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3. 밤으로부터의 긴 여로
“……네?”
저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뭔가 기나긴 독백이 지나간 것 같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마리에트의 스토커로 추정되는 남자가 결정 짓듯 내뱉은 말에 나는 충격에 잠겨 멍하니 되물었다.
니샤의 왕이 원작의 악녀를 사랑했다는 것부터가 믿기지 않는데, 이게 무슨.
“하렘에 여자를 들여 자손을 볼 생각도 없었으니 니샤의 왕위는 네게 물려주마. 니샤는 공식적인 대외 교류 없는 폐쇄적인 국가이니 눈동자 색이라던가…… 머리카락 색만 바꾼다면 네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리아트는 제 마음대로 지껄이며 결론을 내렸다.
“너도 네 친부라는 새끼의 곁에서 사는 건 싫을 것 아니야. 그렇지?”
“…….”
그리고 저 말은 사실이라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럼 이제- 원래 의뢰대로 처리해 볼까.”
뭐?!
리아트가 지나가듯 흘린 말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촤락-
“으윽!”
“에시메드!”
눈 깜빡할 새 날아온 검은 올가미가 에시메드의 목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휘어 감았다.
“처리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리아트는 아무렇지 않게 읊조리며 그대로 에시메드의 목에 올가미를 건 채 작은 아이를 끌고 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마리에트를 사랑했든 안 했든 간에 저 인간은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해!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간신히 일어서 다급하게 리아트의 앞을 막아섰다.
“왜 그러지?”
리아트는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물어?
나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에시메드를 응시하다 리아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제야 리아트는 알겠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로샨 제국 2황자와의 약혼 때문에 이러는 건가?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 혼약은 더 이상 유지할 필요 없으니까. 어차피 너도 진심이 아니었을 테니.”
그는 매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대신 치워 주도록 하지.”
“상관있어요!”
미쳤나!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제정신인 걸까?
어떻게 어린아이를 죽이겠다는 말을 이토록 태연하게 읊는 거지?
설사 이 남자가 과거에 내 어머니를 절절하게 사랑했건 말건, 제멋대로 나를 납치해 끌고 와서는 자기 마음대로 내 처우를 결정짓지를 않나.
내 의견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묻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취해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참으로, 오만하고 경우 없는 무례한 작자가 아닌가.
“에시메드는 제 친구이자 정령왕들이 정해 준 반려자예요. 당신을 따라갈 생각은 애초에 단 한 치도 없었지만, 만약 여기서 당신이 에시메드를 죽인다면 설사 창문 아래로 몸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나는 강고한 어조로 외쳤다.
그러자 리아트의 가라앉았던 회안이 얕게 요동쳤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껴졌던 직감.
죽음과 가까운 자, 그 특유의 서늘하고 비릿한 살기.
리아트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자가 아니었다.
보통의 언사로는 내 뜻을 전한다 한들 이해는커녕 온갖 이유를 붙여 해석하고는 제 식대로 이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과격하게 나가야.
“……곤란하네.”
조금이나마 알아듣는 시늉이라도 하겠지.
“하…….”
리아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디스…….”
에시메드가 동요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에시메드를 내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알겠어.”
리아트는 여전히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럼 이 황자님도 같이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리아트가 마침내 에시메드의 목을 휘감은 올가미를 거두었다.
“……윽.”
올가미에서 풀려난 에시메드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다친 건가? 나는 황급히 주저앉아 에시메드를 살폈다.
끼이익-
리아트는 그런 우리를 남겨 두고 방을 나섰다.
탁.
붉은 방의 문이 닫히며 고요해진 방 안에는 우리 둘만이 남았다.
“…….”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낭패감에 휩싸여 굳게 닫힌 문가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저 남자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방법은 도통 떠오르질 않고.
앞날은 별 하나 뜨지 않은 밤처럼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 * *
니샤와 로샨 제국 간의 국경선.
밤의 어둠에 가려져 울창한 숲은 그 자체로 함정 같았다.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저택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리아트는 그를 향해 예를 취하는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각막에 새겨 넣듯 응시하는 이가 있었다.
“…….”
저택의 창가에서 비쳐 나온 불빛에 흰색 로브 자락 아래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이 요요히 반짝였다.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 네가 기억해야 할 명령은 이제 단 한 가지.’
기억 속으로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남기고 떠날 이 아이를 지키는 것.’
“아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 로베릭에게 맡겨도 상관없다고. ……그게 운명이라고 하셨지요.”
마인하르트는 낮게 읊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점 흠결 없던 고운 미간은 설핏 일그러진 채였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마인하르트는 길들인 말의 등에 탄 듯 여상히 걸터앉았던 고목의 가지 위로 두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뭐가 이렇게 느려? 병력이 얼마쯤 되냐고 묻질 않았느냐.>
그가 한쪽 귀에 착용한 금빛 아티팩트가 지직거리는 마찰음을 흘리며 목소리를 전달했다.
마인하르트는 아티팩트를 눌러 전류의 흐름을 바로잡으며 입을 열었다.
“마흔에서 오십쯤으로 보입니다. 별다른 돌발 요소는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마인하르트는 조금이라도 기력을 보완하기 위해 정령왕의 이름을 입속으로 공글리며 짓씹듯 외쳤다.
“제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나오십시오.”
하얀 로브 자락이 바람에 휘날림과 동시에.
“[아스트라페]!”
파지지직-
전기의 정령왕의 이름이 소리로 형상화된 순간-
파아앗-!
눈부신 금빛 전격이 그의 손에서 여러 갈래로 터져 나갔다.
“습격입니다!”
갑작스러운 섬광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지반을 가차 없이 파열시켰다.
“뭐라?!”
당황하던 것도 잠시.
니샤의 정령사들은 고작 이 정도의 기습으로 대열이 흐트러질 풋내기가 아니었다.
“…….”
마인하르트는 얼마 되지 않아 리아트의 수하들에게 에워싸이게 되었다.
“여기서 두 다리가 잘려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싶지 않다면 당장 얼굴부터 드러내라.”
서늘한 협박에도 마인하르트는 대답하지 않고서 가만히 침묵했다.
“이 자식이……!”
협박에도 움직이지 않자, 수틀린 듯 입술을 짓씹은 사내가 마인하르트를 향해 손을 뻗던 순간이었다.
푸욱-!
“……!”
사내는 눈앞에서 날아간 자신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가시였다.
언제 자라났을지 모를, 대지 위로 몸을 움튼 거대한 가시나무의 줄기 아래로 사내의 혈흔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으으…….”
상황을 깨달은 순간 격통이 밀려왔다.
사내는 공포에 질린 신음을 흘리며 텅 빈 손목을 부여잡았다.
“하룻강아지보다 못한 어린놈이, 어디서 시끄럽게 짖어 대는 것이냐.”
세월을 우아하게 머금은 귀부인의 목소리가 어둠 너머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개시인가.”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역시나 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걸걸한 음성이었다.
마인하르트는 존중을 담은 눈빛으로 몇 개의 인영을 돌아보았다.
“기다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는 조용히 대꾸하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래, 몸이 쑤셔 죽는 줄 알았지.”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이렇게 다 같이 쳐들어가는 게 얼마 만이지?”
살벌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임에도 유유자적한 목소리가 말을 주고받았고.
터벅-
마인하르트의 곁에서 휘날리는 황금빛 섬광 아래, 어느 낯익은 노인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50년은 훌쩍 넘었지.”
노인이 나직이 대꾸했다.
“바스테반 공작 각하.”
마인하르트는 곧바로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예를 취했다.
고개 숙인 마인하르트를 응시하는 동공은 선연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 노인,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은 등에 매고 있던 투핸디드 소드를 빼 들며 살기 어린 낯으로 읊조렸다.
“내 손녀 납치한 놈들은-”
예순을 훌쩍 넘긴 노인의 힘으로는 결코 들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는 거대한 검이 허공을 거칠게 양단했다.
쿠과아앙-!
폭풍이 인 듯 거센 파공음이 휘몰아쳤고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을 분해시키듯 조각냈다.
얼이 나간 채 망연히 그 광경을 돌아보는 이들의 뒤로 시오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단 한 놈도 멀쩡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야.”
시오른은 어둠 속의 유일한 태양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 * *
쿠과아앙-!
“뭐지……?”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족히 수십 그루에 달하는 나무들이 우지끈, 꺾여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으아아악!”
“뭐 이런 노인네들이 다- 큭!”
드문드문 들리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지반을 울리는 진동으로 보아 꼭 싸움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나는 불안감에 작게 중얼거리며 에시메드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밤하늘이 비치는 창가를 심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에시메드 또한 나를 돌아보았다.
또각, 또각.
그 순간, 고요함만이 감돌았던 방문 바깥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에시메드와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우리가 갇힌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아트라기엔 걸음의 소리가 가벼웠다. 남자보단 여인에 가깝게 느껴지는데.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이의 접근에 식은땀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끼이익-
“오, 이곳에 있었구나.”
문이 열리고 태연히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이의 정체는, 놀랍게도 머리가 희끗하게 센 어느 할머니였다.
“그리 좋지는 않은 상황이다만. 일단은 만나서 반갑구나, 아가들아.”
넉넉한 품의 새하얀 로브 자락과 비슷한 형태를 띤 드레스 차림을 한 할머니는 본래의 색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백발이 군데군데 섞인 은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땋아 올려 호박색을 띤 고풍스러운 비녀로 장식하고 있었다.
세월을 머금은 얼굴 속 청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영롱한 총기로 빛나며 우리를 응시했다.
“……누구세요?”
리아트의 수하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머뭇거리며 건넨 질문에 정체 모를 할머니는 싱긋 웃으며 손을 까닥 흔들었다.
“어?!”
그 순간, 이상하게 꽉 막힌 듯 답답하던 숨통이 가붓하게 트이는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 왔다.
“……마나를 억제했던 아티팩트가 사라졌어.”
“뭐?!”
그 순간 에시메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금 눈을 감고 몸 안의 느낌에 집중해 보았다.
“……정말이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을지 모를 갑갑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익숙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가붓하고도 두근거리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세차게 유영할 뿐.
“이제 정령 소환이 가능할 게다.”
……저 할머니가 한 일이었다.
고작 손짓 한 번으로 몸속에 심어진 아티팩트를 무력화시켜 버리다니, 정체가 뭐지?
“바쁘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다. 어서 일어나렴, 빨리 떠나야 하니.”
얼떨떨하고 의심도 들었지만,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결코 적의나 꿍꿍이가 서려 있지는 않아 보였다.
“가자, 에시메드.”
……적어도 스토커 납치범에게 계속 붙들려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에시메드와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 지긋지긋했던 방을 뛰쳐나왔다.
문가를 나서자 짙은 어둠이 펼쳐졌다.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복도는 그 자체로 밤과 구분 지을 수 없었다.
“자, 어서 가자꾸나.”
커다란 복도에 에시메드와 나의 작은 발걸음 소리와 굽이 맞부딪혀 울리는 소리만이 고요히 메아리쳤다.
나이아드, 아니면 오리에드를 소환할까?
섬뜩한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에 머릿속은 그와 같은 고민으로 가득했다.
“바깥이다…….”
불이 다 꺼져 어두운 복도를 끝없이 걷던 우리는 마침내 저택의 문턱을 나섰다.
……잠시만. 바깥에는 분명 리아트가 있을 텐데?
치솟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든 순간-
콰과과광-!
“……어?”
누구를 소환할지 고민하던 게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끄아아악-!”
“이, 미친 노인네들이!”
하늘에서 황금빛 뇌전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리아트의 수하들로 보이는 자들이 납치될 때 보았던 것과 같은 검게 일렁이는 월도를 휘두르며 비처럼 쏟아지는 벼락과 거인의 손이 내려오는 것처럼 땅을 헤집으며 내리꽂히는 거대한 나무 기둥을 파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참의 고군분투 끝에, 가해지는 공격을 검은 월도로 베어 무력화시키던 찰나.
“어딜 달아나려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 마른 몸피.
그 얼굴에 주름이 성성했으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듯 무시무시한 기백을 지닌 할아버지가 선명한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끄으으윽…….”
“모,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리아트의 수하들은 보이지 않는 힘, 그러니까…….
“중력……?”
마치 거대한 중력에 짓눌린 듯, 고통으로 낯을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멍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할아버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순간도 살아남지 못할 아수라장의 한복판.
역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지도 못할, 성인 남자의 팔뚝 세 개만 한 넓이에 어지간한 남자의 키를 가뿐히 넘을 길이의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관절이 아파도 최대한 버텨, 시오른! 바로 치유해 줄 테니까!”
하얗게 세어 백발에 가까운 금발을 발치까지 늘어뜨린 온화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휘황한 빛의 권능을 부여하며 검을 쥔 노인의 이름을 불렀고.
“빨리빨리 안 움직이냐!”
리아트의 수하들을 한 자리에 붙들어 둔 할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를 재촉했다.
“이까짓 걸로 안 다친다! 그리고 네놈은 그 입 좀-”
그리고 그 노인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라, 모든 것을 잡아먹는 권능이 서린 검은 월도를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닥치라고!”
찬연한 빛의 궤적 아래, 모든 어둠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