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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6)화 (37/141)

<36화>

* * *

리테라로 향하는 계획은 이러했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리테라까지 보다 빠르게 가기 위해 우리는 바람의 정령석으로 움직이는 부유선을 타기로 했다.

탑승장은 성도에서 이틀 정도 걸리는 위치의 도시, 에피스.

부유선을 타고 이동하면 리테라까지 가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드니 최대한 빠르게 에피스 시에 도착하는 것이 편안한 여행길의 여부가 달린 중요 관건이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떠할지요? 마침 이 근방에 라이너 후작가의 저택이 있는지라, 2황자 전하와 대공녀님께서 뜻을 전하신다면 후작은 흔쾌히 성문을 열 것입니다.”

그런데 서너 시간 정도 달렸을까.

어느새 도시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숲길을 달리던 도중 말에게 물을 먹이고 기사들이 무구를 재정비하기 위해 마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였다.

황궁의 시녀가 마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굳이? 별로 피곤하지도 않은데.

나는 에시메드를 돌아보며 그의 의견을 구했다.

“딱히 쉬어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유폐에서 벗어나고 그동안 많이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으니 빨리 출발하기나 해.”

“……알겠습니다, 전하.”

에시메드는 한기가 풀풀 풍기는 태도로 딱 잘라 명했다.

천성적으로 남들의 위에 올라서는 기질을 타고난 듯한 2황자의 태도에 시녀는 움찔, 짓눌린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조용히 물러갔다.

멈춰 있던 마차의 바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과 내일은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겠네.

나는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까 왠지 옛날 생각난다. 할아버지랑 같이 도망칠 때 말이다.

한 번 물꼬를 틀자, 생각의 방향이 할아버지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이디스! 이게, 이게 무슨 소리냐, 네가 2황자와 약혼했다니!’

한 해 전, 몇 달 만에 재회한 할아버지는 눈물의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충격의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로 외치셨다.

……아, 할아버지께는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는 소리와도 같으셨을 것이었다.

로베릭과 함께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나 다름없는 황제 오스발트의 숨겨진 둘째 아들과, 황실과 대공가의 눈을 피해 고이 길렀던 손녀딸이 약혼을 했다니.

……와, 나열해 놓고 보니까 더 경악스러운 관계도인데?

물론 에시메드는 오스발트의 자식이라곤 해도 깊은 사연이 있었다지만…… 나는 난감하여 말을 골랐다.

‘틀림없다, 네 재능을 탐한 황제의 강요로 이루어진 혼사로구나! 아니, 게다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불의 정령왕께서 사라지시고 황태자는 아무 축복도 받지 못한 범인에 불과하며, 또 너와 약혼한 그 2황자 놈은 아르카네의 권속의 축복을 받았다니! 그런 놈과 네가 약혼을 했다고?!’

‘저, 할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 2황자 전하와의 약혼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휘황한 빛을 머금은 금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황제 폐하는 2황자 전하를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어둠 속성을 타고났다며 증오하고 학대했죠. 그리고 저는,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한 황태자보다 2황자 전하와 약혼하는 게 훨씬 제 앞날에 이득이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이 모든 건 제가 내린 결정이에요. 2황자 전하께서는 제 손을 잡고 유폐에서 풀려나셨고, 어둠 속성을 타고난 연유로 사형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되셨죠. 그리고 저는 황족의 혼약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에게 기대도 되지 않는, 스스로의 기반을 얻게 되었어요.’

이 정도면 할아버지께서도 이해해 주시겠지. 늘 내게는 너그러우셨던 분이시니까.

‘안 된다.’

‘……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내 눈에 재가 들어가도 안 돼! 아르카네가 얼마나 흉악한 존재인지 몰라서 네가 그러는 것이다!’

로베릭을 이야기할 때보다도 더욱 강렬한 증오를 내비치는 할아버지의 눈빛과, 격정을 못 이겨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내게는 더없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야기까진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아 함구했거늘……. 어찌 일이 이렇게 흘러간단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마리에트를 그리 매정하게 앗아 가셨으면서, 이디스 너까지…….’

천천히 무너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수십여 년 전, 어둠 속성의 정령사들과 아르카네를 숭배하던 인간들이 대륙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혼돈에 몰아넣었다.

그때의 참극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 사건에 ‘재앙의 개시’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참혹한 세월이 오래도록 이어졌다고 한다.

그 학살극이 정확히 어떻게 종결될 수 있었는지는 내가 일람하는 것이 허락된 서적 중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알 방도가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한다면 당시 끔찍한 학살과 전쟁이 반복되던 시대가 할아버지의 유년기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기억이 뇌리에 얼마나 깊게 각인되어 있다면, 아무 관련 없는 어린 2황자가 어둠의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만으로 저토록 괴로워하실까.

“……에시메드.”

결국 꿈에서도 그리던 할아버지와의 재회는 좋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에 만났을 때에도 할아버지께서는 에시메드와 약혼한 일에 대해 시종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왜?”

나는 아무런 진실도 알지 못하는 이처럼 그저 시리도록 맑은 벽안을 응시하다 어렵게 내뱉었다.

“혹시, 아르카네를 만나본 적이…… 있어?”

“……그건 왜 물어?”

“그냥.”

재앙의 개시.

마리에트와 지혜의 정령왕과 함께 가장 궁금한 과거사 중 하나였으나, 이상하게도 유프스 백작은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지 않으며 언급을 피했고.

내게 허락된 서적 그 어디에도 명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에시메드는 알고 있을까?

마음만 같아서는 수십여 년 전 일어났던 재앙의 개시가 대체 무슨 연유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진 사건이었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여파로 인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에시메드에게, 감히 그것마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만난 적 없어.”

에시메드가 천천히 말했다.

“증오에 미칠 것 같던 순간에는 그 무엇을 대가로 내놓아도 좋으니 아르카네를 소환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트레가드와 휠카셀에게 요구한 적도 있었지만…….”

말끝을 흐리며, 끝내 망설이듯 이어진 목소리는.

“그 녀석들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며 나를 말렸어. 알려 줄 수 없다고.”

“……말렸다고?”

나는 멍하게 되물었다.

에시메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너희들이 우러러 숭배하는 주인이 아니냐, 왜 나를 말리는 것이냐고 따져 물어도 소용이 없었지. 그저 고개를 저으며, 그것만은 안 된다고.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 말만 되풀이하다 끝내 모습을 감추었을 뿐.”

증오의 정령 트레가드와 공포의 정령 휠카셀.

부정적인 관념에서 탄생한 그 정령들은 부정할 수 없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권속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에시메드가 아르카네를 소환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일까?

“……나갈 길 없는 미궁에 갇힌 것 같아.”

나는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옆으로 몸을 눕혔다.

에시메드는 입을 꾹 다물며 침묵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허공만을 응시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움직임을 멎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음?”

나는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옆으로 틀어 창문을 응시했다.

풍경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차가 확실히 멈춰 있었다.

분명 쉬지 않고 마을까지 달리라고 명했는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유독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 바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똑똑-

그 순간, 마차의 문을 자그맣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일 수도 있겠지만, 어째서일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에시메드와 시선을 교환했다.

에시메드 또한 바깥의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했다.

정령을 소환하려면 주문을 읊어야 한다.

그리한다면 바깥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곁엔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존재했다.

에시메드는 가만히 마차의 문을 응시했다.

침묵의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날카로운 둔기로 얼어붙은 벽을 부서뜨리듯.

파사삭-

찬란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황실의 기사라면 2황자가 만든 것이 분명한 빙벽을 구태여 부서뜨릴 리가 없어.”

역시나, 에시메드가 시험 삼아 얼음을 생성시켰던 듯했다.

에시메드는 낯빛을 시리게 굳히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릴 테니, 어서 정령을 소환해.”

“알았어.”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바깥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와 우리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침묵했다간 직접 저 문을 부서뜨리고 들어오겠지.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콰앙-!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거센 돌풍이 들이닥쳐, 머리칼이 허공으로 비산하듯 휘날렸다.

“[나이아드]!”

얼굴을 사납게 할퀴며 날아드는 냉기에 맞서, 나는 두 눈을 질끈 내리감고 외쳤다.

쐐액-!

“피해!”

하얀 안개와 마차가 부서지며 일으킨 먼지가 주위를 자욱하게 메워, 모습조차 볼 수 없는 와중, 에시메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바로 지척에서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음이 들려왔다.

검고 커다란 무언가가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반파된 마차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디스!]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노성을 질렀다.

“……나이아드!”

나이아드였다.

한바탕 흙바닥을 굴러 온몸이 아려왔음에도, 나는 환희에 잠겨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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