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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1)화 (32/141)

<31화>

오늘의 일은 그가 행한 것이었다.

분명 저 여자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저 아이가 황태자 궁의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같잖게 지켜보지 않았던가.

“대공 각하, 이디스 대공녀의 남은 한 가지 속성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대공의 가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의 친딸을 음해하려는 시도를 가감 없이 저질렀다.

에시메드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런 확실한 증거도 없이, 대공이 사랑하는 딸을 범인으로 몰아가다니?

그래, 그건 저자가 이상한 것이다.

에시메드는 고개를 돌려 대공저의 사용인들을 돌아보았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 싸고도는 여자아이니, 다른 자들이 당장 저 가신의 말을 비난할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

사용인들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대공비는 제 딸을 끌어안으며 어린 여자애를 경계했고, 사용인들의 반응은…….

마치 저 여자애가 그랬을 줄 알았다는 기색이었다.

에시메드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걷잡을 새 없이 차갑게 식어 가는 주위의 시선이 더없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 사랑하는 친딸이잖아?

왜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비록 이전에도 비슷한 변고가 여럿 존재하긴 하였으나 하필이면 이디스 대공녀께서 자리를 비우신 때 이러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알레아 대공녀님께서 상처를 입으셨지요.”

헤일리안 대공의 가신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서 일렁이는 증오와 악의가 즐겁게 춤을 추는 형상이 에시메드의 시야에 선연히 들어왔다.

“대공 각하의 피를 유일하게 물려받으신 이디스 대공녀께선 당연히 세 속성 모두 정령왕의 축복을 받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한 속성이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라는 가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지요.”

에시메드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는, 아직 저 아이에게 아무런 저주도 걸지 않았는데.

“또한 대공녀께서 이미 발현된 속성을 숨기셨다면 저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여자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 아이를 혐오하듯 노려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경멸했다.

“이디스 대공녀의 생모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으셨습니까? 대공비님과 갓 걸음마를 뗐던 알레아 대공녀님을 죽이려 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아직 어리다 한들 그러한 본성을 물려받지 않았을 리 있겠습니까!!”

대공이 뒤늦게 나서 딸을 옹호했으나 가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심장이 아렸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에시메드는 가만히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도 꾹 입술을 다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너는,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지?

에시메드는 멍하게 질문했다.

왜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가만히 받아들이는 거야?

“…….”

그러나 에시메드의 생각은 틀렸다.

고개를 떨군 여자아이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손은 꽉 말아 쥔 채였다.

그 광경을 목도하자, 에시메드는 다시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에시메드는 더 이상 그 아이를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렸다.

이건 네가 한 잘못이 아니잖아.

……다, 내가 한 짓이었는데.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분명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일 거라 여겼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환한 빛 아래 황제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친형제처럼.

증오와 멸시라고는 모르고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린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고도 푸른 빛을 발하던 에시메드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저 아이는, 저 작은 소녀는 자신이 저주하지 않아도…….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왜 태어난 것이지? 아르카네가 황가를 무너뜨리라고 명이라도 내렸나?!’

‘……너, 너는 죽은 존재라고 하셨어, 아버님께서. 그러니까, 자꾸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빠, 빨리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미 충분히 미움받고 있었다.

꼭, 그 자신처럼.

“……돌아가자, 트레가드.”

심장이 콕콕 찔리며 생경한 아픔을 호소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의 언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에시메드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은 분명 증오였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환하고 행복한 세상에 속한 존재를 내가 있는 진창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시메드는 입술을 꾹 깨물며 뒤돌아섰다.

[저주, 안 걸어?]

트레가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에시메드는 작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미움이 쏟아지는 한가운데에서.

“……안 걸어.”

에시메드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눈의 조각 같은 결정이 천장으로 흩어져 빠르게 녹아내렸다.

톡.

그중 하나의 작은 눈송이가 이디스의 코끝에 내려앉았다.

이디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에시메드가 사라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 *

갑작스럽게 연결을 끊어 버리고 난 뒤.

에시메드는 그의 황량한 방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초조하게 손끝을 두드리다, 입술을 매만졌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에시메드는 그 소녀에게 저주를 걸고 싶지 않았다.

“…….”

나와 그 아이는 어쩌면, 비슷할지도 몰라.

……아니야, 그 아이는 적어도 온전한 제 편인 친부가 있지 않나.

그러니 원래 하려던 마음대로 저주할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한순간 심장을 두드리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에시메드는 본인의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간 순간을 곱씹었다.

오직 증오만이 존재하던 마음속에 피어난 동질감이라는 이름의 낯선 감정을, 소년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 * *

대가는 지독하게 돌아왔다.

“……그냥 정령 소환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건 어때? 오스발트.”

제 딸이 사고에 휘말려 다칠 뻔했던 일 이후로 로베릭은 이전의 애매한 태도를 버리고 에시메드를 향해 확연한 적의를 내비치며 오스발트에게 먼저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정령사에게 직접 정령 소환을 금제하는 주술을 거는 것은 그 영혼에 흐르는 마나를 강제로 틀어막는 것으로, 자칫하면 쇼크가 올라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봉인을 더 단단히 걸어 놓으면 되겠지.”

“오스발트.”

“이번의 일은 진심으로 사죄한다, 로베릭. 하지만 나는 엘리야의 피를 물려받은 저것을 차마 죽일 수는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긋지긋한 삶을 이어 주는 것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미의 간청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황제의 모순됨에 더없이 분노하며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 터였으나, 이번만은 처음으로.

에시메드는 자신의 목숨을 더 연명시켜 놓기로 한 황제의 결정이 기꺼웠다.

……어째서?

“……아파.”

트레가드의 권능을 사용한 이후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한 터라 기력은 회복될 길이 요원했다.

에시메드는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멍하니 생각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딸.

저주하기로 지목했던 대상이었으나 뜻 모를 동요에 하지 못했던 존재.

“트레가드.”

[왜?]

곁에 머무르던 트레가드는 제가 축복한 소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시메드는 다른 이들이 보면 대번에 끔찍하다고 여길, 검고 추악한 것만 가득 모아 탄생시킨 것만 같은 생명체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헤일리안 대공저로 가고 싶어.”

[……안돼. 아직 기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

“괜찮아.”

설사 죽는다 해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 * *

“닉스! 그거 내려놔!”

[꺄하하하! 나 잡아 봐라, 이디스!]

[이 녀석, 당장 이디스 님의 책을 내려놓지 못해?! 이리 와!]

에시메드는 이디스가 물의 정령들과 노니는 모습을 대공저의 후원 한구석에 앉아 지켜보았다.

궁금했다. 그날 이후로,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 감정의 이름은 정확히 무엇인지.

……왜 계속해서 저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그 답은 저 소녀가 내려 줄 것이라 생각한 에시메드는 기력이 한계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디스를 찾아갔다.

“아! 그런데 있잖아, 닉스.”

[응?]

“……나 대신 복수 안 해 줘도 돼.”

그윽한 꽃향기를 머금은 듯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 소녀.

이디스가 말했다.

“나한테 좀…… 껄끄럽게 대했던 사용인들, 계속 물 가까이 갈 때마다 얼굴에 물 싸대기 맞는다는 이상한 괴담이 돌고 있어. 그거 다 닉스, 너희들이 한 거지?”

순한 눈망울로 말갛게 미소 지으며 어린 정령에게 말을 건넸다.

어린 물의 정령은 고개를 푹 숙이며 시무룩하게 답했다.

[……응. 그야, 그놈들은 나쁜 인간들이니까.]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나 대신 복수해 주지 않아도 돼.”

“어째서?”

그 소녀가 듣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에시메드는 무심코 내뱉었다.

에시메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텐데도 이디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증오는 사람을 아프게 만들어. 그건 정령도 마찬가지겠지. 나도 나쁜 놈들은 혼쭐이 나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삶을 던져두면서까지 신경 써 복수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들인걸. 그런 식으로 일일이 복수해 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잠잠한 목소리가 읊조렸다.

“복수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행복.

에시메드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 가져 보았는지 모를 아득한 이름이었다.

“궁극적으로 나는 복수를 할 예정이지만, 최대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 거야. 사용인들이 조금 건방지게 굴었다 해도 내가 별다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니 중요치 않아. 그러니까 됐어. 이제 충분해.”

소녀는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웃었다.

“이제 그놈들 나한테 함부로 못 대하거든! 난 정말로 대단한 천재 정령사니까!”

……에시메드는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모순투성이에,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건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웠다.

에시메드는 다시 정령들과 조잘거리기 시작한 소녀를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받은 것은, 그 몇 배에 달하는 혹독함으로 되갚는다.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뇌리를 잠식해 온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 소리였건만.

발작적인 거부감보다는 묘한 감정이 맴돌았다.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며,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느끼기 시작한 감정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고.

그저 그 소녀가 보고 싶어 자신이 계속해서 헤일리안 대공저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에시메드는 더 이상 그 모순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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