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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6)화 (27/141)

<26화>

“우리 구면이지? 고마워, 네 덕분에 겨우 풀려났어.”

태연히 말을 자아내는 그 모습은 그저 살아 있는 인간처럼 보일 뿐이라서.

그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덩굴 키메라의 모습은 물에 씻어 낸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그 소년을 돌아보았다.

‘네 이름을 가르쳐 줘. 가르쳐 주면, 저 얼음을 모두 없애 줄게.’

다짜고짜 내 목을 조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요구를 해 왔던 기묘한 남자애.

[미안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아까부터 이 자리에 있던 이는 나와 이디스, 너뿐이었단다.]

한낮의 꿈처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대화까지 주고받았는데도 나이아드는 보지 못했다며 부정했던…….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당장 나를 해칠 생각은 없어 보여.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림을 누르고 물었다.

악령인가, 괴물인가.

……정말 뜬금없긴 한데, 드래곤일 가능성도 있을까?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며 간신히 물었건만.

“……이제까지는 황태자나 시종, 모지리를 이용해서 문을 열게 만들었는데. 황제가 작심하고 정령 소환을 금제하는 주술을 건 것으로도 모자라, 주인을 잃은 유물까지 사용해서 아주 단단히 나를 이곳에 감금시켜 놓았거든. 끼니도 하루에 한 차례밖에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거의 한 달 내내 이곳에만 처박혀 있었어.”

그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도통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년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응이 재미없네. 그럼 이건 어떨까. 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령 소환 못 했지?”

“……그야, 당연하지. 정령 소환 금지 주술이 걸렸는데.”

나는 신중히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를 이곳까지 이끈 것은 모두 내가 정령을 소환해서 벌인 일이었어.”

……뭐?

나는 아득해진 귓가를 두드리며 저 홀로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다, 아연히 외쳤다.

“그게 무슨…… 너 사람이었어? 아니, 그보다, 정령을 소환하다니. 황족이 아닌 그 누구도 정령을 소환할 수 없는데…….”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울리는 둔탁한 깨달음에 멍하니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달콤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는 황족이거든.”

……거짓말.

즐겁게 이야기하는 소년의 모습을 흔들리는 동공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어? 그럼 보여 줄까?”

그러자 그 소년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하다가, 불현듯 손아귀에 나타난 날카로운 얼음의 창으로 제 팔을 그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붉은 선혈이 얼음으로 뒤덮인 바닥에 점점이 꽃을 피웠다.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얼음의 창을 거두며 말했다.

“자, 이것 봐. 나는 너와 같은 피가 흐르고, 따듯한 살갗을 가진 인간이야.”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제발.”

이 남자아이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존재에 대한 설정은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인간일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라면.

“……자세히 봐야 확실하지 않나? 뭐, 네가 인정했다면.”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내고, 핏방울이 흘러내리는데도 고통의 기색 하나 없이 저토록 여상하게 그 상처를 남에게 내보일 수가…… 있나?

고작 열 살 남짓 되었을 어린아이가, 그러는 게 정말로 가능해?

“아무튼 오해도 풀렸으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그 소년의 팔에서 최대한 시선을 돌리며 나는 섬뜩한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앞으로 내가 부를 때, 언제든 이곳에 다시 와.”

그리고 다시 한번 저 말이 정말 내가 들은 게 맞는지, 이 상황이 정녕 현실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에 잠겼다.

“황제가 나를 감시해서 지금처럼 풀려나더라도 나는 이 성 외에 아무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없어. 당분간은 장난을 칠 기운도 없고. 하지만…… 여기에 계속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 그지없거든.”

그 소년은 로샨의 황제를 제 마음대로 칭하며 사납게 웃었다.

“그러니 네가 필요해. 내가 너를 부를 때, 오늘 네가 걸어온 곳과 같은 길을 열어 줄게. 그 길을 걸어 내게 와.”

나는 멍하니 소년의 말을 경청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의 말이 끝나고 물었다.

“싫어?”

그 순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아름다운 낯에 살의가 깃들었다.

시퍼런 눈동자를 푸르게 빛내며 그 소년이 물었다.

……싫다고 말하면, 방금 자신의 팔에 찔러 넣었던 얼음의 창으로 이번에는 내 목을 찌를 것만 같은 기세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당분간 정령을 소환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선 정말로 분하고 억울하게도 저 소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가 승낙하자 소년은 내비쳤던 살기를 말끔히 지웠다.

그리고 눈길을 허공에 돌리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 가.”

“……어?”

“빨리. 시간 없어.”

……지가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 뭐 하는 짓이야?

공포가 어느 정도 가시니 욕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 눌렀다.

“가라고. 들키기 싫으면.”

그 소년은 내 팔을 잡아당기고는 냅다 등을 세게 밀쳐 버렸다.

이 새끼가 진짜!

“망할 새…… 어?”

순간적으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돌렸는데.

방금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던 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장미 화원?”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아까의 정원에 되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 어느 순간에?

“아이고, 황태자 전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강하게 얼어붙었군요. 아무래도 불의 정령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멀리에서 황태자를 따라다니는 시종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온, 건가.”

아직도 내가 현실 속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멍하게 읊조리며 고개를 젖혔다.

밤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으며 만개한 장미는 검붉었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사라진 섬뜩하고 차가웠던 순간과 비하면 지극히 정상적으로 와닿았다.

* * *

대체 그놈은 정체가 뭘까.

황족이라면…… 딱 황태자와 2황자의 또래로 보이는 나이대였다.

그런 어린아이를 황제는 왜 그런 폐허 같은 성에 홀로 유폐시켜 둔 거지?

아니, 황족이라는 전제가 애초에 진실이 맞을까?

……아니야, 그 말이 거짓이라면 그 녀석이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황태자비의 기본적인 소양은…… 미래의 황후가 되는 막중한 의무를 지닌 자리이므로, 첫 번째는 황가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절개며 두 번째는 정숙함이라…….”

지겨운 황태자비 수업은 하등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하루 온종일 그 소년만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추측과 불안이, 안도와 대안이 새겨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 짜증 나.”

오늘은 황궁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하루인데.

뭣 같은 일 때문에 기분이 엉망이었다.

나는 머리를 헤집으며 두꺼운 책더미 위로 뺨을 올렸다.

차가운 책의 겉면이 달아오른 얼굴의 열을 조금이나마 식혀 주는 듯했다.

그놈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정령을 소환할 수도 없고.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약혼 취소하고 황궁 탈출이나 할까?

“으으으으…….”

안 돼. 로베릭한테 온갖 소리를 다 늘어놓고 이 망할 펜던트까지 건네받았는데 어떻게 벌써 약혼을 철회해!

나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황태자랑 약혼 안 하는 건데.

처음으로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후회가 죽도록 일었다.

그냥 지금이라도 황제를 찾아가, 어젯밤에 내가 겪은 기묘한 이야기를 고백할까.

그렇게 수도 없이 망설였지만…….

자신이 직접 폐궁전에 가둬 둔, 황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존재를 내가 대면한 것도 모자라 봉인까지 풀어 버린 일을 전해 들은 황제가 상상 이상으로 진노할까 봐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겠다.

“이디스 대공녀님, 예법 실습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그런 내 곁으로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다음 수업 과목을 알렸다.

나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바로 그날 밤, 그 소년은 나를 다시금 불러들였다.

“…….”

이번에 그 녀석이 길을 만들어 낸 방법은 내가 머무는 방의 벽면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것이었다.

……이 자식, 진짜로 정체가 뭐지?

이런 식으로 공간에 균열을 내는 게 가능한 정령도 있었나?

“뭐가 되었든…….”

거부할 수 없을까.

내가 왜 저를 만나러 가야 한단 말인가?

황제가 가둬 둔, 황족인지 뭔지 모를 존재와 엮이게 된 것도 불안하기 그지없는데 여기서 더 말려든다면…….

“……아, 씨.”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고민해 봤자 별다른 대안이 나오지도 않는다.

최대한 맞춰 주는 연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황태자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뒤, 황제에게 그동안의 진실을 알리자.

그때의 나는 황태자의 정식 약혼녀이자 공인받은 헤일리안 대공녀이니 내가 자신이 가둬 둔 존재와 대면했다는 사실에 황제가 아무리 진노하더라도 별다른 징벌은 내리지 못할 것이다.

“우선은 견뎌야 해.”

다시 돌아오면 정령의 종류를 적어 놓은 서적을 싹 다 긁어모아 독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길에 억지로 발을 들였다.

검은 웜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제와 같았다.

장미 덩굴이 휘감겨, 붉은 장미가 눈 돌리는 모든 곳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어딘지 섬뜩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아치형의 통로.

“……또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어제의 덩굴 키메라가 또 튀어나올까 싶어 사방을 경계했지만 다행히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성은 여전히 황폐했다.

“……얘는 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걸까?”

다시금 드는 의문을 삼키며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유령도 무섭다며 안 살 것 같은 성의 홀에 발을 들였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거짓말인 것마냥 그 소년이 있던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닫고 나간 기억이 없으니 아무래도 그가 직접 닫았을 것이다.

……황제에게 들킬 생각은 없단 뜻인가.

아, 불안해. 내가 어쩌다 이런 놈과 엮이게 된 거지?

나는 조심히 손을 들어 문짝을 통통 두드렸다.

“들어와.”

저편에서 평온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어제처럼 문짝에 파인 홈에 펜던트를 끼워 넣었다.

여전히 듣기에는 어딘가 거북스러운 공명이 울렸다.

뜨거운 열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살며시 뜨니.

“왔어?”

“……?”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바닥에 편하게 드러누운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자가 편하다고 해야 하나?

어이가 없이 그를 내려다보자 소년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제 옆에 앉으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소년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별로 안 추워. 옆에 누워 봐.”

“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 녀석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바닥에 풀썩 누워 버린 나는 곧바로 반발하려 했지만.

“이렇게 누워 있으면, 꼭 바깥의 하늘을 보는 것 같거든.”

그 순간 가만히 읊조려지는, 이상하리만치 천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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