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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2)화 (33/141)

<32화>

* * *

쾅-!

에시메드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커다랗게 굳은 얼음을 파훼했다.

차가운 얼음 조각이 별처럼 휘날렸다.

공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결국 또다시 빙결이 일어나 얼음은 계속해서 늘어날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정해졌대.’

‘누구로?’

‘이디스 대공녀라던데? 왜,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재능을 물려받아 대단한 정령사라잖아. 황실 혈통을 다시 재정비하려는 모양이시지.’

‘아…… 너도 그 소문 들었구나. 황태자 전하께서 실은 피닉스 님의 축복을 받으신 게 아니라 엄청 한미한 정령의 축복을 받은 나머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단 한 번도 정령 소환을 하신 적이 없다는 소문.’

‘어쩌면 한미한 정령의 축복조차 받지 못하셨을지도…… 모르지.’

에시메드는 분노에 차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황태자와 이디스의 약혼을 결정했다. 그리고 헤일리안 대공은 이를 승낙했다.

그 소식을 접한 순간 에시메드는 영문 모를 분노를 느꼈다.

숨이 막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할 만큼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여멀건한 얼굴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자신이 앞에 나타날 때마다 겁에 질려 질질 짜기만 하던 무능하고 무력한 발레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복수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궁극적으로 나는 복수를 할 예정이지만, 최대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 거야. 사용인들이 조금 건방지게 굴었다 해도 내가 별다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니 중요치 않아. 그러니까 됐어. 이제 충분해.’

뒤이어 꽃처럼 무구하게 웃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를 못 하겠지만.

화가 나서 못 견딜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발레리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황제의 계획을 파탄 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모습, 드러낼까.”

에시메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늘 사용하던 방법은 있었다.

“……휠카셀.”

자신이 어찌하여 이러는지 이유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소년은 충동에 사로잡혀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 * *

휠카셀의 힘은 인지를 공포로 왜곡시키는 것.

즉, 실체 없는 환각이었다.

에시메드가 유폐된 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시야에 비치는 환각과는 판이하게 다른, 조금 비좁고 외진 길이었지만 휠카셀의 권능에 사로잡힌 이디스는 공포에 사로잡혀 에시메드가 유도하는 대로 착실히 걸어왔다.

그러던 중간, 약간의 장난기가 샘솟아 인간 형상을 띤 덩굴의 환각을 보여 주었더니.

“-으아아악!”

“풉.”

처절한 비명이 돌아왔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에시메드는 자꾸 웃음이 나와 죽을 것 같았다.

“차가워.”

그리고, 마침내 이디스가 코앞에 당도했다.

……얼마 만에 실체로서 다시 마주하는 것인지.

에시메드는 문을 등진 채, 왠지 모를 벅차오름에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문, 열어 줄래?”

목소리가 돌아오리란 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듯 정적이 흘렀고.

다급히 뒤로 물러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네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거지?”

의심과 경계에 가득 찬 목소리가 물음을 던졌다.

에시메드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내가 너를 불렀어.”

색색, 떨리는 숨소리만이 가득 찬 침묵이 흘렀다.

“그건 그렇고, 내가 했던 부탁은 잊었어?”

에시메드는 그답지 않은 친절을 베풀며 되풀이해 말했다.

“이 문, 열어 달라고 했잖아.”

이미 황제가 이디스에게 그 유물을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답을 기다렸건만, 이건 또 뭔가.

“…….”

다시 도망치려는 듯 이디스가 뒤로 물러서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면 안 되지.

“어디 가?”

다시 한번 물어보았지만 이디스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이.”

에시메드는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약간 토라진 심정으로 환각을 조금 더 강화시켰다.

타다다닥-

“흐읍-!”

비명을 억누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멀어졌던 기척이 바싹 달라붙었다.

“쟤한테 잡혀가고 싶어? 그게 아니면 이 문 열어.”

“열게, 열겠다고!”

다급한 외침과 함께 덜걱덜걱, 문짝이 얕게 흔들렸다.

“……어?”

당연히 열릴 리가 없었다.

의아한 탄성이 되돌아왔다.

“……이거 안 열리는데?”

진심으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손쉽게 열린다면 내가 그동안 여기에 갇혀 있었을 리가 없잖아.

에시메드는 숨죽여 웃으며 설명했다.

“그냥은 안 열려. 너, 황제한테 받은 펜던트 있지?”

“……있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에시메드는 이디스의 물음을 태연히 무시하고 말했다.

“문을 자세히 보면 그 펜던트에 새겨진 피닉스와 똑같은 홈이 파여 있을 거야. 그곳에 펜던트를 대고 꾹 눌러.”

“…….”

고민에 잠긴 듯, 침묵이 흘렀다.

“지금 고민하는 거야?”

에시메드는 거듭되는 이디스의 망설임에 슬슬 화가 난다고 생각하며 환각의 움직임을 좀 더 빠르게 조종했다.

“으아아아악!!”

식겁한 비명이 들려왔다.

키이이이잉-

그다음 순간, 고막을 울리는 기묘한 공명 소리.

익숙하고, 더없이 소름 끼치도록 증오스럽던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되레, 저 기이한 소리를 듣는 동안 심장에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증오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뭘까?

이 감정은.

쿠구구구궁-

육중한 문이 열리자 익숙한 모습의 작은 소녀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서 있었다.

그게 못내 불만스러워 에시메드는 말했다.

“눈 떠.”

그리고 내심 놀랐다.

자신이 저 소녀의 눈을 마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토록 증오하던 헤일리안 대공과 다를 것 없는 눈인데, 어째서?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던 때, 소녀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눈꺼풀이 조심히 올라간 순간, 망연해지는 붉은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 그래.

“오랜만이야.”

헤일리안 대공과 닮았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아.

나는 그저, 너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하고 싶었을 뿐이야.

에시메드는 고요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디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 * *

그리하여 결국 여기까지 왔다.

에시메드는 제 눈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소녀를 눈 속에 담았다.

이제는 제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안다.

처음에는 악의로 비롯된 흥미였고, 그다음은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동질감이었다.

정신체로서 지켜보던 나날을 지나 실체 있는 몸으로 마주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고.

발레리안에게 이 소녀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고서 이 성까지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다.

“……말도, 안 돼.”

경악에 사로잡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에시메드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제 행동이 불러올 후폭풍을 뒤늦게 깨닫고 숨을 멈추었다.

이때껏,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본 적이 없었다.

에시메드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린 소년은 차갑게 얼어붙은 폐허에 홀로 남겨진 채,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조차 받지 못하고 쌓여 가는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했다.

그러나 폭력은 또 다른 고통으로 되돌아올 뿐이었고, 에시메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고통받으며.

고통스럽다는 자각조차 못 한 채 그 굴레만 끝없이 맴돌았다.

“고작 어둠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친아들을, 이런 곳에 가둬 두었다고?”

눈앞의 소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굴레는 아마도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건 잘못되었어.”

기억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황제는 끝없이 에시메드를 질타했다.

에시메드는 아르카네가 로샨 제국에 보낸 재앙의 씨앗이라며, 너 때문에 네 어미가 죽었다고.

고작 너 따위를 낳기 위해 그녀가 죽었다며 증오를 쏟아 냈다.

그러나 이디스는 황제가 에시메드에게 쏟아부었던 모든 말을 전면으로 부정했다.

따스한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에시메드의 손에 와닿았다.

에시메드는 망연히, 제 앞에 마주 앉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결심을 굳힌 듯 강고한 눈빛을 한 이디스가 그의 손을 꼭 쥐며 속삭이듯 약조했다.

“도와줄게.”

내가, 도와줄게.

빛나는 영롱함을 머금은 단단한 붉은빛의 두 눈동자가 에시메드를 응시했다.

에시메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버티고 싶지 않았다.

에시메드는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 뜨거웠다.

그리하여 타고난 출생으로 인해 부모에게서 버려져 유폐되었던 황자는, 증오를 건네주기 위해 그 이름을 받아 갔던 소녀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돌아와.

비로소 구원받게 되었다.

2. 유폐된 황자

어둠 속성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유로 멀쩡한 자식을 죽은 사람 취급했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버려진 성에 감금시켰고.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아이가 설사 잘못을 범했다 한들, 그 행동을 교정해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끔찍한 수준의 폭력과 폭언을 쏟아부었다.

“……부모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수십 년 전 어둠의 정령사들이 무슨 악행을 벌였든 간에, 그게 에시메드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은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고 에시메드는 그와 아무 관련 없는,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 아이인데.

그 아이를 저토록 추락시킨 이는 타고난 속성만으로 아이의 미래를 단정 짓고 냉혹하게 내버렸던 황제였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

처음 만났던 순간, 어째서 에시메드가 황태자와 2황자를 죽이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황량한 성의 벽화를 올려다보며 그 성을 자신의 무덤으로 칭했던 것이었는지.

정상적인 사람이었더라도 충분히 미쳐 버렸을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

“……에시메드.”

비로소 알게 된 이름을 읊조리며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네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유폐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

이전에도 황제, 오스발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조금 덜떨어져 보일 만큼 순수한 아이라고 여겼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에시메드의 권능 하나에도 벌벌 떨면서, 정작 제 친형제가 학대당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방관했다.

아버지가 제 모든 세상이며, 자신을 위협하는 형제를 향한 공포에 부러 죄책감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들 피해자의 고통을 온전히 알게 된 상황에서 황태자의 선택을 이해해 주기는 어려웠다.

나는 발길에 채인 돌을 걷어차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구해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황실의 힘을 얻고자 황궁에 들어온 것이었으나, 저 아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인간적인 도의로, 차마 눈 감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릴 수 없다.

하지만 어둠 속성을 지닌 정령사는 발견하는 즉시 사형해야 한다는 맹약이 존재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

대체 에시메드를 어떻게 구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다면 에시메드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에시메드는 차라리 죽느니만도 못한 삶을 이어 갈 것이다.

“하…….”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둠의 정령왕이라는 작자는 대체 무슨 앙심을 품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아.”

그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령왕.

이 세상에서 정령왕은 신이나 다름없이 숭배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내게는,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주기로 약속한 세 명의 정령왕이 있었다.

나는 환희에 차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떠올랐다.

어둠 속성을 타고나 죽어야만 할 운명을 지닌 에시메드를 구하고.

황실의 권력도 얻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방도가.

나는 다급히 내가 빠져나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약혼식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남았다.

그전까지 에시메드와 계획을 완성시켜야 했다.

* * *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여식,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대공녀 작위 수여식의 날이 밝았다.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 영애를 많이 닮았다던데…….”

“글쎄요, 타고난 재능을 보면 헤일리안 대공 각하를 더 많이 닮지 않았겠어요?”

“등장하자마자 황태자와 약혼이라니. 황제 폐하께서도 어지간히 놓치기 싫으셨나 보군.”

황궁의 정전을 수도의 귀족들이 빼곡히 채웠다.

모두가 하나같이 오늘의 주인공인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에 대해 입을 모았다.

이토록 경사스러운 날마저 정령 소환을 금지한다면, 위대한 피닉스의 축복을 받은 황제와 황태자가 정체 모를 자의 위협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자칫 심어 줄 수도 있다는 우려에 따라 한시적으로 거두어졌다.

덕분에 황궁은 오랜만에 여러 정령들로 가득하여 다채로운 권능이 붉은 성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

헤일리안 대공의 곁에 자리한 대공비는 창백한 낯으로 고개만 떨구었다.

그 옆에서 대공비의 딸, 알레아 대공녀는 어머니를 달래며 시종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시기를, 로샨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정전의 문이 열리며 황제와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일어나라.”

황제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짓하며 성큼성큼 황좌를 향해 걸어갔다.

붉은 관을 쓴 사제들이 다가와 약혼식에 사용될 물건을 가져왔다.

황제는 황좌의 앞에 섰고, 황태자는 그보다 약간 아래 위치한 단상에 자리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대공녀 작위 수여식과 황태자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의 약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황제가 선언한 순간.

끼이이익-

정전의 입구가 열리고, 환한 빛을 등지고 걸어 들어오는 작은 소녀에게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소문의 대공녀는 발목까지 오는 길이의 새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갖춰 입고 그 어미를 꼭 닮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자잘한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있었다.

작은 봄의 정령과도 같은 아름다운 자태에 곳곳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의 주인공,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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