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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5)화 (36/141)

<35화>

* * *

나는 날듯이 걸어 내 궁에 도착했다.

“이디스.”

“어라, 에시…… 가 아니라 2황자 전하.”

그런데 내가 머무는 궁전의 정원에 에시메드가 서 있었다.

무심코 둘만 있을 때처럼 이름으로 부를 뻔했다.

나는 에시메드의 뒤에 있는 시녀들을 살피며 재빨리 존칭을 붙였다.

에시메드가 지위를 되찾은 이후로 더 이상 공개적인 자리에서 에시메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일이세요?”

로베릭은 죽음으로 위장되어 유폐되어 있던 2황자와 내가 약혼하는 일을 매우 달갑잖게 여겼으나,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정령왕들이 주선한 혼사에 그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으니까.

유난히 에시메드를 탐탁잖게 여기던 로베릭은 결과적으로 황태자가 아닌 2황자와 혼약했으므로 황태자비 교육이 필요 없으니 이전처럼 대공저에서 지내라고 말했으나.

‘싫어요.’

‘이디스……!’

내가 싫었다.

예정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나는 2황자의 약혼녀였다.

선례를 보아도, 황태자가 아닌 황자와 약혼했던 영애들 또한 황궁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내가 에시메드의 2황자 궁에 딸린 별궁에서 지내는 일이 문제가 될 요지는 없었다.

즉, 더 이상 샤스티아와 알레아가 있는 대공저에서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정령왕들에게 호되게 당한 것도 모자라,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실종, 황태자를 정령사라고 사기를 친 일이 모두 드러난 황제는 대내외적으로 위신이 매우 실추된 상황이었으므로 전처럼 여유만만하게 나를 대하지 못했다.

어떠한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어차피 불의 정령왕께서도 자취를 감추신 판국에, 얼음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으신 2황자 전하로 황태자 자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인해 그 지위마저 위태로워진 황태자는 위협적인 대상이 되지도 못했고.

이러나저러나 황궁이 대공저보다는 여러모로 나았다.

정식으로 대공녀 작위도 수여 받았으니까, 대공저에서 지내야만 했던 커다란 이유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냥. 심심해서.”

에시메드는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 그럼 오신 김에 같이 저녁 먹어요.”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에시메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에시메드는 순순히 뒤를 따라왔다.

* * *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에시메드와 나는 꽤 많이 친밀해졌다.

자의든 타의든 운명 공동체가 된 우리는 적어도 성년이 될 때까지는 서로가 필요했으니까.

에시메드가 정말로 발레리안을 밀어내고 황태자가 되든.

내가 에시메드와 파혼하고 헤일리안 대공 위를 쟁취하든.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그전까지는 함께였다.

“그래서 유프스 백작에게 부탁해서 리테라의 초청장을 받기로 했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닌데, 그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

정상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 에시메드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섬뜩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보자마자 목부터 틀어쥐고, 말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협박이 깔려 있었는데.

“초청장이 날아오면 리테라로 갈 거야?”

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응. 어머니를 축복했던 정령왕에 대해서 알고 싶으니까.”

나는 유프스 백작이 전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직이 답했다.

“……그럼 나도 갈래.”

응?

눈을 깜박이며 에시메드를 돌아보자 전보다 키가 조금 자란 소년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같이 가겠다는 거지?

“너도 정령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어?”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그사이 학구열이 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데 에시메드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언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꾸깃, 좁히고서 나를 불만스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뭐야, 왜 저래?

“그럼 왜 같이 가겠다는 건데?”

에시메드는 입술을 꾹 깨물다 짓씹듯 답했다.

“-너랑 떨어지기 싫으니까.”

“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에시메드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더니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리테라는 제국 바깥에 존재해. ……성도에서 그곳으로 떠난다면 족히 두 달간은 돌아오지 못할 거야.”

애써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돌아왔다.

“……응.”

나도 그건 알고 있지.

“그러니까 싫어.”

곧바로 치고 들어온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

시리도록 형형한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너 없이 그동안 어떻게 지내.”

그 차가운 빛과는 상반되게도 에시메드의 눈동자는 미약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가 버릴 거잖아. 그럼 차라리 같이 가. 너를 따라갈래.”

아니…… 누가 보면 영영 떠나는 줄 알겠다.

“풋.”

어이가 없었으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에시메드의 간절한 눈빛이 조금 우스워서.

나는 살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에시메드가 같이 간다고 한다면 나야 나쁠 것은 없다.

로샨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얼음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동시에 어둠 속성을 지닌.

그동안 죽었다고 알려졌던 2황자에 대한 소문으로 시끄러웠으니 말이다.

소문의 황족이 온다고 하면 리테라에서 더 쉽게 허가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에시메드에게는 구태여 내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고.

“그래. 같이 가자.”

나는 선선히 대꾸했다.

에시메드는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어딘지 안도한 기색이었다.

* * *

“로샨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우리 니샤의 범죄자들에겐 무슨 용무이신지.”

검은 그림자에 가려진 나른한 목소리가 물음을 던졌다.

어둑한 밤이 짙게 내려앉은 니샤의 거리.

백색의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거칠게 로브를 벗어던지자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불꽃을 닮은 외모가 드러났다.

그 앞에 있던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이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와락 일그러진 표정을 드리운 불꽃을 닮은 사내.

로샨 제국의 황제,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는 곁에 시립한 수하에게 턱짓해 커다란 궤짝을 땅에 내려놓았다.

“선금이다. 의뢰를 완수하면 이보다 몇십 배에 달하는 보상을 주지.”

험악한 기류를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어 봐.”

주인의 명이 떨어지자 그림자의 일부인 듯 기척을 숨겼던 이들이 다가가 궤짝을 열어젖혔다.

“와- 이게 바로 로샨 제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불의 정령석인가 봅니다? 죽은 정령들의 영혼이 담겼다던.”

이 밤을 모두 밝힐 듯 눈이 부시게 영롱한 빛을 발하는 붉은 정령석을 손아귀에 쥐어 든 이.

밤의 니샤를 지배하는 암흑가 길드, 일립스의 수장이 감탄하듯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툭-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요요한 붉은빛을 내뿜던 정령석이 흙길에 내던져졌다.

“무슨-!”

하잘것없는 것을 다루듯 무례한 태도에 황제가 분개하던 때였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이가, 황제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 얼굴을 기울였다.

“이토록 지고하신 로샨의 황제께서, 어째서 친아들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화르륵, 태양처럼 일렁이는 불길이 빛을 발하는 검을 뽑아 들던 황제의 기사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황제는 새카만 천에 가려져 얼굴 한 자락 내비치지 않는 상대를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말씀해 보십시오. 왜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로샨에서, 그토록 경멸하던 니샤의 범죄자 길드 따위에게 제 친아들을 죽이란 의뢰를 맡기시는 것인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주워 먹는 집단이 아니었나?”

“하하, 말씀이 심하시네.”

그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의뢰의 위험도가 너무 높으니까 그러지요. 로샨의 2황자와, 헤일리안 대공녀가 리테라로 향하는 길에서 대공녀는 제외하고, 딱!”

과한 몸짓으로 하소연하던 그는 손가락을 하나 치켜올리며 차분하게 읊조렸다.

“2황자만 납치해서 몰래 죽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의뢰입니까? 헤일리안 대공녀가 얼마나 대단한 정령사인지 까먹기라도 하셨는지.”

황제는 대답 없이 손을 말아 쥐었다.

검은 천 자락에 가려진 회색빛 눈동자가 황제의 그러한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자기 약혼자가 눈앞에서 납치당하는데 어린 대공녀께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실까요. 작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성격도 보통이 아닌 것 같으시던데.”

아, 그 일.

역린이 들쑤셔졌다.

오스발트는 턱을 사납게 악물며 일갈했다.

“그러니까 네놈들에게 맡기는 것 아니겠나. 샤르잔 왕국의 4왕자도 암살했다고 들었다. 그런 네놈들이 고작 어린아이 하나 제압하지 못할까. 괜한 엄살 피우지 말고 의뢰를 받아들여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황제의 몸 주위에서 주홍빛 불길이 너울거렸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오늘 네놈들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니.”

“와- 무서워라. 불의 정령왕께서 존재를 감추셨음에도 불구하고 로샨 제국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하군요.”

빈정거리듯 대꾸한 일립스의 수장은 몸을 돌렸다.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황제가 노성을 내지르려던 찰나.

“그 의뢰, 수락하겠습니다.”

가붓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멈칫, 움직임을 멈추는 황제를 향해 조롱의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가 뒤이어 날아들었다.

“약속하신 보상금이나 준비하고 계시지요.”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검은 장막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고.

“…….”

고요한 밤의 거리에는 황제와 그 수하들만이 남았다.

* * *

보름 뒤, 유프스 백작은 두 장의 초청장을 들고 귀환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의 손자가 의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속으로 그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기쁨에 벅차올라 내 앞으로 온 초청장을 읽었다.

드디어 마리에트의 과거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디스, 그 먼 길을 떠나는데…… 나도 함께 따라가마. 위험할지도 모르잖니.”

그러나 에시메드와 함께 황궁을 떠나는 당일, 로베릭이 애타는 기색으로 나를 붙잡았다.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혹시나 위험하더라도 제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을까요.”

리테라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리에트의 과거와 지혜의 정령왕에 대해 조사하고자 함인데, 로베릭이 따라붙는다면 내 행동에 제한이 생길 게 분명했다.

“…….”

데려갈 생각은 결코 없었다.

냉정히 대꾸하자 로베릭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나는 로베릭에게서 돌아서며 마차에 올랐다.

“이디스! 그래도,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버지에게 일리피아를 보내렴! 그럼…….”

“출발해 주세요!”

탁-

2황자와 대공녀가 여행길에 사용하는 마차답게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로베릭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시메드가 물어왔다.

“헤일리안 대공이 그렇게 싫어?”

“당연하지. ……네가 황제를 싫어하는 만큼.”

늘 그랬듯 이야기하던 순간, 떠오르는 몇몇 기억들이 심상을 어지럽혔으나.

“진심으로.”

로베릭이 내게 보였던 역겨운 집착과 헌신이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

에시메드는 말똥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어딘가 쎄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말았다.

로베릭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내가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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