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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5)화 (26/141)

<25화>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덩굴 통로가 차라리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선 찰나였다.

“-으아아악!”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 나는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꾸물꾸물,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이상한 덩굴이 꼭 사람 형상으로 뭉쳐진 채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건 또 언제 나온 거야!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말로는 사람 형상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목구비도 없이 그냥 덩굴이 인간 형체로만 뭉쳐진, 말 그대로 키메라였다.

그것은 내 고함이 사위를 가득 울리자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더니, 나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오지 말라니까!

나는 경기하듯 비명을 내지르며 성을 향해 달려갔다.

당장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성이든 뭐든 저 괴물보단 나을 것 같았다.

잡초가 무성히 핀 정원을 가로질러 활짝 열린 건지, 입구가 뜯겨 나간 건지 모를 뻥 뚫린 궁전의 홀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흡!”

새카만 그림자로 뒤덮여 촛불 하나 밝혀 놓지 않은 내부가 나를 반겨 주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것도 잠시.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홱 뒤돌아섰다.

“……뭐야?”

그러나, 덩굴 키메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올 줄 알았는데……. 설마, 주위에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다급히 눈을 부릅뜨고 어두컴컴한 홀의 내부를 구석구석 살폈지만, 기괴한 형체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일단 그게 제일 무서웠어.

나는 일단 한숨 돌리고 숨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성의 내부를 살폈다.

가득 쌓인 먼지와 정체 모를 얼룩으로 빛이 바래 버린 황금 기둥, 범상치 않은 높이를 자랑하는 천장의 넓이를 보아 이전에는 매우 지체 높은 이가 머물렀을 궁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웅장한 천장 곳곳에 걸쳐진 커다란 거미줄, 하필이면 얼굴 부분이 흉측하게 찢어지고 깨져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인의 모습이 담긴 액자.

어느 한군데씩이 부서져 바람에 덜그럭, 덜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가구들.

……곧바로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 무슨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이야…….

나는 이 기막힌 상황에 숨죽여 흐느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망할 덩굴 키메라가 뒤따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바깥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별다른 퇴로도 없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이 섬뜩한 폐허에 몸을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당장은 이렇게 피하더라도, 나중에는 어떡하지?

아, 제발 이 모든 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불안함에 조여 오는 심장께를 꾹 누르며 조심히 걸음을 디뎠다.

“으앗!”

이런 젠장, 넘어질 뻔했다.

나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왜 이렇게 미끌거리는 거야…….

“……얼음?”

고개를 숙인 나는 뜻밖의 물체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때까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바닥이 온통 새하얀 성에로 뒤덮여 있었다.

하얀 종적이 이어진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황량하리만치 넓은 복도가 이어졌고.

그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

어째서 이 순간, 또다시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늘에서 그토록 환한 볕이 내리쬐는데도 한 줌 반사되는 빛 없이.

캄캄한 어둠을 부어 색을 입힌 듯했던 검은 머리카락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던 시리도록 형형한 푸른 눈동자.

금방이라도 홀릴 만큼 기묘하게 아름다운 외모 속에서 느껴지던 뜻 모를 음울함.

그 외양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차가운 물에 천천히 잠기는 듯했다.

그 소년은 정체를 짐작할 수 없으나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했고.

“이 성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이곳까지 오는 과정이 또 얼마나 기묘하고 이상했던가.

그 모든 사실들이, 노골적일 정도로 하나의 종착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이곳으로 들어서라는 듯 내 앞에 드러난 버려진 성과, 그 속을 볼 수 없게 단단히 잠긴 방.

저곳에 그 소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인적 하나 없는 서늘하고 고요한 홀은 그대로였으며 그 바깥의 풍경 또한 여전할 것이다.

……퇴로는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주저하던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넘어지지 않게끔 조심히 걸음을 디뎠다.

굳게 닫힌 문가에 도달했다. 문고리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차가워.”

너무 차가웠다. 하얗게 굳은 얼음에 직접 손을 댄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던, 그때였다.

“문, 열어 줄래?”

문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나는 다급히 문고리에 올려 두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사람, 사람의 목소리.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날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주르륵 돋았다.

“……너.”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커다란 문으로 가려진 방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그날 보았던 소년의 형상을 띤 무언가였다.

“네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거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괴상한 현상을 일으킨 주범이자 나를 이곳까지 이끈 존재였다.

더 이상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을씨년스러운 성의 얼어붙은 방.

고작해야 두어 살 정도 나보다 많을 것 같은 어린아이가 태연히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으며, 이곳까지 오면서 본 광경들이 그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부정했다.

지금 황궁은 정령 소환을 금지하는 주술을 걸어 놓은 상태다.

그 때문에 나 또한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끌려 들어오지 않았던가.

결코,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래. 내가 너를 불렀어.”

정체 모를 것이 태연히 화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언뜻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기색도 묻어 있었다.

그리하여 섬뜩함은 배를 더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했던 부탁은 잊었어?”

……부탁?

나는 황망히, 제 안에 든 것을 한 톨도 내보이지 않는 거대한 문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문, 열어 달라고 했잖아.”

……아.

나는 잊어버렸던 방금의 목소리를 다시 되새겼다.

그래. 저것은 아까부터 내게 일방적으로 자신이 있는 방의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어째서?

직접 열고 나오면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불현듯 하나의 깨달음이 뇌리에 떠오르며.

아, 저것은 지금 갇혀 있는 것이구나.

정체 모를 누군가에 의해 이 문 너머에 갇힌 것이었다.

나는 망연히 그 문을 응시하며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문을 열어야 하지?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것은 분명 황태자를 해치려고 했고, 그것도 여러 번이나.

황궁 바깥의 사람들까지 모두 알고 두려워할 만큼 수없이.

그 모든 시도의 끝에 감금된 상황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으니 지난번 이름을 들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열어서는 안 된다.

이 문을 열었다가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겠는가!

“…….”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아귀를 억세게 말아 쥐며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어디 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듯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턱 막힌 숨을 토해 내며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갈구했다.

“……그럼, 하는 수 없이.”

문 저편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타다다닥-

두려움에 함몰되던 순간.

등 뒤의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소리였다.

나는 몸을 돌렸다.

“흐읍-!”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경악에, 비명을 억누르며 다급히,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조차 순간 잊어버리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문짝에 몸을 바싹 붙였다.

아까 성의 바깥에서 보았던, 괴상한 형상을 띤 덩굴 무더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저 괴상한 생물 또한 이 문 너머에 있는 존재가 만들어 낸 것이 맞았어!

이런 젠장할,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타닥, 타닥-

덩굴 키메라는 그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시시각각 내게 가까워져 왔다.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저 또한 문짝에 바싹 다가와 있는 듯, 등 바로 뒤에서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쟤한테 잡혀가고 싶어? 그게 아니면 이 문 열어.”

……아,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어.

“열게, 열겠다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분통을 담아 외쳤다.

곧바로 문고리를 세게 잡아당겼다.

덜컥-

“어?”

그러나 정작, 문짝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안 열리는데?”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물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은 안 열려. 너, 황제한테 받은 펜던트 있지?”

그거야…… 있었다.

오늘 황제에게서 건네받은, 피닉스가 새겨진 펜던트.

“……있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얼음처럼 굳어 물었다.

“문을 자세히 보면 그 펜던트에 새겨진 피닉스와 똑같은 홈이 파여 있을 거야. 그곳에 펜던트를 대고 꾹 눌러.”

그러나 상대는 내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나는 마지막으로 망설였다.

황제가 건네준 펜던트, 그 펜던트로만 열 수 있는 문.

……그렇다면, 황제가 저것을 이곳에 가둬 둔 걸까?

그런 것을, 내 손으로 풀어 주게 되는 거라고? 이런 미친.

괴물인지, 악령인지.

정체 모를 저것이 황실에서 봉인시켜 놓은 위험한 존재라면…… 이 봉인을 풀어 주고 난 다음의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그 이후가 내게 존재하기는 할까?

“지금 고민하는 거야?”

우다다다닥-!

그 순간, 멈춰 있던 덩굴 키메라가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으아아아악!!”

망할 자식이, 나는 이를 악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에 펜던트를 가져다 댔다.

키이이이잉-

고막이 진동하며 기묘한 공명이 울려 퍼졌다.

형체 없는 불길이 펜던트 주위로 뿜어져 나왔다.

“윽-!”

훅 미치는 열기에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쿠구구구궁-

힘껏 밀고 있던 단단한 벽이 손에서 멀어져 갔다.

아, 결국 열렸구나…….

나는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차마 눈조차 뜨지 못했다.

순간 설움이 몰려왔다.

……할아버지랑 잘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주가 찾아와서는 지가 내 아버지란다.

페리온 망할 새끼는 따라갈 생각도 없는데 망발이나 지껄이고.

그놈들의 등쌀을 피해서 도망쳤더니 기어코 쫓아온 로베릭은 할아버지를 가지고 협박이나 하고.

할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로베릭을 향해 이 모든 치욕을 되돌려주겠다는 심정으로 대공녀가 되기로 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내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대공저로 와서 마주한 여주의 딸, 알레아라는 여자아이는 쎄하기 그지없고.

……최대한 안전하게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황제가 내민 손을 잡아 황궁에 들어섰는데, 이건 또 뭐야.

웬 이상한 존재한테 찍히기까지 하고.

모로 보나 황제가 직접 가두어 둔 게 분명한 존재를 내 손으로 풀어 주게 되다니.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온다.

내 기구한 인생은 결국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거야?

왜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 된 거지……?

“눈 떠.”

당장 차가운 얼음으로 만든 창에 몸을 찔리거나, 그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상상하던 순간이었다.

귓가로 들려온 너무도 여상한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꾹 감았던 눈꺼풀을 올렸다.

한낮의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던 소년이 다시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기묘하고 아름다운 소년은 고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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