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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0)화 (41/141)

<40화>

“으, 으아아악!!”

소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마리에트는 고개를 돌려 리아트를 응시했다.

“네가 니샤의 2왕자구나?”

“…….”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리에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까맣게 타들어 간 리아트의 손을 붙들어 올렸다.

“……치워.”

목울대를 으르렁거리며, 살벌한 목소리가 소년에게서 되돌아왔지만.

“심하게 탔네.”

마리에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가만히 리아트의 손등을 쓸었다.

고운 손이 지나간 자리에 부드러운 물방울이 꽃망울처럼 피어나 환부를 깨끗이 씻어 냈다.

“내가 치유 속성은 없어서. 양호실에 가면 흉터 없이 치유해 줄 거야.”

“…….”

분명 도움을 받았음에도, 리아트는 형형한 살기가 서린 눈빛으로 마리에트를 응시했다.

한동안 리아트의 시선을 마주하던 마리에트는 리아트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참, 가기 전에 한마디 하고 싶은데.”

그 순간 마리에트는 걸음을 멈추며, 리아트를 뒤돌아보고 말했다.

“여긴 사방이 네 적이야. 그런데 네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그런 반응을 보이면-”

차가운 듯, 다정한 듯.

알 수 없는 오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일주일 뒤에 변사체로 발견될걸.”

“!”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시끄러운 일 없이 원만하게 지내면 서로에게 좋잖아?”

고아한 입매에 언뜻 미소가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리아트는 놀란 표정을 지울 생각도 못 하고 멀어지는 가녀린 인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웠다.

리아트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 * *

리아트가 집단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것은 첫 일주일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리아트가 마냥 어둠의 정령왕만 추앙하는 신도도 아니고, 또한 자기들이 함부로 대했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만큼의 강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리에트라는 이상한 여자애가 한 말에 오기가 생긴 리아트가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유순한 태도를 취한 것도 일조했지만.

“우주가 먼저였나, 어둠이 먼저였나. 그에 대한 논제에 대한 제 의견은…….”

“당연히 어둠이 먼저였다고 사료됩니다.”

그리고 리테라에서 열리는 토론회.

리아트는 토론에 참여할 때마다, 마리에트와 쟁쟁히 대립하고는 했다.

“이 우주는 태고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어둠만이 들어차 있었을 뿐. 그러니 아르카네는 뒤늦게 탄생한 자연계 정령왕들과 결이 다른, 이를테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전능한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학구열로선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던 마리에트 또한 지지 않았다.

“글쎄요.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높은 차원. 어둠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어둠마저 품었던 무언가의 존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리아트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건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황된 주장 아닙니까?”

“허황되지만은 않지요. 예를 들어, 정령왕들은 이상하게도 탄생 직후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꼭 누군가가 일부러 지워 버린 것처럼 말이죠. 세상에 알려진 대로 자연물이 인격체로서 스스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말하는 시절에 다다라도 빛을 잃지 않을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금안이 연보랏빛 장막에 살포시 가려지며.

“무언가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탄생시킨 존재처럼 말이지요.”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것이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닌가?

리아트는 턱을 악물며 생각했다.

그 시절, 리테라의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는 리아트와 마리에트의 토론이었다.

리아트는 그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나타나서 그와 대립하고야 마는 마리에트를 극도로 혐오해 마지않았다.

상반된 주장만 펼치지 않는다면, 이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리아트는 마리에트 또한 어둠의 정령을 혐오하기에 자신과 대립한다고 여기고 더없이 불쾌해하였다.

“저, 바스테반 공작 영애. 혹시 시간이 되시면…….”

“마리에트 영애! 지난번 도움을 주셨던 과제에 대한 답례로…….”

마리에트는 리아트와 달리 주위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그 소녀는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배척하지 않는 니샤의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장과 늙은 의원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리아트와는 정반대였다.

그리하여 꼭꼭 쌓여 가는 미움을 풀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리아트는 홀로 고립된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크아아아악!]

리테라의 결계를 깨부수고, 북부 암흑 지대의 괴물 포르텐이 침입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아아아악!”

“살려, 살려 주세요-! 꺄아아악!”

하필이면 바람의 대정령사인 의장을 비롯한 최고위 의원들이 타국을 순방하던 때 벌어진 일이었다.

정령왕 급이 아닌, 상위 정령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는 어둠이 뱉어 낸 괴물을 처치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어서 피하십시오!”

“도망쳐야 삽니다, 어서요!”

각국에서 모여든 귀한 신분의 자제들은 리테라의 곳곳에 숨어들거나, 아예 리테라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 시도를 한 이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괴물의 입에 들어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어, 어머니…… 흐윽!”

쉬익-!

“어……?”

“방해되니까 꺼져.”

그러던 어느 순간.

괴물의 기괴한 이빨이 코앞까지 닥쳐와, 눈물만 흘리던 소녀의 앞으로 검은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키에에엑-!]

“빨리 꺼지라고 했잖아!”

검붉은 체액을 흩뿌리며 괴성을 지르는 괴물과, 그 괴물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

리아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소녀는 다급히 뛰쳐갔다.

“…….”

리아트는 몸통의 일부가 날아가긴 했으나 아직도 쌩쌩한 괴물을 응시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흘깃 내려다본 손은 이미 검게 물들며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금만 범위를 늘리면-”

콰앙-!

“이렇게 된다니까-!”

폭풍의 정령, 스트로펠의 힘을 빌려 일으킨 거센 돌풍이 포르텐을 벽에 내다 꽂았다.

그러나 스트로펠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리아트는 잇새를 악물며, ‘그 권능’을 사용했다.

다시 한번 나타난 검은 궤적이 포르텐의 몸을 양단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체액이 흩날렸다.

분명 치명상을 입혔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쿠아아악-!!]

예기치 못하게 뻗어온,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촉수가 리아트를 거칠게 내던졌다.

콰앙-!

“큭…….”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고통에 리아트는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든 두 손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리아트는 시야에 언뜻 비치는 새하얀 벽의 파편에 스며든 자신의 피를 발견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니샤를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나라, 우리의 민족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만 있다면. 빛과 어둠이라는 신념도, 우리 개인의 인생과 목숨도. 그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리아트, 나는 이렇게 먼저 가지만…… 부디 너만은 살아남아라. 조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왕좌를, 이 니샤를 지켜 주렴.’

“형님…….”

점점 아득해지는 시야로 과거의 편린이 튀어나와 정신을 잠식했다.

형님께서 살아계셨어야 했습니다.

저는 형님처럼 막대한 양의 권능을 감당해 낼 수 없단 말입니다…….

[크아아아악!]

바로 코앞까지 괴물의 아가리가 닥쳐왔다.

이렇게 숨이 끊어지는 걸까.

형님처럼,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이토록 허무하게.

“정신 차려.”

귓가에 파고든 생경한 목소리에 리아트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 순간 보인 모습은…….

“마리에트?”

“와, 날 이름으로 불렀네. 그거 알아? 네가 날 이름으로 부르는 거 이번이 처음이야.”

몽롱하던 것도 잠시, 무감정하면서도 할 소리는 다 하는 그 낯익은 목소리에 없던 정신도 번쩍 드는 듯했다.

“잠시만, 지금 포르텐이…….”

“해결됐어.”

뭐?

리아트는 눈을 부릅뜨고 마리에트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에트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갯짓했다.

쿠과아앙-!

[추악한 어둠이 뱉어냈으나 너 또한 생명이다. 가엽게도…… 네가 다른 생명을 해쳤으므로 자비를 내려 줄 수는 없구나. 위험하니 더는 다가오지 말거라, 마리에트.]

외관으로 보아 물의 정령왕임이 분명한 이가 물 한 방울 없던 리테라의 하늘에 거칠게 요동치는 파도를 불러와 포르텐을 압도하고 있었다.

리아트는 놀람 반, 허탈함 반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모두가 범접하지 못하는 이 고귀한 영애는 위대한 정령왕의 축복까지 받았다.

지혜의 정령왕이 그녀의 영혼을 축복했고, 물의 정령왕은 그녀의 육신을 지킨다.

……내게도, 우리 니샤의 왕족에게도 저런 축복이 주어졌더라면.

이런 끔찍한 대가를 바쳐 가며 아르카네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런데 너, 손이 왜 그래?”

“!”

아뿔싸, 리아트는 황급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괴사가 진행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다급히 숨겨 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너희 니샤 왕족들. 희한한 어둠 속성의 권능을 사용했지.”

마리에트의 말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설마 이런 리스크를 감당하며 끌어다 쓰는 거니? 산 채로 살이 괴사되면서?”

“……닥쳐.”

더 이상 들키면 안 된다.

리아트는 잇새를 악물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두통으로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나.

“-아니, 나는 확실히 알아야겠어.”

“야!”

확, 마리에트가 리아트의 손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바닥에 주저앉은 리아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명을 구해 준 대가로 말해 봐. 대체 너희 니샤의 왕족들은 무슨 대가를 치르며 ‘삭’이라는 권능을 사용하는 건지.”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마리에트는 담담히 대꾸했다.

“혹시 비밀이 드러날까 봐 그러는 거라면 이그니스의 이름에 대고 맹세할게. 결코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어.”

“그게 아니라!”

더 이상은 한계였다.

리아트는 버럭 외쳤다.

약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에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아트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짓씹듯 말했다.

“네가, 어둠 속성을 타고난 나를 혐오하는 걸…… 모를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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