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리고는 의뢰의 완수를 알리러 찾아온 길드의 수장을 향해 불길이 작열하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런.”
얼굴을 모두 가린 검은 천 속에서, 사내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사악-
이내 그에게로 쇄도하던 불길은 검은 장막이 시야를 스침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자신을 향하던 공격을 모두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당장 헤일리안 대공녀를 데려와, 여기서 사지가 불타 죽고 싶지 않다면!”
황제는 분에 날뛰며 윽박질렀다.
“글쎄, 이제야 겨우 손에 넣었는데. 내가 이대로 돌려드리기엔 많이 아쉬워서.”
“……뭐라?”
그러나, 지나치게 평온한 목소리로 돌아온 대답에 황제는 분노보다도 그 문장 속에 담긴 뜻을 향해 의아함을 품었다.
일립스의 수장은 검은 옷자락과 대비되는 새하얀 손을 들어 가슴 부근까지 내려와 얼굴을 전부 가리던 천을 벗어 내렸다.
밤을 닮은 장막이 허공에 물결치고.
창가로 스며든 달빛 아래, 비로소 드러나 보인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마주하던 황제는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부릅뜨고 그를 망연히 응시했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나 건네드려야 할까.”
나른한 중저음의 미성.
핏방울처럼 붉게 물든 입술.
달빛을 그대로 투영할 만큼 새하얀 피부 위로, 그림자를 닮은 짙은 머리카락이 그가 읊조릴 때마다 옅게 흔들렸고.
검날로 베어 낸 듯 서늘한 이목구비 속 공허하게 빛나는 회색 동공이 황제를 직시했다.
“네, 네놈은…… 네놈이, 어째서 이곳에……!”
황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그러쥐며 중얼거렸다.
니샤 왕국의 뒷골목 출신으로, 대륙 곳곳의 암흑가를 지배한다는 잔악한 범죄 길드.
일립스.
그러나 그 수장이라고 여겼던 사내의 정체는-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니샤 왕국의 군주, 리아트였다.
가장 어두운 니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영향을 받아 365일 중 280일이 어두운 낮이며 85일 만이 밝은 낮이라, 그 뜻 자체로 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왕국.
로샨 제국보단 영토가 작으나 보유한 정령사의 수가 백성의 수를 대비하여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했기에, 그 어떤 나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강국이었다.
그리고-
‘어찌하여 그대들은 함께 맹세하지 않는 것이오!’
‘잊으셨습니까? 니샤 왕국은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의 재앙에서도 니샤 왕국의 피해가 가장 적었군.’
‘아무리 재앙에 맞선 전쟁에 참전하였더라도 그대들의 사상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으니 이리하는 것이겠지!’
‘그토록 끔찍했던 재앙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서도 아르카네에게 빌붙는 더러운 기생충.’
‘명예라고는 모르는 추악한 놈들.’
‘네놈들은 결코, 대륙 어느 나라와도 동맹할 수 없을 것이다.’
로샨 제국을 필두로 한 대륙 여느 나라들과 달리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숭배하며.
어둠의 권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나라였다.
그 연유로 대륙 모든 나라의 배척을 받아 그 누구와도 동맹하지 못한 채 고립된 왕국이 되었지만.
어둠의 정령사는 발견 즉시 모조리 사형에 처해 버리는 여타의 나라들과 달리 애초에 사상 자체가 아르카네를 숭배하던 니샤는 어둠의 정령사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 결국 그 어떤 나라도 위협할 수 없는 강국으로 여겨졌다.
“로샨 제국과는 오랜만에 교류하는지라, 잠시 유흥을 좀 즐겨 보았지.”
리아트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 어떻게, 분명 나는…….”
“그래도 이번의 일로 일립스의 수장이 니샤의 왕이라는 좋은 정보를 얻었잖나? 그걸로 만족해.”
“……일립스의 수장이 사실 네놈이었다면, 어찌하여 헤일리안 대공녀를 납치한 것이냐!”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서 다급히 물었다.
그래, 그는 니샤의 왕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원래 의뢰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던 헤일리안 대공녀까지 함께 납치해 버린 리아트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제국이 보유한 정령사를 훔쳐 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는 그만하시고.”
짙은 눈매를 반달처럼 휘며, 리아트는 황제의 말을 끊고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 이유는 알 것 없어.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은 내가 데려갈 것이고, 네가 맡긴 원래 의뢰대로 네 아들은 흔적 없이 처리할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게 나의 권유다.”
“안 된다, 헤일리안 대공녀를 어찌하려는 것이야! 헤일리안 대공은 로샨 제국을 비롯하여 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규격 외 등급의 정령사다, 그의 분노에 니샤가 패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그야말로 남은 미련은 없다는 듯 뒤돌아서던 리아트는, 황제가 다급히 외치는 말들 중 ‘헤일리안 대공’이라는 단어에 멈칫하며.
설핏 고개를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당연히 겁이 나겠지.
강자에게 굴종하며 떨어지는 먹이를 주워 먹는 니샤의 습성은 어디로 가지 않아.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그리며 생각하던 때였다.
“-성가시게 하는군.”
“으윽!”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잔상이 황제의 손목을 관통했다.
뚝- 뚝.
검붉은 핏방울이 낙숫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황제는 극악스러운 고통을 억누르고 손목을 부여잡으며 핏발이 선 눈으로 리아트를 노려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선 리아트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불의 정령왕의 축복도 점점 사라져 나와 겨뤄 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주제에. 적당히 하시지요, 로샨의 황제 폐하.”
그는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수하들과 함께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끄아아아악!!”
홀로 남은 황제는 닥쳐오는 불길함과 치미는 고통에 울분으로 찬 고함을 내질렀다.
* * *
눈앞이 깜깜해진 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마리에트의 따님.’
어떻게, 당신이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으음…….”
눈알이 빠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고통을 삼키며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가 가물가물하여 그 무엇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
한동안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린 뒤에야 시력은 서서히 회복되었으며, 가장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붉은 벽지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양이었다.
방 측면의 모서리마다 양각된 조각은 생경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광경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나는,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내 두 손은 차가운 무언가에 묶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쇠와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수갑이 내 두 손을 구속하고 있었다.
“……납치, 당한 거야?”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뛰는 듯 커다랗게 요동쳤다.
식은땀을 흘리던 나는, 방의 한편에 누워 있는 작은 몸체를 그제야 발견하고 화들짝 몸을 떨며 외쳤다.
“에시메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에시메드에게 다가갔다.
“……으윽.”
“괜찮아? 정신 차려 봐!”
몇 번 정도 그의 이름을 외치자 두 눈을 감고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에시메드의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갔다.
“……이디스?”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되새겨 보면, 에시메드가 무사함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는 안도하다가도 언제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금 무거워진 심경으로 에시메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
에시메드는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천천히 말했다.
“모르겠어, 납치당한 것 같아.”
우리를 납치한 일당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나이아드가 보였던 알 수 없는 분노와, 니샤의 왕족이라는 충격적인 정체.
정령왕의 공격마저 손쉽게 소멸시켰던 그 남자의 힘.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도 듣지 못했잖아.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에시메드와 단둘이 남겨진 저택의 방 같은 공간을 살폈다.
“너는 어쩌다 붙잡힌 거야?”
에시메드는 기억을 되새기는 듯 멍하게 대꾸했다.
“……네가 위험한 것 같아 달려가던 도중,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와 다리를 관통했어.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는데…….”
“나랑 같네.”
정신을 잃기 전, 그 남자는 체내의 마나 흐름을 억제하는 아티팩트라는 말을 했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정령 소환을 하지 못할 거야, 우리는.”
망했다.
나는 낭패감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에시메드가 물었다.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걸까?”
“글쎄. 한 번 시도해 봐. 혹시 모르니까…….”
나는 손을 묶은 수갑을 뒤돌아보며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고요한 침묵만이 지속되던 순간.
에시메드는 이를 부득 갈며 짓씹었다.
“역시나. 다리에 아무런 외상조차 남지 않아 제거할 수도 없는데…… 우리의 몸속에 마나 흐름을 억제하는 아티팩트가 심어진 게 분명해.”
맙소사. 닥쳐오는 절망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언제쯤 다시 정령 소환이 가능해질지 희망할 수조차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리에드가 말할 때 연습이라도 해 놓는 건데…….”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허망하게 사로잡히기 전, 에시메드나 로베릭, 오스발트처럼.
나도.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그들의 권능을 끌어와 구사하는, 상시 소환 상태를 익혀 놓았다면…….
나이아드에게 의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맞서 싸우며 위협에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끔찍한 난관에 처하는 것보다는…….
나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그리운 이들 중 오리에드와 나누었던 대화가 깜깜한 어둠 앞에 환상처럼 펼쳐졌다.
* * *
어째서일까.
에시메드와 로베릭, 오스발트.
원칙적으로 내가 그들보다 재능이 모자란 건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정령을 소환하지 않은 채 나를 축복한 정령의 권능을 사용해 보려고 시도하면 늘 불발로 돌아갔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거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애꿎은 내 두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순간이었다.
[정령의 권능을 사용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바로 옆에서 내 좌절을 지켜보던 오리에드가 한소리했다.
나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안 될 건 또 뭐예요? 저 엄청 대단한 천재라면서요. 그럼 이론적으론 에시메드가 할 수 있는 건 저도 가능한 게 당연하잖아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군.]
오리에드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말했다.
[너보다 타고난 재능의 그릇이 작아도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정령의 권능을 끌어와 쓰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건 왜 그런 것 같나?]
형형한 금안으로 나를 응시하며 오리에드가 꺼낸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새삼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불의 정령왕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황제는 여전히 불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않았던가.
[바로 뼈를 깎는 노력이다.]
마치 계시를 내리듯.
오리에드가 내놓은 답에 나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그게 뭐야.
‘……노력으로 결정되는 거면, 타고난 축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거네요? 그럼 저를 천재라고 부르는 의미가…….’
[정령은 본래 인간이 마음대로 불러내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네가 길다고 불평하는 소환 주문도 정령을 소환해 낼 때 필요한 막대한 양의 기력과 부작용을 최대한 줄여 주기 위한 절차지.]
오리에드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먼 허공을 응시했다.
[너는 네 아비와 로샨 제국의 황제를 경멸하고 혐오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 노력까지 폄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망연히 오리에드의 말을 들었다.
[그들도 시작은 너와 같았다.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는 아무리 강력한 권능이더라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었지. 하나 그들은 수많은 위기와 생사의 기로 속에서 셀 수도 없이 정령을 소환하여 친화도를 한계치까지 끌어 올렸다.]
수많은 위기와 생사의 기로.
셀 수도 없이 정령을 소환하여 친화도를 한계치까지 끌어 올린다…….
그 대목을 듣던 순간, 나는 어째서 에시메드가 그 어린 나이에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도 권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뼈를 깎아 내는 필사의 노력으로 끝내 ‘상시 소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에 이르렀지.]
오리에드는 그의 손을 들어 그와 내가 딛고 선 대지를 가볍게 갈라냈다.
쩌적-
위태로운 균열이 일어나 금방이라도 지반이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순간, 오리에드의 손짓 한 번으로 커다란 균열은 흔적도 없이 메워졌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축복한 정령과 마치 동화된 것처럼 자연을 제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상시 소환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쯤 되면 네가 우리를 소환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득해진 귓가에 오리에드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언제나 빠르게 사라지고 만다. 너도 그들과 같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면 최대한 노력을 하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