 뚝 흘리는 황태자의 말간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창피하겠지.

그래, 충분히 그럴 만도 한데…….

“흐윽, 흐어어엉…….”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나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위를 살폈다.

왜 하필 시종들을 다 물리고 정원에 들어섰던 것일까.

안 되겠다, 직접 불러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디디던 그때였다.

톡.

“어?”

불현듯, 눈꺼풀 위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차가움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이었다.

“아!”

고요한 밤하늘의 정경을 마주하던 나는 지난번의 기억을 되새기고 탄성을 내질렀다.

지난번 페리온이 나를 모함했을 때, 아무것도 없던 천장에서 눈송이인지 얼음 조각인지 모를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똑같아.”

그때와 같은 선명한 감각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또 추워졌어.”

나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 이상한 현상 또한 분명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그날, 황태자 궁에 거대한 빙벽이 쳐들어와 궁을 다 뭉그러뜨렸던 날.

그날 이후에도 간간이, 혼자 있을 때면 느껴지곤 했던 이상한 기운이지 않는가.

……폐를 얼릴 듯 차가운 이 기운.

착각이 아니야, 똑같다!

나는 두 손을 말아 쥐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네 이름을 가르쳐 줘. 가르쳐 주면, 저 얼음을 모두 없애 줄게.’

내 이름을 듣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던 정체 모를 소년이 환상처럼 떠올라, 나를 향해 다시금 그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흡, 흐윽, 끅…….”

그 기시감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황태자의 흐느낌만 빈 공간에 가득 울려 퍼질 뿐.

……괜히 경계했나?

나는 괜히 뻘쭘해져 눈만 깜박이다, 서럽게 흐느끼는 황태자를 달랬다.

“전하,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흑, 내가, 내가 이러려던 게 아니라…….”

“네네, 잘 알고 있어요. 전하는 전혀 못나 보이지 않으세요.”

황태자가 주저앉은 곳을 발로 툭툭 쳐 보았다.

이거 내 힘으로는 안 되겠는데.

정령 소환이 금지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처음 하려던 대로 시종이나 불러오자. 나는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밤의 정원에는 새빨간 장미꽃들이 양옆으로 한가득 피어나 있었다.

내가 달리면 달릴수록 붉은 꽃들도 나와 함께 달리는 듯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없으니.

“……어?”

어느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분명, 정원으로 들어올 때는 5분도 안 걸렸는데…….”

10분이 넘게 달린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정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걸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 닿는 곳마다 붉은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난 화원은 아까 보던 광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

그러나 매혹적이던 붉음은 기묘한 섬뜩함이 더해져 이유 모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상을 자각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와 한기가 나를 덮쳐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감싸 안으며 애써 중얼거렸다.

“그래. 조금만 더 가 보고…….”

내 착각일 거야. 괜히 이상한 상상이나 해서 그래.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걸었다.

10여 분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나는 비로소 지금의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차가운 식은땀이 목 줄기로 흘러내렸다.

다른 때였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정령부터 소환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정령 소환을 못 하잖아…….”

미쳤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나이아드].”

혹시 몰라 소환 주문을 읊어 보았지만, 역시나였다.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환 주문을 읊으면 가슴께에서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차올랐는데, 지금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령 소환을 금지하는 주술이라고 했지.

……원작에서도 주술에 대한 건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이 없는데.

정령왕의 권능마저 금제하다니, 그 주술의 힘은 대체 무슨 원천으로 만들어 낸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정령 소환도 금지된 이 황궁에서 벌어진 정체 모를 괴이한 상황을 맞닥뜨린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촤르륵-

그 순간, 생각에 잠겨 흐려진 시야 앞으로 새빨간 장미꽃 한 무더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라?

나는 눈을 비비며 앞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착시인가?

후드득-

“뭐, 뭐야!”

내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걸까.

탐스러운 장미꽃을 주렁주렁 매단 덩굴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며 제 옆의 장미 나무들을 짓밟고 끌어안아 그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나는 기괴한 광경에 기겁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우람한 장미 덩굴은 주위의 모든 장미 나무를 옭아매었고, 이내 단 하나의 길을 만들어 냈다.

“……이건…….”

나는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밝은 낮에 보았다면 아치형의 아름다운 장미 통로로 보였을 것만 같은 오솔길이었지만.

이토록 괴상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름답게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

나는 주춤거리며 다가가 덩굴에 살짝 손을 대 보았다.

덩굴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잠잠했다.

“뭐야, 이거. ……여기로 들어가라는 뜻이야?”

나는 붉고 캄캄한 통로를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딱 봐도 수상한 기운이 명확히 느껴지는데, 여길 내가 왜 들어가.

“어떡하지…….”

하지만 계속 서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돌아보고…….”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뒤돌았다.

그리고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걸어왔던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은 언제 자라났을지 모를 푸르른 관목 식물들로 막혀 있었다.

“……하, 하하.”

작은 모공 하나하나까지 소름이 돋았다.

모든 퇴로가 사라졌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뒤돌았다.

마치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 마냥 캄캄한 길이 나를 맞이했다.

……아무 정령도 소환할 수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장미 덩굴이 만들어 낸 기이한 통로에 발을 들이는 것뿐이었다.

* * *

저벅,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어둡고 섬뜩하던 통로도 어느샌가 끝이 보였다.

빛이다.

나는 어슴푸레한 풍경이 비쳐 오는 것을 목격하고 기쁘게 달려 음산하기 그지없던 통로를 벗어났다.

“……성?”

길의 바깥에는 오랫동안 버려진 듯해 보이는 황량한 성이 있었다.

황궁에…… 이런 곳도 있었나?

나는 그 거대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흐르는 고성을 올려다보았다.

성의 외관은 회백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벽면에 새하얀 성에가 가득 피어 있었다.

활짝 열려 한쪽이 뜯어져 나간 창문 바깥으로 푸르스름한 얼음 기둥이 커다랗게 뚫고 나와 마치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었다.

그 얼음은 꼭.

“……그날.”

황태자 궁을 습격했던, 빙벽과 겹쳐 보였다.

한마디로 몹시 을씨년스러운 성이었다.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될 듯한 장소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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