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29)화 (30/141)

<29화>

-外.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

“…….”

그 소녀는 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이때까지와는 달리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자박자박 다가와 바닥에 풀썩 주저앉더니, 돌연 에시메드의 옷깃을 풀어헤쳤다.

“뭐 하는 거야.”

에시메드는 가녀리다 못해 앙증맞은 손을 붙들었다.

탁-

소녀는 에시메드의 손을 보란 듯이 쳐낸 뒤 자신이 하던 행동을 마저 이어 했다.

“읏…….”

아직 다 아물지 않아 피가 맺힌 상처에 쓰라림이 느껴졌다.

에시메드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잇새를 악물었다.

자그마한 손은 한동안 에시메드의 몸에 난 상처에 연고로 보이는 것을 묵묵히 발랐다.

“일리피아를 소환하면 단번에 나을 테지만, 지금은 정령 소환을 못 하니까. 연고라도 발라 줄게.”

불쑥 말을 꺼낸 소녀는 조용히 연고를 바르는 일을 끝마쳤다.

에시메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소녀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조심히 에시메드와 눈을 마주했다.

“……어떻게 된 거야?”

소녀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왜 유폐를 당하는 걸로도 모자라…… 학대까지 받는 거냐고.”

그리고 제 눈가를 붉히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꼭 저가 겪는 일인 것마냥.

“네 이름은 무엇이고, 본래의 신분은 대체 뭐야?”

에시메드는 멍하게 그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 내 신분.

‘-황자 전하!’

“내 이름은…….”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아주 어린 시절이 지나간 뒤,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본래의 신분으로 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에시메드는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을 넘어 이유 모를 벅참을 끌어안은 채.

“에시메드.”

눈앞의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

그 홀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이름을 읊었다.

“로샨 제국의 2황자이자…… 현 황제의 아들.”

황제가 파묻었던 진실을 마주한 순간.

강렬한 생명을 머금고 영롱히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 * *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

세상에게서 잊혀진 채 유폐된 소년은 본래 로샨 제국의 2황자로 태어난 아이였다.

‘황후 폐하, 안 됩니다! 제발 정신을…….’

‘아이…… 내 아이는…….’

1황자 발레리안을 출산한 직후 바로 둘째 아이를 임신한 황후의 생명은 위태로웠다.

산통이 찾아온 당일, 그녀는 결국 모두가 우려하던 위기를 맞이했다.

‘복중 아기님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디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어서 대답해라!’

‘소신 또한 믿기 어려우나…… 매우 강한 한기가 느껴집니다. 이 정도의 강력한 기운이라면 분명 주 속성일진데, 그렇다는 말은…….’

로샨 제국은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축복을 받아 건국된 나라였다.

설사 피닉스의 축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휘하 불의 정령의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떤 황족도 주 속성의 자리에 불이 아닌 다른 속성의 정령을 앉힌 전례가 없었다.

그러나 에시메드는 달랐다.

에시메드는 생모의 몸을 얼려 버릴 만큼 짙은 한기를 세상에 흩뿌리며 태어난 것이다.

‘이 같은 경우가 흔치 않지만 태어나는 즉시 주 속성이 발현되는 경우일 겁니다. 또한 심상치 않은 한기로 어림잡아 추측했을 때…….’

‘……빙황 프린셔인가.’

황제는 그 변이를 심각한 사안으로서 받아들였다.

황제의 의중을 깨달은 모두가 황후를 만류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출산을 감행했다.

황후는 산 채로 몸이 얼어 가면서도 끝끝내 아이를 낳았다.

그 대가로 영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오스발트, 부탁할게.’

‘아니야, 엘리야. 제발 말하지 마…….’

아직 젖도 채 떼지 못한 첫아들과 꼭 닮은 따스한 녹안의 빛이 점차 꺼져갔다.

황후는 희미하게 웃으며 부군을 향해 유언을 남겼다.

‘부디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해 줘. 어미가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안 돼, 엘리야, 엘리야!’

황후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황제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수많은 생사를 함께한 전우였던 황후의 죽음에 사무치게 절망했다.

‘……걱정하지 마. 엘리야. 네 유언은 반드시 지킬 테니.’

그에게는 황후가 남기고 간 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그러니 견뎌내야만 했다.

오스발트는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여인의 간원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결심했다.

‘네 이름은…… 에시메드가 좋겠구나.’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앗아 간 둘째 아들에게 아내의 이름에서 첫 글자를 따온 이름을 지어 주었다.

불의 정령왕이 축복한 황실에, 얼음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돌연변이.

그럼에도 그와 황후의 피를 이은 자식이었다.

황제는 최선을 다하여 에시메드를 돌보았다.

‘대체…….’

하지만 에시메드는 평범한 아이와는 너무도 달랐다.

‘아이를 어떻게 돌보았기에, 말 한마디, 웃음 한번, 울음 한번 터뜨리지 않아!’

에시메드는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아이였다.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한창 말을 종알거릴 시기였음에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아이의 주위에는 오한에 몸을 떨 정도의 냉기와 하얀 성에가 사라지는 날이 없었고.

유모와 시녀, 기사를 몇 번이나 갈아 치워도 에시메드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황제는 서서히 에시메드를 꺼림칙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그 텅 빈 시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황자는 발육이 정상적이지 못하니,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겠다.’

황제는 에시메드를 철저히 황궁 안에서만 기르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에시메드를 정상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이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

그와 정반대로 첫아들 발레리안은 날이 갈수록 말이 늘어갔고,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애교를 부리는…….

그야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였다.

황제는 아내를 죽이고 돌연변이 같은 주 속성을 지닌 채 태어난 둘째 아들보다는 아내를 꼭 닮은 첫째 아들에게 자연히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점점 에시메드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때, 그 해가 밝았다.

에시메드가 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 * *

로샨 제국의 황족은 네 살이 되는 해 속성 검사를 받는다.

황족만이 들어설 수 있는 신전의 성소, 불의 정령왕 피닉스가 시황제 아르얀로드에게 내려준 보물의 권능을 이용하여 타고난 축복을 확인하는 것이다.

보통의 정령사들이 8세에서 12세 사이에 속성을 발현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보다 이르게 타고난 축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로, 이는 오직 로샨 제국의 황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이었다.

그들이 머지않은 때 자연적으로 발현하게 될 속성의 검사를 이토록 서둘러 진행하는 이유는 일찍이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축복을 받은 황족을 가려내어 후계자로 내정하기 위해서였다.

‘1황자께서 피닉스 님의 축복을 받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럴 수는 없다. 어찌하여 내 아들이…….’

그러나 그 명목은 이제 관례로만 남게 된 지 오래였다.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아르얀로드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가며 피닉스에게서 받은 축복의 세가 약해져, 아예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경우가 빈번해져 가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 진실이 세상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기밀로 숨겼지만 이제 피닉스의 축복을 받은 황족은 감지덕지.

불의 중위, 하위 정령의 축복만이라도 받았다면 가리지 않고 황태자로 봉할 지경이었다.

오스발트의 아버지, 선황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불의 하위 정령 살라만더의 축복을 지니고 태어난 그는 몇 대만에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제 아들을 향한 열등감에 미쳐 날뛰다 못해 자식을 학대했으며.

열등감과 질투는 끝내 광기로 전락하여, 건국 이후부터 루에이리 황가에 충성하던 헤일리안 대공까지 가당치도 않은 역모죄를 물어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내 아들이,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한 범인에 불과하다니!’

1황자의 속성 검사 결과에 황제는 절망했다.

어린 시절의 지옥 같았던 기억이 다시금 범람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자식이 평생 동안…… 미치광이 선황과 같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로샨 제국의 황위를 아무런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1황자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후가 죽고 난 뒤 황궁의 내정을 도맡을 이가 필요해 들인 황비가 3황자를 낳긴 하였으나, 그 아이는 엘리야의 자식이 아니었다.

오스발트의 지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는 반드시 엘리야의 자식이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황제는 에시메드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았다.

주 속성이 돌연변이라도 상관없다.

어찌 되었든 강대한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제발, 부속성 중 하나만이라도 불의 정령이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랜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폐하!’

그러나 에시메드가 네 살이 되던 해, 속성 검사의 끝에 밝혀진 에시메드의 속성은.

‘2황자 전하의 속성이…….’

주 속성,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첫 번째 부속성, 공포의 정령 휠카셀.

두 번째 부속성, 증오의 정령 트레가드.

‘어둠의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니!’

황제는 충격에 사로잡혀 울부짖었다.

얼음의 정령왕까지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그 아래의 두 정령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어둠의 정령왕이 누구던가.

아르카네.

이 우주의 모든 어둠과 악을 그러모아 형상화한 것처럼, 더없이 잔악하고 흉포하기 그지없는 존재.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비롯한 모든 부정적인 존재 의의에서 탄생한 아르카네의 권속, 어둠의 정령들은 진실로 불길하여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이 내리는 축복은 사실상 ‘저주’였고, 그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어둠 속성의 정령사는 어떤 천성을 지녔든 간에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처럼 타락하거나, 광기에 함몰되어 종래에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고야 말았으니.

그리하여 어둠 속성의 정령사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변치 않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축복으로 인해 평생을 배척당하고 혐오 받아 온 그 기나긴 탄압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점차 미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수십여 년 전.

어둠 속성의 정령사들은 아르카네를 숭배하던 신도들과 합심하여 대륙 전체에서 들고일어나 무차별한 전쟁과 대학살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자연계 정령왕들께서 대정령사들을 세상에 내려 주시어 그 끔찍했던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그러니 우리 동맹국들은 맹세합시다.’

길고 길었던 재앙이 끝난 이후, 니샤 왕국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나라의 군주가 모여 맹세했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와, 그 휘하 어둠 속성 정령의 축복을 타고난 정령사는 발견하는 즉시 사형에 처할 것을.

‘저건, 저건 내 자식이 아니다, 아르카네가 보낸 로샨을 향한 조롱일 뿐이다! 당장 내 앞에서 저것을 치워 버려라!’

공포의 정령 휠카셀, 증오의 정령 트레가드는 부정할 수 없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권속이었다.

정체가 들통나는 즉시 사살당하는 것이 원칙인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그의 아들이자 로샨 제국의 2황자였다.

……또한, 사랑하는 황후가 저따위 것을 낳기 위해 죽었다.

황제는 그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다, 지금 당장 내 손으로……!’

그는 에시메드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에시메드의 숨을 끊어 버릴 것처럼 분노하였으나.

‘부디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해 줘. 어미가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그러다가도, 사랑하는 황후가 남긴 유언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황후가, 엘리야가 저 아이를 낳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런 아이를,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저것은 더 이상 2황자가 아니다.’

어둠 속성을 타고난 정령사들은 그 천성이 어찌하든 간에 끝내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한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왔고, 황제는 에시메드를 더 이상 황자의 자리에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동맹국들과 한 맹세대로 죽일 수도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폐하, 이미 제국의 백성들은 세 분의 황자 전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상관없다. 2황자는 죽었다고 알릴 것이다. 그리고 당장 황적에서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의 이름을 지워라.’

황제는 에시메드가 요절했다고 선언했다.

또한 에시메드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내기 위해 본래 3황자였던 황비의 아들 헨델 하날 루에이리를 2황자로 봉했다.

‘마지막 남은 일말의 온정으로, 네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모든 뒤처리를 끝낸 뒤.

황제는 에시메드를 황궁의 버려진 별궁에 유폐시키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숨죽이고 살아라. 네 존재 자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 너는 앞으로 평생 동안 이 바깥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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