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3. 밤으로부터의 긴 여로
[할아버지께.
잘 지내고 계세요? 벌써 할아버지를 뵙지 못한지도 반년이 넘어가요.
저는 무탈히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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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제가 황족과 약혼한 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나요?
그렇지만 저는 2황자 전하와 약혼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면 언제든 파혼할 수 있는 약혼이기도 하고요. 이 사실은 절대로 잊지 마세요!
참, 그러고 보니 이 소식을 전해드리지 않은 것 같네요.
페리온 미하일 할데바르트가 작위를 몰수당하고 지방의 본가로 내려갔어요.
그 잡초 머리 아저씨 얼굴 더 이상 안 보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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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유프스 백작님과 정령학에 대한 공부를 하는 중이에요.
유프스 백작님에 대해선 할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옛날부터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셨다던데.
정령학은 알면 알수록 재밌어서 더 열심히 배우고 싶어요.
저도 언젠가는 어머니처럼 리테라의 학회에 참가하고 싶으니까요.
아차, 쓰다 보니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네요. 이만 마칠게요.
언제나 할아버지께서 건강하시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요.
부디 무사히 여행 마치시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 주세요.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
-이디스 올림.]
* * *
한 해가 흐르고 나는 여덟 살이 되었다.
“자연계 정령왕들과 어둠의 정령왕의 관계는 참으로 특이합니다.”
유프스 백작은 빽빽하게 들어찬 서적의 글씨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가며 이야기했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는 이 우주에서 최초로 존재했던 정령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표면적으론 자연계 정령왕들과 동일한 격을 지닙니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늘 들려주시던 옛이야기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던가.
태고에 이 우주는 오직 어둠만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로서는 알지 못할 신비한 섭리로 인하여, 어둠 속에서 생명의 일리피아가 최초로 탄생하였다.
그 뒤를 따라 죽음이 탄생했고, 이 우주를 다채로운 생명으로 일궈 낸 존재들인 자연계 정령왕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아르카네는 그 자신이 마치 ‘악’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처럼 부정적인 관념에서 탄생한 모든 정령들을 속박하고 그 위에 군림하지요. 그의 권능은 매우 포괄적이며, 어떤 때는 전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술’ 또한 그의 권능에서 기원한 힘이니까요.”
서재의 바깥, 창가에서 들려오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나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자연계 정령들은 이렇듯 전능하고 강대한 아르카네에게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강한 적대감을 가지며, 다른 속성의 정령들 또한 가리지 않고 함께 결합하여 아르카네와 그의 권속들에게 대항한다는 점이지요.”
탁-
“마치 우리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태고부터 이어져 왔던 깊은 대립 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요.”
유프스 백작은 백과사전 두 개를 합친 듯한 두께의 서적을 닫았다.
“물론 아르카네가 우리 인간 세상을 위협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이어 오기는 하였으나, 그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정령왕들께 직접 캐물어 볼 수도 없으니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밖엔 할 수 없지요.”
늙은 노백작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질문을 받겠습니다.”
궁금한 건 차고 넘치지만, 어쨌든 유프스 백작도 황제의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질문은 최대한 가려서 해야 한다.
“그럼…… 자연계 정령왕들 모두가 아르카네를 적대하는 건가요?”
나는 말을 고르고 골라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에시메드의 속성 때문이었다.
에시메드는 아르카네의 권속으로 알려진 증오의 정령 트레가드와 공포의 정령 휠카셀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에시메드의 주 속성 정령이 되어 준 존재가 바로 자연계 정령왕 중 하나로 분류되는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라니.
뭔가 석연치 않았다.
‘2황자의 존재 자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에시메드가 아르카네의 권속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래전 맺은 맹약을 이행하기 위해 이 사실을 알린다면 나는 내 아들을 사형해야만 했고, 제국의 위신과 아비로서의 마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죽었다는 거짓까지 고해 가며 숨겼을 뿐이다!’
황태자와의 약혼을 시원하게 깨부수고, 일리피아의 주선 아래 에시메드와 약혼식을 치른 당일.
수많은 귀족들이 황제에게 해명을 촉구했다.
그때 황제는 되도 않은 ‘아비의 사랑’을 핑계로 들며 변명했다.
위대한 정령왕들의 축복을 받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의 반려자가 된 2황자가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충실한 권속 트레가드와 휠카셀의 축복을 받았다니.
그 사실 앞에서 귀족들은 동요하며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토록 불온한 존재였다면 생명과 물, 대지의 정령왕께서 2황자 전하를 이디스 대공녀의 반려자로 지목하지 않으셨겠지요.’
‘맞습니다. 게다가 정령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주 속성 정령’이지 않습니까. 2황자 전하의 주 속성 정령이 무엇입니까? 답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황제는 말없이 손을 그러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하얗게 변해 퍼런 힘줄이 잔뜩 돋아났다.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다.’
그 말이 반전의 시작이었다.
‘프린셔라면…… 자연계 정령왕이 아니십니까!’
‘설마 얼음의 정령왕께서 아르카네가 눈독 들인 존재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겠습니까?’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나 조금 섣부른 판단이 아니셨는지요. 2황자 전하께서는 엄연한 ‘정령왕’의 축복을 받으신 강대한 정령사이십니다. 휠카셀과 트레가드도 상위 정령에 속하는 만큼, 가히 1급 정령사로 분류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아무런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황태자 전하와 3황자 전하보다야 훨씬…….’
정령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주 속성 정령이다.
빙황이라는 별칭이 존재할 만큼 강대한 자연계 정령왕 중 하나인 프린셔가 에시메드를 축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귀족들은 조금의 흠결은 있어도 아무 능력도 없는 황태자보다야 차라리 2황자 에시메드가 낫지 않으냐는 의견을 보였다.
황제는 그들의 여론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에시메드의 뒤에는 정령왕들이 있었으니까.
또한 일리피아는 내 부탁대로 직접 나서 에시메드가 결코 이 제국과 세상에 해악을 끼칠 존재로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해 주었고, 그리하여 에시메드는 별다른 문제 없이 본래의 2황자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에시메드의 주 속성 정령마저 어둠 속성의 정령이었다면, 설사 일리피아와 정령왕들이 나서 주었다고 한들 끝내 나는 그에게 본래의 지위를 돌려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어째서 프린셔는, 어둠의 정령이 축복한 에시메드의 주 속성 정령이 되어 준 걸까?
그리고 일리피아와 나이아드, 오리에드는 내 앞에 모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데 프린셔는 에시메드가 황제에게 핍박당하고 감금되었을 때도 모습 한번 드러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동안 얼음의 권능은 어떻게 사용했냐고 물으니, 아주 어릴 때부터 숨 쉬듯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에시메드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점투성이였다.
이 내막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령왕 간의 세력 구도를 알아 두어야 했다.
어떤 이가 아르카네를 가장 적대하였는지, 또 어떤 이가 가장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가리지 않고 전부.
“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정령왕들의 심중을 저희 인간들이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날 만큼 강한 적의를 보이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정령왕을 꼽아 보자면…….”
유프스 백작은 종이에 그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아르카네를 향해 유달리 강한 적대감을 내비쳤던 정령왕들의 이름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은…….
“……피닉스?”
불의 정령왕 피닉스였다.
“예. 그곳에 적힌 정령왕 중, 불의 정령왕 피닉스께서 가장 앞장서 아르카네를 대적하셨던 분이셨습니다.”
……현재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피닉스가, 아르카네를 가장 적대했던 정령왕이라.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 대공녀님의 부친 되시는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주 속성 정령이시지요. 또한 헤일리안 대공가는 오래전부터 대대로 빛의 축복이 이어져 내려온 가문이기도 합니다. 무려 별칭이 빛의 헤일리안, 이었으니까요. 이에는 유서 깊은 역사가 존재합니다만…… 아직 대공녀께서는 어리시니, 후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오리에드 또한 아르카네를 적대했구나.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이름은…….
“지혜의 정령왕, 로어……?”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우선 바람의 정령왕님과 불의 정령왕님, 대지의 정령왕님……. 아, 그리고 생명의 정령왕님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셨대요.]
오래 전, 성도로 향하는 마차 안.
언딘을 향해 지혜의 정령왕에 대한 정보를 물었을 때 돌아왔던 대답이 뇌리에서 울려 퍼졌다.
또다시 이 이름이 등장했다.
마리에트의 주 속성 정령.
지혜의 로어.
“맞습니다. 지혜의 정령왕께서도 아르카네를 크게 적대하셨던 정령왕이십니다. 정신계 정령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아르카네를 경계하셨지요.”
소름이 돋았다.
에시메드와의 일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 이름이, 저를 잊지 말라며 다시금 나를 찾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자존심 상하게도…… 마리에트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하고 마리에트와 가장 긴밀했던 정령은, 내가 아닌 지혜의 정령왕이었다. 그가 마리에트의 주 속성 정령이었지.]
[내가 아는 것은 마리에트의 어린 시절과…… 그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여 소환했던 순간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마도 네가 궁금해할 이야기들은 그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이아드의 잠잠한 말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원작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존재건만, 가히 이 세계관에서 최고 ‘악’의 무게를 가지는 것과 같이 여겨지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
그런 아르카네를 적대한 정령왕, 지혜의 로어.
그리고…… 그런 로어에게 축복을 받았던 마리에트.
[내 정령왕으로서의 지위를 걸고 보증하지. 마리에트는 결코 악으로 물들 아이가 아니었다.]
어째서, 나이아드의 그 단호했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오르는 걸까.
“생각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아.”
유프스 백작이 내 상념을 일깨웠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지혜의 정령왕께 관심이 가십니까?”
유프스 백작이 물었다.
……당연히.
“……어머니를 축복하셨던 정령왕이시니까요.”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정령왕이 바로 지혜의 정령왕이었다.
정령사는 부모에게서 한 가지의 속성만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실망했던가.
“흐음- 하나, 현재 지혜의 정령왕께서도 행방이 묘연하신 터라…….”
대체 피닉스도 그렇고, 로어도 그렇고 다들 어딜 쏘다니는 거야.
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투정하듯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기록은 존재하지요.”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유프스 백작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대륙의 정령사 학회, 리테라. 그곳에 모든 정령과 정령왕들의 기록을 담은 방대한 자료가 존재합니다. 정녕 궁금하시다면 리테라에 방문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리테라. 그곳도 얼마나 가 보고 싶었던가.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리테라에는 정령사 자격을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잖아요.”
황실과의 약혼 문제가 정리된 다음 리테라에 방문해 볼 계획을 세워 보았지만…….
당초 생각과는 달리 2급 이상의 정령사라면 누구든 방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령사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등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정령사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령사 자격을 취득하는 시험은 악랄하게도 나이 제한이 있었다.
최소 12세 이상인 사람만 응시할 수 있다니.
그것만 아니었어도 당장 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분한 감정을 삭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게다가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다 한들,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지 못한다면 설사 로샨의 황제라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 하니…….
“그 건으로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리테라의 의장이 제 오랜 친우거든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망연히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도 리테라에 친구가 있었어?
할아버지께서도 오랜 친우가 리테라에 머물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로베릭을 피해 도망칠 때도 리테라로 향하려 하셨고…….
“또, 제 손주 녀석이…… 이렇게 말하긴 좀 쑥스럽습니다만,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의장의 제자 자격으로 리테라에서 유학 중입니다. 의장이 제 손자를 매우 총애하니- 그 아이에게 설득을 부탁하면, 초청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세월을 고상히 머금은 노귀족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유프스 백작은 허허로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방문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