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바람처럼 전장을 횡단하며 어둠을 베어 버린 그 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할아버지였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착시가 아니었다.
“저 망종할 자식이!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시오른, 다비드! 싸우지 마! 지금 같은 상황에 단합하지는 못할망정 뭐 하는 거야!”
내 할아버지였다.
‘우리 기특한 손녀. 벌써부터 설거지까지 도와주려고?’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힘드시잖아요. 이제 제가 할게요!’
분명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며 자주 앓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나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에 앉아 한참은 쉬셔야 했고.
젊은 시절에 몸을 너무 혹사하셨다며, 이럴 줄 알았다면 좀 쉬엄쉬엄 살 것을, 이라 한탄하시고는 했는데.
그랬는데……?
“이 망할 것들이, 어딜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느냐!!”
노호를 지르며 자신보다 수십 살은 젊은 청년을 가뿐히 패대기치는 저 할아버지가.
“……저 사람 누구예요?”
내 할아버지일 리 없다.
그래, 착각인 거야. 내가 착각을 하는 거야.
내가 할아버지를 너무 보고 싶어서 이런 개판 같은 상황에 환시를 보는 거야.
“네 할아버지 맞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아니냐?”
“네?!”
그러나 나와 에시메드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뱉은 말에 나는 경악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모르고 있었느냐?”
그 할머니는 내 반응이 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비록 현 황제가 추방했다고는 하나 로샨 제국에선 아직도 영웅으로 유명할 텐데? 요즘엔 네 친부,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라는 애송이가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받는다지만…… 내 보기에 영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이, 전성기 시절 시오른을 상대했다간 바로 나자빠질 게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별세계 이야기였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할아버지가 바스테반 공작이었다는 사실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영웅이었다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악녀의 아버지가 영웅이었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개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다시금 전장을 돌아보았다.
빛과 굉음이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싸움판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 똑똑히 비쳤다.
그 광경 앞에서 나는 도대체 뭐가 진실인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카앙- 챙-!
나는 한참 동안을 얼이 빠져나간 상태로 현란히 검을 휘두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뭐?!”
그 순간,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에시메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기함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인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황제가 이 정도는 알고 있으라며 던져 준 책으로 배웠어.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광신도들이 들고일어나 세상이 혼돈에 잠겼던……. 그러니까 재앙의 개시가 도래했을 때, 너희 할아버지가 제국과 대륙을 구원한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뭐라고?”
나는 황망히 중얼거렸다.
재앙의 개시.
그게 무슨 사건이었는지는 나 또한 어느 정도는 알던 사실이다.
“말도, 안 돼.”
정확한 경위는 알지 못해도 간략하게나마 읽었던, 전장을 누비며 공로를 세웠다는 영웅들의 이름 중에 할아버지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대체, 뭐가 진실인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황실에서 일부러 네게 가르치지 않았나 보네.”
뭐……?
그 순간, 에시메드가 담담히 내뱉은 이야기에 나는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헤일리안 대공의 입김도 들어갔겠지. 그 사실을 가르쳐 봤자 네가 네 외가를 더 따르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기도 하고…… 이미 모든 것을 잃고 추방된 죄인에 불과하니 들킬 염려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거야.”
에시메드는 푸른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읊조렸다.
“결과적으론 실패했지만.”
그의 이야기에 비로소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그러자 종래에 든 감정은…….
“……이런 X 같은 놈들을 다 봤나…….”
지독한 분노와 혐오였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고는 생각해 왔지만, 하다 하다 역사까지 조작해서 나를 속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
나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한숨을 토해 냈다.
내게 숨긴 게 또 무엇일까.
나만 모르는 일이 얼마만큼 존재할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우리 할아버지에 대한 진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망연히 할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뇌리에 한 장면이 떠올렸다.
빛의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 생명의 정령왕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이름하여 힐/딜/탱 다 되는 ‘남자주인공’ 로베릭을-
‘이 망할 자식이, 어디다 손을 대!’
까앙-!
짱돌 한 방으로 기절시켜 버렸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와.”
나는 탄성을 내지르며 깊은 깨달음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결코 일반인은 아니셨구나.
이미 충분히 떡밥이 던져졌었구나.
그런데 그걸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구나…….
“어울리지 않게 관료 노릇이나 하며 살더니, 저것 보렴. 아주 흥이 돋았구나. 사실 옛날에 저 녀석, 피에 미친 광견이라는 별칭도 있었단다.”
아득한 눈빛으로 화려한 싸움판을 바라보는 내 곁에서, 할아버지의 옛 동료라는 할머니가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재잘거리셨다.
* * *
70여 년 전.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인간과 정령사들이 대륙 전역에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윤리와 인도를,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며 세상을 혼돈 속에 몰아넣었다.
바로 먼 훗날 ‘재앙의 개시’라 불리게 되는 참극이 그 시작을 고한 것이었다.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어둠과 그의 권속들은 평화에 젖어 있던 대륙 전역을 빠른 속도로 집어삼켰고 그 여파로 멸망한 나라의 수를 세기에는 끝이 없었으며, 지옥 같은 세월은 무려 이십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모든 생명은 증오와 비탄, 절망에 잠겼다.
그러나 영원한 밤은 존재하지 않는 법.
창조 이후 까마득한 태고부터 아르카네를 경계해 왔던 자연계 정령왕들은 어둠과 그의 권속들이 재앙을 불러올 운명을 예지하였고, 그들은 재앙의 개시가 시작된 후 범람할 멸망을 막기 위한 논의 끝에 하나의 계책을 내어놓았다.
바로 정령왕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정령왕의 숨결’을 조각내어 인간의 영혼에 부여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 것이다.
정령왕의 근원을 영혼에 지니고 태어난 인간들.
일반적인 정령사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강대한 권능을 나면서부터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이들.
세상은 그들에게 ‘대정령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바람의 대정령사, 메카일라 유포리움.
물의 대정령사, 아타라 하카드엘라.
대지의 대정령사, 다비드 칼란 테라시움.
숲의 대정령사, 시시페아 드라이어드.
빛의 대정령사, 에제키엘 예레미니아 헤일리안.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 세페미아 -.
그리하여 6명의 대정령사가 세상에 났다.
정령왕들은 재앙이 시작됨과 동시에 멸망을 막아 내기 위해 창조해 낸 영웅들을 세상에 내려보내며 시름을 덜었다.
-그러나, 운명의 거대한 흐름은 설사 진리에 가까운 존재들인 정령왕들조차도 감히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던가.
‘이토록 혼란한 시대에 너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들아.’
바로 대정령사도 일반적인 정령사도 아닌,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한 비정령사로서 이 세상에 났으나.
‘아이의 이름은 시오른으로 합시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그 어떤 이보다도 특별하고 고귀한 운명을 부여받은 생명을 탄생시켰으니.
‘어머니, 이것 보세요! 벽에 장난감이 박혀서 떼어 내려고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벽이 통째로 뜯겨 나왔어요!’
그가 바로 최초의 비정령사 영웅이라 불리며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친 자.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었다.
‘세상에, 아들아……. 이게 무슨.’
로샨 제국의 유서 깊은 명문가 바스테반 공작가의 하나뿐인 영식으로 태어난 시오른은 아무런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범인(凡人)이었다.
그리하였기에 그 누구도 그가 특별한 운명을 지닌 아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 아들에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고작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장난감 검이 벽에 박혔다며 잡아당기다 방의 벽면을 뜯어내고……. 몸놀림은 어찌나 재빠른지, 훈련받은 기사들마저 지지치도 않고 따돌린답니다. 게다가 훈육을 피하겠다며 벽을 타고 올라가선 천장에 네 시간이 넘도록 매달려 있을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요.’
‘매우 염려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어둠의 정령왕과 관련이 있다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어린 바스테반 공작 영식은 타고나기를 경악스러울 만큼 강건한 육체와, 믿기 어려울 지경의 괴력.
‘시오른! 어미가 더 이상 검을 쥐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는 공작 위를 물려받을 아이야. 하잘것없는 용병들이나 쥘 법한 상스러운 무구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어머니, 제가 좋아하는 일은 첫째가 육체를 단련하는 것, 두 번째가 먹는 것, 셋째가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도 아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시다니요……. 너무하십니다.’
‘……한 마디로 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다, 이 말 아니니? 이런 고집스러운 녀석을 다 봤나. 너 같은 귀족 영식은 살다 살다 처음 보는구나. 아무리 내 아들이라지만…….’
그리고 곱게 자란 여타의 귀족 영식들과는 달리 그 무엇에도 꺾이고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시오른! 너 검 휘두르고 사람 때려 패는, 아니. 대련하는 게 제일 즐겁다고 했었지? 그런 거 실컷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는데 나랑 같이 가 볼래?’
‘어딘데?’
‘가면 알아. 이것만 대답해. 갈 거야, 말 거야?’
‘알았어, 가 보지 뭐.’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접어들 무렵, 바스테반 공작 영식은 그의 소꿉친구였던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어떠한 목적지를 향해 동행하게 되었다.
‘야, 이건…….’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는, 다름 아닌 어둠의 정령사들과 연합군 소속 정령사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접경지였다.
‘너도 내 능력 알잖아. 무려 ‘대정령사’라는 칭호로 불러들 주시는데.’
‘……같이 죽자고 데려온 거냐?’
쾌활한 인상의 소녀는 친우의 물음에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굽이치는 금빛 고수머리가 작열하는 불빛과 그림자에 뒤섞여 오묘하게 반짝였다.
‘나보다 너에 대해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나는 네가 얼마나 특별한 녀석인지 잘 알아. 시오른.’
‘……너.’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시오른을 응시했다.
‘너라면 이 전장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
‘……하아, 진짜. 목숨까지 걸고 위험에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다고.’
소년은 붉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툴툴거렸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물을게. 참전은 너의 선택이야.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 여기서 돌아서면 돼. 하지만 나와 함께 전장에 들어서겠다고 말한다면…….’
소녀는 낯빛 가득 생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시오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정령사이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위험으로부터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온 힘을 다해서.’
시오른은 자신의 친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 원 참, 내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거 다 알고서 이러는 거지?’
한탄이 뒤섞인 가벼운 질타를 내뱉은 소년은 뒤이어 소녀의 가녀린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친우를 따라나선 바스테반 공작 영식은 첫 번째 전장에서 잔악한 어둠의 정령사를 오직 육탄전으로만 상대했으며.
‘봐, 하면 되잖아! 비정령사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넌 강하다고!’
‘그 대신 죽을 뻔했다고! 지금 네 두 눈엔 이 처참한 꼴이 안 보이냐?’
‘푸하하하-!’
‘웃지 마!’
다소의 부상을 입긴 했으나 승리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그리하여 곧 그는 온 대륙을 들썩일 만큼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네가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구나? 대단해! 정령의 권능도 없이 어둠의 정령사에게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니!’
‘……어, 그래. 칭찬 고맙다.’
‘듣기로는 정신 조작 권능도 너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며?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그럴 수가 있지?’
몇 번의 전장을 거친 이후, 바스테반 공작 영식은 어둠을 소멸하는 가장 숭고한 빛의 대정령사이자 타의 추종이 불가한 치유의 권능을 지닌 에제키엘 예레미니아 헤일리안과 조우하며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범인(凡人)이었기에 피할 수 없던 생명의 위협을 빛의 대정령사가 지닌 치유의 권능으로 회복하여 마침내 그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스테반 공작 영식,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재앙을 오직 맨몸과 인간이 만들어 낸 무기로 맞서 승리를 거두어 낸.
대정령사도, 하물며 평범한 정령사조차 되지 못하였음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이 세상에 나타난 경이로운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