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37)화 (38/141)

<37화>

검푸른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막이 나를 향해 매섭게 날아들던 정체 모를 무언가를 막았다.

‘그것’은 나이아드가 생성한 장막에 그 형체가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괜찮으냐? 다친 곳은 없어?!]

희뿌연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이아드는 다급히 내 팔을 붙들고 혹여나 상처가 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아니, 지금 이게 급한 게 아니라!

“암살자들이 습격한 것 같아요. 지금 에시메드가 홀로 싸우고 있어요, 나이아드. 어서 도와주세요!”

[암살자…… 알겠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낯을 더욱 서늘히 굳힌 나이아드는 나를 살피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

테르마 시의 관저가 온통 불길에 휩싸였을 때, 이프리트를 내치고 불길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 나이아드가 일으켰던 거대한 물기둥과 비슷한.

그러나 이번에는 나이아드와 나를 둘러싸고 원으로 순환하는 거대한 고리의 형태를 띤 물줄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춤추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윽-!”

“억!”

시리도록 차가운 안개가 물에 닿아 사라졌다.

도통 제대로 마주할 수 없던 시야가 서서히 맑아졌다.

밝은 한낮의 태양 아래, 곳곳에 날이 휘어진 월도를 쥔 불청객들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기사들은……!”

시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저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길하게도, 검은 복장은 꼭 자객을 연상시켰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물기둥들이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날아갔지만, 그들이 손에 쥔 검은 월도를 휘둘러 물줄기를 베는 순간.

“!”

[이런…….]

알 수 없는 검은 궤적이 시야에 비쳤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검에 베여 나간 물의 단면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마치 무언가에 잡아먹힌 듯.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사라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령왕이 직접 일으킨 권능이 사라진 것이다.

“……말도, 안 돼.”

나는 방금 본 광경을 뼛속 깊이 의심하며 망연히 눈동자만 깜박였다.

[……네 반려가 보이지 않는구나. 이 일은 내가 해결할 터이니, 어서 그 아이부터 찾거라!]

그 순간, 충격에 잠겨 있던 나를 나이아드가 일깨웠다.

자욱히 깔렸던 안개가 모두 사라졌건만, 에시메드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함인 듯 끝없이 순환하는 물의 고리가 내 주위를 커다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에시메드를 찾아 헤맸다.

“에시메드!”

그러나 작은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타들어 가는 심정에 애꿎은 입술만 사리물던 순간이었다.

저벅-

무려 정령왕을 소환하여 전투를 벌이는 난전의 한가운데, 이 긴박한 상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걸음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수풀 사이로 검은 옷깃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아. 이게 얼마 만인지.”

나른하고, 달콤함마저 느껴질 만큼 유혹적인 목소리.

그 품에 힘없이 늘어진 소년의 몸체는 내가 익히 알던 이의 것.

“-에시메드!!”

하얗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눈을 감은 아이의 낯빛을 본 순간, 나는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아이의 이름을 막을 수 없었다.

아, 어째서, 대체 왜, 어느 순간에.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에시메드를 찾았다면, 그랬다면, 아니야. 그저 기절했을 뿐일 거야. 그럴 거야…….

순간의 찰나에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시들어 버렸는지 모를 순간.

“너무 놀라는 것 아닌가.”

에시메드를 품에 안은 그 남자가 나직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그저 기절한 것뿐이니.”

그 사내가 내뱉은 단 한마디로 막혔던 숨을 토해 내며, 나는 비로소 그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했다.

매혹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얼굴로 형상화된다면 꼭 저자와 같을 것 같았다.

목덜미 위로 짧게 쳐진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날카롭게 솟은 콧날과 그 눈초리가 매서웠으나, 묘한 빛을 머금고 고요하게 반짝이는 회안을 품은 눈매가 유달리 짙고 깊어 우수에 젖은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자의 주위를 둘러싼 기류에 흐르는 음울한 아름다움이 위압감을 적당히 감추는 듯했으나, 그것은 눈속임일 뿐.

매혹적이리만큼 아름다운 외양에 속아 다가갔다간 목덜미를 물어뜯기고야 말 것만 같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가까운 자…….

알 수 없게도,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 대체 누구죠? 자객인가요?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렇게…….”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누르고 물었다.

내 얼굴을 집요하리만치 응시하며 눈꺼풀 하나, 입술의 움직임 하나까지 뜯어 살피는 듯하던 남자가 매끄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글쎄. 그 얼굴로 내가 누구인지 물으니 감회가 남다른데.”

“……?”

누가 사주해서 우리를 해치려 한 거냐고 물었는데,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답이 돌아왔다.

쿠궁-!

[이디스!]

그 순간,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이아드가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뒤로 하늘까지 닿을 만큼 드높은 물의 장막이 넘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몰아닥칠 해일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네 반려는 찾았느냐, 저 뒤에 있던 자들은 우선 물의 장막에 가둬 놓았는데…… 네놈은 누구냐.]

나를 감싸 안듯 끌어당기며 말하던 나이아드는 에시메드를 품에 안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정령왕의 분노를 마주하면서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은 남자는 에시메드를 땅 위로 내려놓은 뒤 한 손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미간을 좁히던 그때, 그 남자는 불현듯 나타난 검게 일렁이는 잔상을 창백한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자객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들고 있던 무기에 서린 것과 비슷해 보였으나, 그보다 훨씬 더 거대했으며.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무기에 두른 것이 아닌.

“해후를 푸는 것에 이런 방식도 나쁘진 않지.”

그 잔상, 궤적.

그 자체를 손에 쥔 채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의 태도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면서도 검게 일렁이는, 마치 빛을 잃고 밤에 잡아먹힌 그믐달처럼 보이는 정체 모를 권능을 긴장 섞인 시선으로 응시했다.

[저것은……. 그렇군. 네놈, 니샤의 왕족이로구나!]

짙은 증오가 서려 차갑게 벼려진 칼날을 닮은 음성이 격정을 머금고 외쳤다.

그것은, 믿지 못하게도 나이아드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니샤라니?

니샤는 로샨의 이웃에 위치한 왕국의 이름이잖아.

마차와 일행을 습격한 이가 니샤의 왕족이라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정체야?

그가 왜?

비록 니샤 왕국은 로샨과 매우 관계가 안 좋긴 하지만, 평시에는 서로에게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던 사이일 뿐인데……?

“나이아드, 그게 무슨……?”

황망함에 잠긴 내가 그를 불렀으나 나이아드는 드물게도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잔잔한 떨림이 그의 손을 타고 내게로 전해져 왔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던 나이아드가 짓씹듯 말했다.

[나의 공국을 멸망시켰던 죄인의 자손이여.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공국의 핏줄마저 끊어 놓으려는 것인가?]

나로서는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그의 말이 끝나던 순간, 머리 위가 어두워진다 싶더니.

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빛을 모조리 가릴 정도로 거대한 물의 구체가 소용돌이치며, 눈앞의 남자를 향해 천벌을 내리듯 정령왕의 분노를 매섭도록 쏟아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느른한 답과 함께 검은 잔상이 독특한 궤적을 남기며 그 남자의 손에서 자유자재로 휘둘러졌다.

그 검은 형체에 베이는 순간 나이아드가 보낸 공격은 모두 사라졌다.

그믐달을 닮은 죽 찢어진 입이 제게 닿은 모든 것을 먹어 치워 버린 것처럼.

“안 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리에드를 소환해야 한다.

나이아드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으면 안 되지.”

“!”

소환의 주문을 읊기 위해 입을 벌리던 순간, 내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 남자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쉬익-

“악!”

곧 다리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와 박혔다.

[이디스!]

나이아드가 경악한 듯 외쳤으나, 그는 더 이상 내게 다가올 수 없었다.

[이게…….]

그 몸이 물거품처럼 사그라들며.

순식간에 나이아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환이 풀려버린 것이다.

“무슨…….”

너무 아파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괴로움에 신음을 흘렸다.

다리가 관통된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올라와 이성조차 마비되는 듯했다.

저벅-

“그만 포기해. 그건 체내의 마나 흐름을 억제하는 아티팩트거든.”

코앞까지 다가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한시라도 빨리 소환 주문을 읊어야…….

“처음 사용하는 것이니 반동이 더 클 텐데, 어차피 더 이상 정령 소환도 못 할 테지. 그러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섬뜩한 불길함을 느꼈다.

“더 이상 반항하지 말고 눈 좀 붙이세요.”

억지로 정신을 붙들려고 하였지만 불가능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점점 까맣게 물드는 정신 사이로, 정녕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 찬 납치범이 다정히 속삭였다.

“마리에트의 따님.”

* * *

로샨 제국의 2황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가 행방불명되었다.

“……뭐?”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납치당했다.

두 아이가 탄 마차가 무엇 때문에 행방이 묘연해졌겠는가.

사실상 납치인 것이 명확했다.

“감히 누가!”

그 소식을 보고받은 헤일리안 대공은 열화와 같은 고함을 토해 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황을 알린 수하의 멱살을 잡아챘다.

“누가 내 딸을 납치했느냐고 물었다! 설마 아직도 배후를 특정해 내지 못한 것이냐?!”

“……송구합니다, 현재 황실에서 수색하고 있으나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여…….”

그 충격적인 소식에 성도가 발칵 뒤집혔다.

분명 입단속을 해야 했건만 누가 퍼뜨린 것인지, 성도의 온 백성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로베릭!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요! 아이를 찾는 일이야 황실에게 맡기면…….”

헤일리안 대공은 초조함에 거의 미쳐 가는 모습을 보이더니.

“놔, 샤스티아.”

결국 말리는 대공비를 뿌리치고 딸을 찾아 종적을 감추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그리고, 발칵 뒤집어진 것은 황제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2황자 에시메드만 빼돌려 흔적 없이 죽이는 것.

그것이 본래의 의뢰였으나, 정작 들려온 결과는 헤일리안 대공녀 또한 자취를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는 급보였다.

“내가 한 의뢰를 대체 어떻게 들어 처먹은 것이냐. 나는 2황자만 납치하여 암살하라고 했다. 왜 헤일리안 대공녀까지 납치하여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느냔 말이다!”

황제는 끓어오르는 분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