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는 생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벌레, 그 정도로 취급할까요?’
‘그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우리 인간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둠 속성의 정령사들은 차라리 타고난 힘을 봉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체스의 말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
“같잖은 맹세 따위 집어치워. 나를 도와준 것도 네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였잖아. 어둠의 정령왕은 인간을 모조리 말살시키길 원하는 가장 지독한 악이라는 네 가설의 가장 분명한 증거라 생각하며!”
리아트는 숨을 헐떡이며 가장 내밀한 속내를 여과 없이 쏟아 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적대하지 않을 수 있지? 아무리 너는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내게 호의를 건넸다고 해도, 그 본심은 호의가 아니었잖아. 경멸과 약간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일 뿐이었-”
“아, 미안한데. 개소리 좀 그만 닥쳐 줄래?”
……?
리아트는 벙찐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마리에트는 무언가 안쓰러운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그런 착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데…… 나는 어둠의 정령들을 싫어할 뿐이지, 어둠 속성을 타고난 정령사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리아트의 표정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마리에트는 그런 리아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나는, 너희가 가엾다고 생각해.”
돌처럼 굳은 것 같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말을 내뱉었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둠의 정령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야. 자, 이걸 봐.”
마리에트의 잠잠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는 희고 고운 손가락을 들어 리아트의 팔을 가리켰다.
검게 괴사된 피부.
“자기가 축복한 인간들에게도 이딴 식으로 고통을 안겨 주며 농락하는 게, 역겨워.”
으득-
언제나 차가울 정도로 평온하고 이성적이던 소녀가 일순 진심 어린 분노를 내비치며 조용히 읊조렸다.
“저열하기 짝이 없다고.”
리아트는 마리에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메아리치는 비명과 나이아드와 포르텐이 벌이는 전투,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으로 사위가 어지러웠건만.
어째서일까.
싫어하지 않는다.
소녀가 그렇게 내뱉은 순간, 모든 소란이 잠든 듯 고요해져서.
막막하리만큼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 오직 눈앞의 소녀와 그만이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말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너를 결코 싫어하지 않고 너희 나라를 혐오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야.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려면 어떡하겠어. 어둠의 정령왕이든 뭐든 붙들어야 했을 것 아니야.”
마리에트는 제 옷자락을 툭툭 털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굳이 그 땅에 터를 마련한 너희 시조의 선택은 이해 가지 않는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가를 온전히 치르기로 결심한 너희에게, 내가…….”
때마침 나이아드가 날뛰던 포르텐의 숨통을 거두었다.
위기가 물러나고, 소강상태를 맞이한 광경을 둘러보던 마리에트는 여전히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아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팔에 대한 거,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에게까지 가시 세우지는 마.”
“왜…….”
리아트는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여 물었다.
“왜, 이러는 건데…….”
그 답은 이미 직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정.
가엾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
하지만 니샤의 국민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리아트에게 너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해 준 이가 없었다.
……그가 가엾다고 이야기했던 이도 없었다.
그러한데.
“말했잖아.”
완벽한 타인에 불과한 너는, 어째서.
“가엾다고.”
차마 말끝을 맺지 못하는 소년을 향해 마리에트는 잠잠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때와 변함없는 무심한 낯빛으로 건네어진 말은, 왠지 모르게 다정한 온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마냥 내버려 둘 수가 없네.”
리아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동안, 혼자서 남몰래 갈무리해 오던 감정을 차곡히 담아낸 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멍하니 감당할 따름이었다.
* * *
그래서였을까.
끝도 없이 깊은 바다는, 내 추악하고 애처로운 그림자조차 모두 포용해 줄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워 보여서.
그래서 나는 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가.
* * *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지점을 묻는다면 아마 리아트는 그날의 대화를 답할 것이다.
“마리에트.”
마리에트를 향하던 모든 적의와 열등감은 눈 녹듯 녹아내려서 그조차 당황할 만큼 더 이상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마음을 온통 채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가늠할 수도 없고.
그렇게 다정하지도, 이전처럼 매몰차지도 못한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며 쭈뼛쭈뼛 말을 건네면.
“그래. 좀 늦었네, 리아트.”
너무도 차가워서 손끝 하나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보이던 소녀는 곧잘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설픈 물음에 답해 주곤 했다.
그런 날이면, 리아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침상에 누운 채 활짝 열어 둔 창가 너머로 비치는 검게 물든 하늘.
가냘픈 초승달의 빛.
휘날리는 연한 백색 커튼 자락.
숨소리만이 오롯이 울리는 고요한 사위.
“마리에트를 좋아하는 건가?”
한참의 사색 끝에서 리아트는 문득 깨달았다.
그는,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는,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이 좋았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목석같다며 지적하곤 했던 매사에 무심한 모습은 그에게 평온함을 선사했다.
고작해야 계집 주제에 지식을 과하게 갈망한다는 일각의 비난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총명하기에 평범한 이들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리아트의 특이함을 이해해 주었으니까.
아, 그래.
“……이게 좋아한다는 기분이구나…….”
그가 마리에트를 향해 품은 감정이란 처음으로 자신을 동정해 준 타인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으나…….
이 또한 연정이라면 연정이었다.
“-마리에트!”
그러나 간신히 피어난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코 보답받지 못할 운명을 짊어져야만 했다.
“……로베릭?”
마리에트에게는 이미 미래를 맹세한 약혼자가 있었으므로.
그 사실이 리아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 * *
차라리 그저 이름뿐인 약혼자였다면 조금이나마 나았을까?
네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가문의 이해관계와 지위에 어울리는 상대로 여겼을 뿐이었다면…….
* * *
리아트가 로베릭을 처음으로 마주 하게 된 것은 강론이 끝나고 동관을 나와 마리에트와 함께 정원의 오솔길을 걸어가던 때 일어난 일이었다.
“-마리에트!”
유달리 청아하고 미려한 목소리가 허공에 드높이 울려 퍼지며 마리에트의 이름을 외쳤다.
리아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이름 모를 남자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분명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였다.
그러나, 그 시선.
공허하고 음울한 색을 머금은 자신과는 달리, 영롱할 만큼 찬연히 반짝이는 적안을 마주한 순간 리아트는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설마.
리아트는 마리에트를 내려다보았다.
곧 모든 표정이 그의 낯빛에서 사라졌다.
마리에트가, 그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에게 줄곧 지어 주던 미소와는 달랐다.
평온하고 이성적인 낯, 그 위로 떠오르던 실낱같은 미소.
그러나, 지금 마리에트의 그린 듯 아름다운 낯 위로 떠오른 감정은…….
“미안, 리아트. 먼저 돌아가 있어.”
풋풋한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우아한 낯빛.
그 나이대 소녀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것.
리아트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순수한 기쁨으로 빚어진 미소.
탁-
“……리아트?”
리아트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마리에트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야?”
리아트는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별빛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떨리는 손을 그러쥐었다.
그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제발 아니기만을 바랐는데.
“내 약혼자. 지난번에 말했었지?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그런데 리아트, 미안하지만 나중에 이야기하자. 쟤 은근 성격이 급하거든.”
마리에트는 리아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낸 뒤 사뿐히 풀잎을 지르밟으며 떠나갔다.
리아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목이 탔다.
“…….”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챙그랑-
리아트는 애꿎은 물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산산이 조각나 무참히 버려진 광경이 회색 눈동자에 오롯이 비쳤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
텅 빈 목소리가 오직 저만이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가슴을 아프게 파고드는 낯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 * *
“좋아해.”
미칠 것 같은 불안함은 리아트의 인내심을 흐렸다.
그날.
신월이 하늘의 끝자락에 걸리던 날.
리아트는 결국 애타게 품어 왔던 마음을 토로했다.
“……너에게는 약혼 상대가 있으니까, 참아 보려고 했는데. 정말 갖은 애를 썼는데…….”
소년은 붉게 달아오른 눈매를 애써 휘어 웃음 지으며 속삭였다.
“안 되더라. 내가 내 생각보다도 더……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리아트.”
마리에트는 그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듯한 동요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망설이며 조용히 흘러나온 소녀의 속삭임에 담긴 뜻은 너무나도 명확하였기에.
“……알겠어.”
리아트는 사랑하는 소녀의 가냘픈 어깨를 붙들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림자 속에 제 얼굴을 감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 알고 있어.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달의 뒷면을 닮은 회색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리아트와 마리에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박제된 것처럼 머물러 있었다.
* * *
한 해가 흘렀다.
리아트는 예정대로 리테라를 떠나 니샤로 돌아왔다.
반년 전, 마리에트도 로샨 제국으로 되돌아간 터였으므로 더 이상 그 땅에 남은 미련은 없었다.
귀국 이후 한동안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죽은 1왕자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 리아트는 더 이상 소년으로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귀찮게.”
푸걱-!
니샤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곳곳에 넘쳐 났기에, 어느새 두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히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
하지만 그토록 무감각한 나날들 속에서도 마리에트와의 기억은 모든 찰나의 순간을 사로잡듯이 떠올랐다.
권태에 잠식되어 가는 정신을 수렁에서 건져 내어 잠시 동안 희미하게나마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게 해 주는, 더없이 소중한 추억.
그래, 그랬는데.
“……뭐?”
니샤로 되돌아온 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다시, 말해.”
마리에트가 귀족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는 소식이 리아트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