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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2)화 (43/141)

<42화>

바스테반 공녀로서의 작위뿐만 아니라 그 아비인 위대한 영웅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의 모든 재산과 작위를 몰수당했으며, 이에 따라 아예 바스테반이라는 가문 자체가 몰락했다.

그리고 마리에트는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성도에서 추방당해 후미진 장원의 가장 한미한 마을에 유폐되었다.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추방되었단 말이냐!”

감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리아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 전하!”

리아트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수하의 목을 틀어쥐며 원인을 물었다.

그리하여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마리에트의 약혼자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 마리에트와 그녀의 가문을 배신하고 평민 출신 과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치욕스러운 배신에 분노한 마리에트는 헤일리안과 그 과부를 상대로 ‘악랄한’ 보복을 가했고……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은 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개만도 못한 새끼가!”

쾅-!

리아트는 벌겋게 충혈된 눈자위로 허공에 환시처럼 떠오르는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형상을 노려보며 증오를 토해 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포기했는데.

오직 그녀가 너를,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오직 너만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는데…….

“……로샨 제국으로 가겠다.”

“전하!”

더 이상 아무것도 그의 발길을 막아설 수 없었다.

리아트는 마리에트가 추방되었다는 땅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끼익-

자그마한 벽돌집의 문이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

부른 배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푸석하게 메마른 연보랏빛 머릿결을 바람에 휘날리며.

몇 해 전보다 한층 더 무심해진 낯을 한 여인이 손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너.”

형형한 금빛 눈동자가 마침내 황량한 길 위에 선 남자를 발견했다.

여인의 낯 위로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마리에트.”

리아트는 꿈결에서도 잊을 수 없던 여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울듯이 웃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리는 금빛 안광을 응시하던 회색 눈동자가 곧 그녀의 부른 배를 담았다.

산달까지는 몇 달 정도가 남았을까.

저 속에 든 것은 분명 마리에트를 처참히 배신하고 이토록 초라하게 내버린 자의 핏줄일 터였다.

리아트는 형용할 수 없이 몰려드는 감정에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힘주어 말아쥐었다.

“그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였는지 알게 되었어.”

그는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처참한 심경을 감추었다.

“그래서 찾아온 거야.”

마리에트는 미처 숨겨지지 않는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트. 너는 이곳에 와선 안 돼.”

“어째서?”

리아트는 태연한 낯으로 물었다.

“우리가 몇 년 만에 만나는지 알아? 여전히 매정하네. 인사 한번 해 주지 않다니.”

마리에트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들어오란 말은 하지 못하겠어. 리아트, 로샨 제국과 니샤는 오랜 적국이야. 그런 네가 추방된 귀족인 나와 왕래한다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서로에게 좋을 게…….”

“그만해, 마리에트.”

리아트가 마리에트의 말을 잘랐다.

마리에트는 애써 피했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 돌렸다.

“로샨 제국, 추방된 귀족.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들끓는 속내를 억누른 채, 리아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내 그는 거칠 것 없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래전,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소녀였던 여인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나와 함께 가자, 마리에트.”

“!”

마리에트는 떨리는 시선으로 리아트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잖아. 마리에트, 나는 너를 사랑해. ……이 빌어먹을 감정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괴로움으로 이끌곤 하지.”

리아트는 애틋하게 떨리는 눈길로 마리에트를 응시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을 듯 말듯, 더는 다가서지 못할 거리에 멈추어 허공에 머물렀다.

“그러니 나를 이용해.”

모든 감정을 위태롭게 삼킨 회안이 시선을 내려 마리에트가 품은 생명을 응시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네가 나를 선택하는 순간 네 아이의 아버지도 내가 될 테니.”

진심이었다.

리아트는 진실로, 마리에트의 자식이라면 그 아비가 누가 되었든.

……설사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어도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너 또한 모든 것을 잃은 채 비참히 연명하는 것은 결코 원치 않겠지. 그러니, 마리에트.”

리아트는 진심을 담아 설득했다.

“……그만해.”

그러나 리아트의 가슴팍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와 그를 가만히 미는 손길은 거절의 뜻을 담고 있었다.

리아트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서는 마리에트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째서?”

아무런 동요를 내비치지 않는 낯이었으나,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깊은 비틀림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왜? 내가 그렇게나 싫어? 역시 너도 내가 아무리 가엾다 한들 아르카네에게 기생하는 족속 따위는 싫다는 건가?”

“리아트.”

마리에트는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무감하게 가라앉은 리아트의 회안이 마리에트를 담았다.

“그때, 너에게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었어.”

그토록 그리워했던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나는 어둠의 정령사를 혐오하지 않아. 그렇지만 한편으로- 너희 니샤의 왕족들은, 그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너희가 살아남기 위해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해 왔어.”

마리에트는 부푼 배를 가만히 쓸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 행동은 이해하지만…… 그것 때문에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없게 돼.”

리아트는 사납게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어째서? 살기 위해 아르카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커다란 문제지? 왜……!”

“그건, 내 삶을 부정하는 행동이니까.”

리아트는 황망히 숨을 멈추었다.

마리에트는 미약한 미소를 머금고 리아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때까지 믿어 오고, 살아오며, 투쟁해 왔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 ……함께하지 않을 거야.”

연민은 진심이었으나, 명백한 죄악은 덮어 둘 수 없다.

“미안해. 리아트. 아마…… 이게 우리가 살아서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겠지.”

창백한 낯에 강고한 아름다움을 짊어진 마리에트는 리아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분명한 대답 앞에서 리아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바다에게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빛으로 비추어도 한 점 얼룩 없이 언제나 짙푸르고 아름다울 뿐이지만 바다는 그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

평소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심연의 장막 아래 숨겨 놓는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할 뿐이다.

너는 그림자 속에 담아 둔 나의 상처를 처음으로 들여다보아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너의 그림자가 되고 싶었다.

네 모든 상처와 외로움을 끌어안고 네가 언제든 주저앉아 숨을 토해 낼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네가 들러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가…… 내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둠의 정령사를 혐오하지 않아. 그렇지만 한편으로- 너희 니샤의 왕족들은, 그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너희가 살아남기 위해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해 왔어.’

‘그것 때문에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없게 돼. 그건, 내 삶을 부정하는 행동이니까.’

‘내가 이때까지 믿어 오고, 살아오며, 투쟁해 왔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 ……함께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바다는 끝내 그림자에 몸을 누이기를 거부한 채 자신의 짙푸름을 지키기를 선택하였고.

갈 곳을 잃은 그림자는 영원히 방황하게 되었다.

* * *

마리에트가 죽었다.

리아트는 니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리아트는 단 한순간도 마리에트를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미련이 그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운 채 머무르든 간에, 그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그에게 더 이상의 허락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냉혹하게 얼어붙어, 오직 그의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삶만이 주어졌을 뿐.

그토록 공허했던 굴레 속으로 마리에트의 딸이라는 아이가 들어온 것은 퍽 놀라운 일이었다.

“……마리에트의 숨겨진 딸이 유폐된 황자와 함께 로샨을 뒤집어엎었다?”

맹랑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온 대륙을 발칵 뒤집어엎은 소식을 접하고 리아트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읊조렸다.

마리에트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

동시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딸.

그녀를 닮아 강인하고 비범한 아이일까.

아니면 제 아비를 닮아 아둔하기 그지없는 아이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로샨 제국의 황제가 길드에 접촉을 요구해 왔습니다.”

“로샨이? 무슨 일로?”

“……2황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를 암살해 달라는군요.”

아, 어찌나 우스운가.

뒤이어 이어진 일련의 일에 리아트는 비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에트. 네가 그토록 숭배했던 고귀한 정의를 상징하는 로샨의 황제는 이토록 추악하다.

제 아들을 죽여달라 적국의 왕에게 직접 비는 꼴이라니.

또한 운명의 안배일까, 2황자가 너의 딸과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리테라로 향할 때 일을 치르라고 들이밀지 않나.

“수락하도록 하지. 준비해.”

리아트는 짙은 미소를 그리며 황제의 서신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전하! 로샨의 2황자를 죽이는 일은 후폭풍이-”

“상관없다. 대신 작은 장난은 하나 쳐도 되겠지.”

마리에트의 딸이 보고 싶었다.

혹여 그녀를 닮은 모습을 다시 이 두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솟구치는 호기심과 미처 버리지 못한 미망이 그의 발길을 이끌었다.

“-에시메드!!”

그리하여 죽은 듯 잠든 로샨의 2황자를 끌어안은 채, 비로소 리아트는 마주했다.

하얗게 질린 작은 얼굴.

이름을 알지 못해도 한눈에 귀한 신분임을 깨달을 수 있을 고운 외양.

비록 그 영롱한 눈빛은 마리에트의 것이 아닌 색채로 물들어 있었고.

동시에 고요한 숲을 가득 채우는 파도 소리를 등진 채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칼은 추억 속 지워 낼 수 없이 각인된 모습을 환시처럼 연상시켜서.

“……당신, 대체 누구죠? 자객인가요?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렇게…….”

제 아비의 흔적을 분명히 드러내는 작은 아이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냉정하게 물음을 던지는 행동은 분명 마리에트를 닮아 있었다.

“글쎄. 그 얼굴로 내가 누구인지 물으니 감회가 남다른데.”

리아트는 차오르는 환희를 이겨 내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설사 그 아비가 누구라 한들, 너는 분명한 마리에트의 딸이로구나.

“……마리에트와는 리테라에서 처음 만났지. 그곳에서 내가 반했어.”

그리하여, 리아트는 모든 회상에서 빠져나오며 가볍게 말을 끝맺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인 듯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한 아이를 애틋하게 내려다보며 그는 웃었다.

“내가 너를 데려온 이유를 물었지? 단 하나다.”

그리고 느른히 몸을 일으키며 마침내 그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마리에트의 딸인 너마저 제국이 앗아 가게 두기는 싫었으니까.”

마리에트는 죽었다.

끝내 그를 거부하고, 그녀를 배신한 남자의 딸을 낳고서 차가운 죽음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녀가 떠나고 그를 집어삼킨 것은 오직 공허였다.

그 누구도 그를 구원해 줄 수 없었다.

고독한 그림자에 파묻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죽지 못해 살아가야만 하는 덧없는 운명.

그러나 마리에트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을 마주한 순간 잿더미가 되어 버렸던 마음에 하나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마리에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

그 하나, 오직 강한 열망만이 그의 생명을 다시금 되살렸다.

“그러니 너는 나와 함께해야 해.”

애처로이 흔들리는 붉은 안광을 내려다보며 리아트는 기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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