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달칵-
“헉!”
상념에 빠져 있던 순간,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일어났구나?”
정신을 잃기 직전, 들었던 낯익은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였다.
나이아드가 말하기를 니샤의 왕족이자, 나와 에시메드를 납치한 일당의 수장!
환한 불빛 아래 서늘한 미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이대는 로베릭과 비슷할까, 그 인성과는 별개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외양을 지닌 로베릭과는 정반대로 퇴폐적인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미남자가 싱긋 웃음을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회색 동공은 정신을 잃기 전과 동일하게 나를 향한 흥미를 내비치고 있었다.
“안녕, 대공녀님.”
그가 말했다.
“…….”
대답하지 않고, 적대적인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는 농담을 건네듯 말했다.
“아니다. 마리에트의 따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
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그런 반응을 기대했던 듯 말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대체 저 납치범…… 정체가 뭐야?
니샤의 왕족인 것도 모자라서…… 마리에트를, 아는 건가?
즐거운 기색으로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 남자를 불안히 응시하며 나는 생각했다.
……찬찬히 되짚어 보니, 저 남자.
부러 나를 자극하려는 듯 계속해서 마리에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살갑기 그지없는 어투로.
나는 마른 입술만 적시다 결심 끝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체가 뭐죠? 왜 우리를 납치한 건가요?”
납치범은 내 질문에 미소를 짙게 그리며 답했다.
“생각해 보니 소개가 늦었군. 나의 이름은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납치범은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
당황스럽게 그를 바라보던 찰나.
“니샤 왕국의 군주다.”
[저것은……. 그렇군. 네놈, 니샤의 왕족이로구나!]
나이아드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경악에 차 입을 벌렸다.
일개 왕족도 아니고, 일국의 왕이나 되는 자가.
대체 어떻게, 무슨 정신머리로 타국의 황자와 대공녀를 납치할 수가 있지?
“…….”
“푸하하하!”
내 표정을 주시하던 사내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폭소했다.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이다.
전쟁이라도 벌일 심산이 아니고서야, 니샤 왕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납치한단 말인가.
이 일에 무슨 내막이 숨겨져 있는 거지?
나는 차마 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잇새를 악물었다.
“음. 보아하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챈 듯, 니샤의 왕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가볍게 흔들었다.
파삭-
시야에 검은 궤적이 언뜻 비친다 싶더니.
“……벽이…….”
나와 에시메드가 앉은 뒤편의 벽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딱 우리보다 머리 하나 더 되는 높이에서 금이 간 벽의 부스러기가 작게 떨어져 내렸다.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많이 봤지? 삭의 권능이다. 이 권능을 사용한다는 것이 바로 니샤의 왕족이라는 반증이지.”
나는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떨림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저런 권능을 지닌 정령 같은 건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런 니샤의 군주께서, 로샨의 2황자와 헤일리안의 대공녀는 왜 납치한 거죠?”
나는 굳은 얼굴을 돌려 리아트를 향해 물었다.
차마 믿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심산인가?
“당돌하구나. 내가 조금만 더 아래로 손을 움직였으면 저렇게 그어지는 건 벽이 아니라 너희의 머리였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살벌한 협박을 읊은 그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2황자부터 설명해 보도록 할까. 네 친부, 로샨 제국의 황제가 내게 직접 너의 암살을 의뢰했다.”
“!”
심장이 멎어 드는 것 같았다.
아연하게 리아트를 바라보던 나는 다급히 에시메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놈이 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넘어가 줄 리가 없지.”
하지만 에시메드는 전혀 충격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 소년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아무렇지 않게 읊조릴 뿐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들었다.
나는 애꿎은 손바닥만 꽉 쥐었다.
“너희 황실 내부에서도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지. 네가 니샤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배척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가엽기는 하구나.”
그야말로 악어의 눈물을 흘리듯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한 리아트는 다시 관심을 내게 돌렸다.
“그리고 우리 대공녀님은…….”
설마, 황제가 나도 같이 치워 버리라고 의뢰한 건가?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리아트를 응시했다.
“황제의 부탁 때문은 아니고, 내가 데려오고 싶어서 납치했어.”
……?
그 대책도 없고 맥락도 없는 개소리에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배 속에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이 자랐구나.”
그리고 이어진 말에 눈을 홉떴다.
착각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너는 나를 처음 보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전에도 너와…… 한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어.”
마리에트를 알고 있었다.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직접 만나 무언가의 관계를 쌓았던 것이 분명했다.
“대체, 당신이 어머니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작에서 니샤라는 국가는 단 한 번, 이름과 그 내력만 언급되었을 뿐 아무런 비중도 차지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로샨 제국은 니샤와 적대 관계에 속한 국가였으니까.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하는 니샤와, 어둠의 정령왕을 가장 적대했던 불의 정령왕이 축복한 로샨.
그 둘은 유구한 역사 속 어느 순간에도 적대적이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고 유프스 백작이 건네준 교재에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 로샨의 공녀였던 마리에트가 니샤의 왕족이었을 리아트를 어떻게 만났단 말인가.
점차 드러날수록 믿을 수 없는 과거의 윤곽에 두려움마저 일던 순간.
리아트는 입술을 파르르 떠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이전의 경쾌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이 가라앉은 기색으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무기질적인 회색 눈은 과거를 헤집는 듯했다.
“마리에트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 * *
하늘에서 끝없는 비가 쏟아졌다.
낡은 울타리가 쳐진 시골길은 하늘이 울부짖듯이 대지 위에 부어내리는 비를 흘려보내지 못해 곳곳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콰앙-!
“너.”
티 한 점 없던 새하얀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로베릭은 사납게 일그러진 기색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네놈이라면 이디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겠지. 어서 말해. 당장.”
“…….”
흰색의 로브를 눌러쓴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간 응시하던 눈길을 돌려 준비하던 짐을 마저 챙긴 후 로베릭이 막아선 문가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비켜.”
차가운 목소리가 명령하듯 읊조렸다.
“하!”
로베릭은 날카로운 숨을 토해 내며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추악한 금기나 저지르던 망한 가문의 핏줄 주제에. 더 이상 네놈의 방자함을 묵인해 줄 주인도 없거늘, 여전히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지금 당장에라도 나는 네놈의 목을 거둘 수 있…….”
“제 자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아비에게 알려 줄 것은 없다.”
로베릭의 목소리가 이어지던 순간.
로브 속에 가려졌던 새카만 눈동자가 환한 전구의 빛 아래 드러나 로베릭을 섬뜩하게 응시했다.
“!”
로베릭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로베릭을 향해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비켜선 로베릭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때.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스치듯 말했다.
“마리에트 님께서 남기셨던 유언 때문에 네 녀석에게 이디스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보내지 말 것을.”
“무슨……!”
로베릭은 분노한 기색으로 멀어져 가는 하얀 인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증오를 담아 부르짖었다.
“마인하르트 아스트라페!!”
그 남자, 마인하르트는 로베릭의 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개가 자욱한 길 너머 자취를 감추었다.
-外. 바다와 그림자
대륙 모든 정령사들이 꿈에 그리는 학회, 리테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수천수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고.
정령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며, 어떠한 대륙의 패자도 위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중립지역이었다.
또한 앞으로의 전망이 출중한 어린 정령사들이 대륙 각 나라에서 모여 대등한 인재들과 경합을 벌이고 열띤 토론을 벌이며 서로의 성장을 자극하는 훌륭한 배움의 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유용한 기능들은-
“꺼져, 이 기생충!”
니샤의 2왕자, 리아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
몸을 산 채로 태워 버릴 심산이었는지.
정확히 얼굴을 노리고 달려든 불길을 겨우 막아 낸 리아트는 침묵했다.
전부는 막아 내지 못했기에 리아트의 손등은 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질 텐데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 상흔을 내려다보는 리아트를 향해 그를 둘러싼 소년들이 외쳤다.
“메카일라 의장도 정도가 심하시지. 어떻게 더러운 니샤의 왕자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신 건가?”
“어둠의 정령사도 우리와 같은 정령사라고? 말도 안 돼. 아르카네에게 들러붙어 평생을 기생하는 버러지 따위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재앙을 직접 물리치셨던 영웅께서 이러시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야, 너 빨리 꺼져. 안 그러면 이 정도로 안 끝나. ……여기 모인 정령사들 모두, 수십 년 전 벌어졌던 대학살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라고.”
쿡.
가장 선두에 나서 살벌한 표정을 한 소년이 리아트의 이마를 누르며 윽박질렀다.
“아무리 재앙에 맞서 함께 싸웠다 한들, 결국 어둠의 정령사를 감싸 안은 배신자 따위가 리테라에 발을 들여? 솔직히, 네가 여기에 있는 거 죄책감도 안 드냐?”
뒤의 소년들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앞에 선 소년은 상대의 자존심을 마음껏 깎아내리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회색 눈동자가 섬뜩한 살기로 번뜩이는 것을.
리아트가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이었다.
“그 손, 안 치워?”
또렷한 목소리가 난입했다.
리아트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마, 마리에트!”
리아트를 몰아넣고 마음껏 괴롭히던 소년들이 당황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가장 먼저 눈길에 들어온 것은 차분한 하늘빛의 드레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낭창한 허리께까지 내려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가에서 들어온 햇살을 받아 우아하게 빛나는 얼굴은 날카로운 지성과 소녀의 앳된 티가 공존하고 있었다.
영롱한 황금빛을 머금은 동공이 으슥한 복도의 상황을 훑었다.
이내 상황 파악을 끝마친 듯,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불을 사용했다 이거지.”
“아, 잠시만! 마리에트!!”
콰아아앙-!
간절히 외치던 소년들의 목소리는 거친 물살 속에 모조리 파묻혔다.
물기가 사라진 복도의 바닥에 처참한 모습이 된 소년들이 엎어진 채 드러나 보였다.
“으……. 으으으윽…….”
“여기서 익사까지 체험하기 싫으면.”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고요히 울리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서늘한 목소리가 낮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