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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7)화 (28/141)

<27화>

“너도 봐 봐.”

나는 그 소년을 보기 위해 옆으로 돌렸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을 두 눈에 담고서 놀라움에 휩싸였다.

소년의 말처럼 얼어붙은 방의 천장에는 바깥의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고…… 광막함마저 느껴질 만큼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와…….”

나는 무심코 탄성을 흘려보냈다.

내 옆에 나란히 누운 소년도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겪어 볼 수 있으리라고는 차마 예상치 못했던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이 잠시간 흘렀다.

“……어렸을 때 들어 본 적이 있어.”

침묵을 살며시 비집고 잠잠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 전, 황실의 화가였던 아드네 카리엘 헤일리안 대공녀가 이 성의 벽화를 담당했다고 해.”

“……헤일리안?”

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되물었다.

헤일리안이라면, 로베릭의 가문이자 내 성이잖아?

내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나를 돌아본 듯한 그 소년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족 영애가 화가였다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하지만 그 여자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당대 황제의 연인이었거든.”

“아.”

“어차피 미래의 황후가 될 운명이었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 둔 것이겠지.”

의외로 흥미진진했다.

“나중에 아드네 대공녀는 황후가 되었어. 그리고 이 성은 그녀가 낳은 황태자의 궁이 되었다고 해.”

나는 소년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내 조상이 그렸다는 벽화를 다시금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황태자는 제 능력 하나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반편이였고, 결국 여기서 폭주를 일으키고 말았지.”

……이 급전개는 뭐지?

묘한 감상에 잠기던 것도 잠시, 점차 이상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소년은 나와는 달리 이제 재미있어진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피닉스의 축복을 받은 황태자는 그 강대하다는 불의 힘으로 온 성을 태워 버렸어. 태우고 또 태우다, 결국 자기 자신마저 새카만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지. 뒤늦게 이 성에 달려온 아드네 황후는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남은 불꽃 속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했대.”

“…….”

너무나 심각해진 내용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 끝에 여러 황족이 거처로 사용했지만, 하나같이 좋지 않은 변고가 일어났던 터라 끝내 이 성은 버려졌고…… 수백 년이 지난 어느 해, 이번에는 내 무덤으로 정해졌지.”

소년은 생글거리는 미소 띤 낯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성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기에 내막을 설명해 보았는데. 어때? 이제 더 싫어졌지?”

……잠시 누그러졌던 마음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이게, 정말로 재밌나?

도대체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얘는?

은은한 혐오를 담은 내 눈빛을 마주하며 소년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재밌네. ……역시 실제로 앞에 두는 게 훨씬 나아.”

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불쑥, 내 앞으로 그의 손이 다가왔다.

“일어나.”

눈빛으로 묻자 소년이 답했다.

“여기 있으니 또 심심해지려고 해. 이번엔 성을 둘러보자.”

……뭐?!

나는 기겁하며 상체를 일으키고 외쳤다.

“그런 참사가 일어났던 성을 둘러보자고? ……너, 진짜 제정신 맞아?”

“응, 아마 아닐 거야. 어서 일어나.”

너 미쳤니? 라는 소리를 에둘러 표현했건만, 그 애는 태연히 수긍하며 마치 조르듯이 내 손을 살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그 면상에 주먹을 꽂아 주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부터 돌아보자.”

“하…….”

이게 뭐 하는 거지.

그날 나는 그 소년의 손에 이끌려 천장의 밤하늘뿐만 아니라 버려진 성 곳곳에 남은 벽화들을 둘러보아야 했다.

* * *

“……오랜만이야. 이디스 대공녀.”

지난번, 차마 좋게는 표현할 수 없는 불상사를 겪고 난 뒤 황태자는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는 듯했다.

그러다 오늘이 되어서야 황태자는 내가 머무는 별궁을 찾아와 쭈뼛쭈뼛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다시 뵈어 기쁘기 그지없어요, 전하.”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미안해. 정말로.”

순진한 소년은 내 말이 정녕 진심이라고 믿은 것인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토로하듯 이야기했다.

“지난번에 대공녀의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게 마음에 걸려서 시간이 조금 필요했어.”

“아니에요, 전하. 그날의 일은 전하께서 실수하신 것도 아니었는걸요.”

다 그…… 사람은 맞는 것 같지만 아직도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이상한 남자애가 벌인 일에 안타깝게도 휘말린 것뿐이었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홀로 유폐되듯 갇혀 있던 그 남자애.

이전에도 수차례나 황태자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황족이거든.’

황족이라는 말도 사실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자신의 혈육을 죽이려고 했던 거야?

“후원에서 다과를 함께하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자.”

“네, 전하.”

다시금 섬뜩한 충격에 사로잡혔지만 그 생각에 깊이 빠져들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황태자의 곁을 따르며 차갑고 황량했던 성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수수께끼처럼 와닿는 소년에 대한 기억을 덮어 두었다.

“대공녀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네.”

“성도로 오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반짝이는 생기를 띤 녹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입술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모가 전 바스테반 공작 영애였다고 했지?”

“……네, 전하.”

순간 동요할 뻔했다.

나는 찻잔을 꾹 쥐며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사실…… 나는 그때 일어났던 일을 잘 알지는 못해. 아버님께선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거든.”

황제도 나름 껄끄럽긴 했나 보다. 아들에게 그때의 일에 대한 언급을 금할 정도였다니.

“하지만 스승님들께 조르고 졸라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게 있는데…….”

황태자는 주위의 시선을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의 축복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녀 자체로도 정말 뛰어난 수재였다고 해. 저명한 학자들조차 그녀의 학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획기적인 논문을 여럿 발표하여 리테라에서 그 이름을 높이 알렸다고.”

다시 한번 리테라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동안 리테라라는 곳이 대체 뭐 하는 데인지 궁금하여 서적을 찾아보았고, 그 끝에 얻은 정보에 따르면 리테라는 대륙의 정령사 학회라는 곳인 모양이었다.

정령사라면 누구나 꿈에 그린다는 지혜의 성역.

그곳에 간다면, 어머니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을까?

“……그러셨군요. 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알지 못해요.”

“그만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정령사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 걸까……?”

마리에트에 대한 이야기를 읊는 황태자는 정말로 바스테반 공녀와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헤일리안 대공 부부에 얽힌 과거사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듯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으로만 가득 차 보였다.

“……나도 리테라에는 꼭 가 보고 싶은데.”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한바탕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천천히 가라앉은 기색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황태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불의 정령왕님의 축복을 받으신 정령사이신데, 리테라에 가실 수 있지 않으신가요?”

“!”

2급 이상의 정령사라면 그 누구든 간에 리테라에 출입할 권한을 인정받는다.

게다가 황태자는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1급은 충분히 될 텐데…….

아직 정식으로 정령사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 고귀한 신분을 내세우면 가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

황태자는 보는 이가 다 눈치챌 만큼 뻣뻣하게 굳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라?

나는 의아하여 황태자의 안색을 살폈다.

로샨 제국은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축복 아래 건국되어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굳건히 번영하고 있는 대 제국이었다.

모든 대의 황제들과 황족들은 주 속성으로 불의 정령왕의 축복을 타고나거나, 정령왕은 아니더라도 불의 권속에 놓인 정령의 축복을 하나씩은 지녔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현 황제도 피닉스의 축복을 받았고,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발레리안 황태자 또한 아버지를 닮아 피닉스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라고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그러고 보니 황족인 황태자는 금제와는 상관없이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텐데.

여태 단 한 번도 황태자가 정령을 부르거나 불의 권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딘지 기이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내가 황태자와 함께 있었던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그렇다고 치기에는…….

“……리, 리테라는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집단이야. 아버님께서도 리테라를 싫어하시고. 로샨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가지 않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테라에 꼭 가 보고 싶다며 진심으로 이야기하던 황태자는 갑작스레 주장을 바꾸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태도는 분명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

돌아가고 나면, 그동안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가 공식적으로 정령의 권능을 보인 기록이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다.

나는 의문을 차곡히 개어두고 표정을 감추었다.

이상스레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이었다.

“……!”

황태자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리는 행동에 시선이 쏠렸는데.

“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귀청을 찔러 왔다.

“손, 손이!”

황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제 손을 마구 흔들어 재끼는 것이 아닌가?

왜 저러는 거지?

덩달아 놀라 황태자가 마구 흔드는 그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자, 맙소사.

찻잔의 손잡이와 황태자의 손이 하나로 딱 얼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세상에, 전하의 손이!”

황태자는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질러대며 허공에 대고 제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단단히 얼어붙은 시퍼런 얼음은 균열 하나 일지 않았고, 황태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급히 달려온 시종들에게 이것 좀 어떻게 해 보라며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했다.

“…….”

등줄기를 스치는 이 섬뜩한 기시감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그 녀석이다.

황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정령 소환이 금지된 이 황궁에서 얼음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다룰 존재란 버려진 성에 홀로 유폐되어 있던 그 정체 모를 소년밖에 없었다.

“……안 되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힘이 필요하겠어요.”

“흐읍, 으으윽…….”

“전하, 괜찮아질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불의 권능으로 녹여 주시면 모두 해결될 거예요.”

하지만 그 버려진 성과 내가 머무는 별궁은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그 소년이 스스로 봉인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면 나를 그곳까지 끌어들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지금 도망쳐 나오는 데 성공했을 리는 없다.

그래도 혹여나 싶어 관목에 에워싸인 주위를 둘러보며 그 아이가 여기에 와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예의 검은 머리카락일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령을 소환해서 벌인 일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직접 정령의 권능을 끌어내 이 상황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먼 원거리에서, 정령의 권능을 저토록 작은 범위로 세심하게 구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권능을 이끌어 내는 일은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본 적도 없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맞다면, 나와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권능 조작 능력을 벌써 갖출 수가 있는 거지?

“대공녀님, 보시다시피 황태자 전하의 상황이 급박한지라 자리를 파해야 될 듯싶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괜찮으니 어서 가 봐.”

“송구합니다, 그럼.”

황태자는 극도로 겁에 질린 나머지 내게 인사를 건넬 정신도 없어 보였고 황태자의 시종장이 대신하여 내게 양해를 구한 뒤 바삐 자리를 떠났다.

“……진짜, 알 수가 없네.”

명백한 인간이고 황족이다.

이토록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직접 정령의 권능을 조절하여 구사할 만큼 뛰어난 정령사의 자질도 갖추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버려진 성에 홀로 유폐되어 있는 것인가.

“황태자는…….”

내 의심이 맞다면…….

정령의 축복을 타고나지 못하였거나, 만약 타고났다고 해도 한미하기 그지없는 능력을 지닌 것에 불과함이 유력한데.

“오히려…….”

그렇다면, 오히려 그 소년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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