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3)화 (34/141)

<33화>

* * *

나는 표정 변화 없이 붉은 융단 위를 걸어갔다.

길의 끝에서 황태자는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나는 그 손을 잡기 전 이곳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응시하는 로베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광경을 외면하는 샤스티아를 보았고.

마지막으로, 무표정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알레아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은 헤일리안 대공가의 고귀한 피와 영광스러운 축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이다. 그에 황제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는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에게 헤일리안의 대공녀 작위를 수여하겠다.”

황제는 미리 준비된 선언을 읊은 다음 왕홀을 들어 올렸다.

왕홀의 꼭대기에 박힌 붉은 정령석은 마치 그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내 어깨 위로 왕홀을 지그시 눌렀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의 신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작위 수여식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태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내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과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의 약혼식을…….”

[그만.]

그 순간.

황제의 목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고아한 목소리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황제는 놀란 반응을 내비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허공을 응시했다.

……진짜 약혼식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사아아-

마치 고대의 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리피아가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현현하였다.

“무슨…….”

“황금빛 장미, 은빛 머리카락…… 설마?”

하나같이 놀란 얼굴의 사람들을 굽어살피던 일리피아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며 작게 웃었다.

그는 내 곁에 가붓이 내려앉아, 황제를 향해 물었다.

[내 이름을 알겠느냐?]

황제는 당황스러운 듯 나와 일리피아를 번갈아 응시하다 천천히 답했다.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 님을 뵙습니다.”

억지로 쥐어 짜내어 답하는 황제의 목소리에 정전의 사람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생명의 정령왕?”

“……정령왕의 실체화는 살면서 한 번 보기도 힘든 것인데……!”

사람들은 그 희귀하다는 정령왕의 모습에 넋을 놓고 수군거리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황제는 여전히 당황이 가시지 않은 기색으로 일리피아를 응시했다.

[내가 이렇듯 식을 중단시킨 연유는 바로 오늘 거행될 예정이었던 로샨 제국의 황태자와 내가 축복한 아이,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혼약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일리피아는 심중을 읽어 낼 수 없는 평온한 말씨로 읊조렸다.

광활한 정전에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로베릭과 샤스티아 또한 경악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던 황제는 망연히 넋을 놓았다가, 곧 사납게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리피아가 우아한 말씨로 답했다.

[이디스에게는 이미 운명이 정해 놓은 반려자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정령왕의 연이은 충격적인 선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운명이 정한 반려자?! 그게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황제는 제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존재를 향해, 그 상대가 정령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외쳤다.

벌컥-

그 순간, 정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고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늦지 않게 온 건가.]

분명 더없이 수려한 인간 남성의 외형을 지녔으나, 하잘것없는 인간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위압감을 두른 존재.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가 무심한 기색으로 정전의 입구에 서 있었다.

생명의 정령왕에 이어 대지의 정령왕까지 현현하자 충격에 잠긴 좌중을 오리에드는 오만하게 무시하며 황좌를 향해 다가왔다.

그 존재에 압도되어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던 사람들은 오리에드의 곁에 작은 소년이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위대한 정령왕의 곁에 있음에도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없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이름 모를 소년에게 몇몇 이들의 시선이 향했다.

나는 그 소년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소년, 에시메드는 약간 생경한 기색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 저것이 여긴 어떻게…….”

황제는 에시메드를 발견하자마자 낯빛이 시퍼렇게 질렸고,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에시메드!”

그리고 나는 활짝 웃음을 짓고 단상을 내려가 보란 듯이 에시메드의 손을 맞잡았다.

“대, 대공녀!”

황태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나는 에시메드와 손을 단단히 맞잡고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황태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시메드의 모습에 안색이 허옇게 질려 입술만 파들파들 떨었다.

“지금 뭐 하는……!”

[인간들의 황제와.]

진노한 황제는 무어라 외치려 했으나 일리피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자신들의 지배자를 믿는 이들에게 친히 밝히니.]

일리피아는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대. 로샨 제국의 황제가 죽음이라는 거짓으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버려진 성에 유폐시킨 로샨 제국의 숨겨진 2황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

“……뭐?”

“지금, 일리피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라면…… 몇 해 전 요절하셨던 2황자 전하의 이름이 아닙니까?”

곳곳에서 온갖 놀라움과 경악을 담은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그가 바로 내가 축복한 아이,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진정한 반려자이다.]

일리피아는 뒤이은 말을 읊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모든 이들이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일리피아,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한 로베릭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너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소란의 중심에 자리한 나는 황제의 반응을 주시했다.

황제는 분노에 질린 낯으로 나와 에시메드를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걸까.

나는 보란 듯 웃으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 * *

“에시메드!”

그날, 나는 버려진 성으로 다급히 되돌아갔다.

자신의 모든 비밀을 토로한 이후 에시메드는 더 이상 내게 정신을 착란시키는 정령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나는 비로소 정상적인 길을 걸어 에시메드가 있는 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왜?”

에시메드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우리, 약혼하자.”

침묵이 흘렀다.

에시메드는 벙찐 표정을 지은 채, 내가 말을 꺼내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런 대답도 내어놓지 않았다.

……아차,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에시메드의 의사는 고려하지도 않고 말해 버렸네.

“아,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해. 네가 싫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아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부정의 뜻을 담은 에시메드의 목소리가 명확히 돌아왔다.

“안 싫어.”

에시메드는 한순간 망설이더니 다시 한번 부정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싫은 게 아니면 왜 대답을 망설였던 거지?

에시메드는 입술을 깨물며 벽을 쳐다보다가, 나를 쳐다보기를 반복하며,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한 거야?”

당연히.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는 에시메드를 향해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푸르른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황태자와 약혼하지 않을 거야, 에시메드.”

“……뭐?”

“그 대신 너와 약혼할 생각이니까.”

소년의 낯이 아연해졌다.

“너를 구해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너는 이대로 있어도 고통스럽기 그지없을 테고, 세상으로 나가도 네 타고난 속성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

하지만.

오래전의 지배자들이 정한 운명으로 인해 네가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하지만 방법은 있어. 나를 축복한 정령왕들이 나서서, 네가 나의 운명이 정한 반려자이고, 비록 네가 어둠 속성을 타고난 정령사지만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을 존재라고 선언해 주기만 한다면.”

인간의 지배자들보다 더 고귀한 존재들의 도움을 받자.

“황제가 주관하는 약혼식 도중, 갑자기 나타난 정령왕이 이 약혼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

에시메드는 그제야 내 의중을 이해한 듯 작게 탄성을 흘렸다.

“답은 간단하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속세 군주 따위의 말보다, 위대한 정령왕의 말에 더 귀 기울일 거야.”

나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약혼식을 치르는 도중에 일리피아를 나타나게 할 거야. 미리 약속한 대로 일리피아는 내 운명의 반려자는 황태자가 아닌 너라고 선언하겠지. 네가 사실 내 진정한 반려자였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황제가 너를 죽음으로 위장하여 유폐시켰다는 사실을 밝힐 거야. 그렇게 되면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네 존재를 알게 될 테고…….”

그리고, 마지막 남은 속성 문제는.

“우선 약혼식은 그대로 넘기자. 그 뒤 황제는 분명히 네 속성을 운운하며 우리의 약혼을 무마시키려 할 거야. 그때 정령왕들이 다시 나서서 네가 비록 어둠의 정령들의 축복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칠 운명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해 준다면 황제의 시도는 완전히 무산될 거야.”

그리하여 황제는 두 번 다시 에시메드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이제 에시메드는 어둠 속성을 타고났으나 결코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운명을 확증 받았고.

또한 생명, 물, 대지의 정령왕들이 사랑하는 대공녀의 반려자이니까.

이리한다면 에시메드의 지위 또한 본래대로 복권시킬 수 있겠지.

“내 계획은 이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에시메드.”

그리고…… 이건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뜻으로 이루어진 황태자와의 약혼과 달리 에시메드와의 약혼은 전적으로 내 뜻으로 이루어진 혼사니까.

훗날 내가 파혼하고 싶을 때 훨씬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에시메드가 제 자리를 찾는다면 황실의 힘을 얻어 할아버지의 복권을 노렸던 내 목적과도 부합하니,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이지 않은가?

말을 마치고 나는 당당하게 웃었다.

에시메드는 그런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날, 우리는 제국과 황실을 향해 거하게 엿을 먹이기로 약속했다.

* * *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한들, 그런 새빨간 거짓을 말해 봤자 백성들이 믿을 리가……!”

황제는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듯 외쳤다.

[거짓?]

일리피아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제는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돌렸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안색의 오리에드가 어느새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감히 정령왕이 사기를 친다고 몰아가는 것이냐? 어차피 피닉스도 사라졌는데, 이딴 제국 따위 지하에 파묻어 버릴까.]

으르렁거리듯 내뱉어진 오리에드의 말에 다시금 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 사실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궁지에 몰린 표정의 황제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령왕들의 말로는 불의 정령왕, 피닉스가 사라진 지가 꽤 되었다고 했다.

정령왕이 사라졌다니?

놀라 이유를 물었지만 그들은 그것까지는 답해 주지 않았다.

아무튼…… 그 때문에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축복이 약해졌고, 몰락한 바스테반의 핏줄까지 가리지 않고 황실에 섞기 위해 발악했던 것이었구나.

비로소 모든 경위가 이해되었다.

“황제 폐하! 그런 말씀은 분명 없으셨습니다!”

“로샨 제국을 수호하시는 불의 정령왕께서 사라지셨다니요!”

몇몇 귀족들은 정령왕들이 직접 나서서 밝히는 이 사태의 흐름을 파악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황제는 궁지에 몰려 아무런 말도 토해 내지 못했다.

[피닉스는 언감생심, 일개 하위 정령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버러지를 감히 내 정령사와 혼약시키려 들어?]

오리에드는 바들바들 떨다 못해 거품을 물 것 같은 안색의 황태자를 서늘하게 가라앉은 금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귀족들은 이제 경악하다 못해 기가 찬 기색으로 외쳤다.

“이 무슨…… 뭐라고?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런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하셨다니!”

“황제께서 우리를 기만하셨구려!”

“이 모두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 황태자 전하께서는 피닉스 님의 축복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예 아무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라니요!”

“그런 이가 어떻게 로샨 제국의 황위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써 황제가 숨기던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나는 에시메드와 마주 잡은 손을 더 힘주어 쥐었다.

에시메드는 익숙지 않은 듯 차마 손을 마주 잡지 못하였으나, 내가 단단히 잡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바,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와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는 오늘 일어날 예정이었던 혼약을 중단시킨다.]

일리피아는 정전의 모든 사람을 향해 선언했다.

[그리고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약혼식을 지금 거행하도록 하겠다!]

펑-!

일리피아의 목소리가 멈춘 그 순간, 공중에서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축포처럼 터졌다.

[이디스.]

정전의 황금빛 천장에서 나이아드가 자신의 권속들을 이끌고 나타나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황제는 천장에서 끝없이 터지는 물의 축포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앞으로 한동안, 감히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나는 뿌듯이 속삭이며 에시메드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귀족과 백성들에게 오늘의 일은 충격적인 소식으로 파다하게 퍼져 나갈 것이다.

불의 정령왕 피닉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한 일개 범인에 불과한 황태자가 불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았다며 로샨 제국의 모든 백성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황실의 명예는 추락할 것이고, 또한 나.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똑똑히 각인시켰으니까.

“앞으로 잘해 보자, 에시메드.”

나는 활짝 웃으며 에시메드를 돌아보았다.

에시메드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응.”

차가운 밤하늘을 총총히 수놓은 별을 닮은 소년은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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