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5)화 (46/141)

<45화>

* * *

각자의 복잡한 사연을 지니고 대륙의 각지에서 모인 7인의 영웅들은 죽음마저 불사하며 어둠의 권속들과 맞서 싸웠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재앙은 마침내 종막을 맞이하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생과 사를 함께한 전우들과 이별한 뒤 로샨 제국으로 돌아온 시오른은 바스테반 공작 위를 물려받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을 보냈다.

한 인간이 이룩했다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업적을 짊어졌기에 황가의 견제를 한 몸에 받아야 했으며, 끝내는 영원한 복종을 맹세하고 로샨 바깥으로 대외적 교류를 일체 끊어야 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으니 그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죽음은 떼려야 떼어 낼 수 없는 존재였던가.

사랑하는 아내이자 함께 재앙에 맞서 싸운 전우였던 물의 대정령사 아타라 하카드엘라는 늦은 나이에 간신히 얻은 외동딸을 출산한 직후 숨을 거두었다.

사랑하는 반려가 남기고 간 아이, 마리에트는 모진 세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뒤 결국 제 어미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품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절박한 사랑으로 소중히 키워 낸 손녀딸은 그를 떠났다.

잔인하게도 오직 그를 위해서였다.

그 작은 아이는 할아버지를 지키고, 그의 지위를 복권시키겠다며 스스로 인간 같지도 않은 아비의 손을 붙잡고 떠나갔다.

시오른은 작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장이 꽉 막혀 제대로 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대로 숨이 멎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죽은 선황의 요구대로 영웅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바스테반 공작으로서 황실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이 실수였던 건가?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로샨 제국의 황녀와 강제로 결혼해야 했을 것이다.

모든 자유를 버릴 각오로 충성의 맹세를 했기에 아타라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이고…….

시오른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 자신이 내렸던 모든 선택을 향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자 영원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리에트, 이 아비가 못나서 그렇다. 내가…… 아타라의 말대로 힘만 셌지 머리에 든 게 없어서…… 너까지 잃었는데, 이젠 이디스마저 빼앗겨 버렸구나…….”

그러나 시오른은 절망 속에서도 다짐했다.

이미 수십 년간 제국의 공작으로서 안온하게 살아오며 젊은 날의 강건했던 육신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전우들과는 달리 아무런 축복도 타고나지 못한 자신은, 젊은 날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이 이미 초라하게 스러진 뒤였지만.

“더 이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 이디스를 다져 죽여도 시원찮은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에게 빼앗긴 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숨죽이며 살아갈 수 없었다.

시오른은 다시금 힘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바스테반이라는 그의 상징성이나 다름없던 막대한 권력을 잃어버린 작금, 그가 다시금 힘을 되찾을 방법은 요원해 보였지만.

‘이제 종말은 끝났어.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우리의 삶을 지켜야 해.’

재앙의 시대를 함께했던 전우들만은 아직 그에게 남아 있었다.

결심을 굳힌 시오른은 수십 년간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로샨의 국경을 넘어섰다.

이 또한 손녀딸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에게 되돌려 준 자유였다.

“……이리도 쉬운 것을…….”

심장이 텅 빈 듯 공허하다.

동시에 더 이상 두 발목을 옥죄는 족쇄가 사라져 이만큼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자유였던가.

이디스, 너는 내게 이러한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시오른은 씁쓸한 심정에서 우러난 옅은 미소를 머금고 긴 여정을 떠났다.

* * *

여정은 길고도 고되었다.

늙은 육신은 조금만 수틀려도 곧바로 탈이 났으며, 체력은 과거에 비하면 비루하게 여겨질 만큼 추락했다.

그러나 시오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여정을 이어갔다.

리테라의 의장으로서 살아가는 메카일라를 제하면 하나같이 자취를 알 수 없이 은거한다는 전우들의 소재를 수소문하며.

“……뭐야, 시오른?! 네놈이 왜 여기서 나오는 게야?!”

“오랜만이군, 다비드.”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여럿 복잡한 이유로 왕래하지 못했던 전우들 또한 그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망국의 후예 주제에 대정령사라는 칭호를 얻으면 뭐하나. 이용하거나 찍어 누르려는 놈들만 넘쳐났지. 다 때려치우고 은둔한 지도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 너도 별반 다를 게 없었구나.”

“흥, 너는 그래도 수십 년간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았더냐? 물론 지금은 나와 다를 게 없다만. ……아무튼, 내 이야기는 이쯤 하고…….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 거냐? 주디스의 장례식 이후로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그때는 하도 황망해서 제대로 된 안부도 못 주고받았으니.”

옛 전우들 중 하나는 비명에 떠나갔고, 그의 반려였던 아타라 또한 마리에트를 낳은 후 죽음을 맞이해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영웅들이었지만.

“-제 딸은 리테라로 잘만 보냈으면서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던 놈이 염치도 없이 면상을 들이미는구나.”

“……시오른?! 네가 여긴 어떻게……. 세상에, 그 옆은 다비드야?”

시오른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전우들을 향해 간절히 청했다.

“부탁한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 같은 놈에게 내 손녀를 이대로 맡겨 둘 수는 없어. 언젠가, 내 손녀가 제 친부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할 때…….”

그가 이 고된 여정을 선택하면서까지 바랐던 단 한 가지의 소원은.

“너희들 중 한 명만이라도 좋으니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다오. 그 아이를, 헤일리안 대공과…… 로샨 제국으로부터 지켜, 힘이 되어다오.”

끝내 자신의 복권을 이뤄내기 위해 움직일 손녀를 보호할 대비책을 안배해 두기 위해서였다.

“너는 무슨……. 수십 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부탁이 이런 거니?!”

“당장 안 일어나? 무릎을 꿇긴 왜 꿇어, 우리 사이에!”

다행히도 그들은 과거의 신의를 잊지 않았다.

시오른의 전우들은 단 한 사람의 이변도 없이 그의 부탁을 단번에 받아들여 주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약속해 오는 전우들을 마주하자 목울대가 꽉 막히는 듯하며 복잡한 소회가 물 밀듯 밀려와 시오른의 마음을 고요히 잠식했다.

시오른은 회한에 잠겨 조용히 눈물지었다.

화려했던 위명도, 위대했던 업적도, 기적 같던 사랑도.

더 이상 어느 하나도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치열했던 삶을 살아오며 쌓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디스를 떠나보내고 그의 마음속에 가장 무겁게 자리했던 일을 해결하고 난 뒤.

다음 계획을 세워 움직이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던 나날이었다.

“너는……!”

시오른은 그를 찾아온 뜻밖의 객을 바라보며 경악에 사로잡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스테반 공작 각하.”

그가 마리에트와 로베릭과 함께 친자식처럼 거두어 길렀던 아이.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가, 그 찬연한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시오른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 * *

“피에 미친 광견…….”

우리 할아버지가?

말도 안 돼. 말이 조금 험할 뿐이지 잔혹한 성미를 지닌 분은 결코 아니신데…….

저 할머니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는 거야. 그게 분명해.

“아무튼, 로베릭이…….”

잠시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보 같아 보일 만큼 내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절절매는 모습을 보여 오는 그를 우습게 여기고, 한심하게 여기고.

그리고…….

어쩌면, 그리 위험한 상대는 아닐 것이라고.

그가 나를 속이며 기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오직 내게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만약, 먼 훗날…… 그가 진심으로 과거를 후회하며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차마 복수하지 못하고.

“아니야.”

나는 일렁이는 감정을 모조리 잘라내 버린 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로베릭은 결코 신뢰할 인간이 못 되는 작자였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그를 향해 인간적인 감정을 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허망한 관계일 뿐.

“돌아가서 보자, 돌아가서…….”

나는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갈무리하며 여전히 정신없었으나 이전에 비해 확연히 정리되어 가는 기미가 보이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광휘를 두른 뇌전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공중에서 내리꽂혀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전기의 정령왕의 권능이 분명한 저 뇌전을 다스리는 이로 추정되는 유력한 이는…….

“……젊은 사람?”

모두가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령대의 노인인 것과 다르게, 하얀 로브로 얼굴과 전신이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으나 확연히 젊은 티가 드러나 보이는 남자였다.

흰 로브 자락 틈새로 그가 부리는 전격과 닮은 금빛 머리칼이 바람결에 작게 흩날렸다.

누굴까?

사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불현듯 솟아난 호기심을 갈무리에 그를 유심히 바라볼 때였다.

“…….”

우연인지,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게도.

고개를 돌려 내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본 그로 인해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어떠한 빛도 투과하지 못하는 칠흑같이 새카만 검은 눈동자가 미동 없이 나를 응시해 왔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찬연한 권능과는 대비되는 색채였다.

어쩐지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으로부터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것들이…….”

바로 그 순간,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산하게 맴돌고.

“리아트……!”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깨닫고 숨을 들이켜며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검은 밤을 등진 채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빛을 노려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니샤의 국왕이로구나.”

나와 에시메드를 보호하듯 우리를 가리고 선 할머니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 순간, 리아트의 손아귀에서 검은 잔상이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저 광경을 처음 보았던 때 빛을 잃고 밤에 잡아먹힌 그믐달처럼 보인다 생각했던, 그 궤적이.

우리를 보호하던 할머니가 한 걸음, 전장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네놈이 우두머리로구나!”

대지에서 갖가지 거대한 식물을 자라나게 하여 니샤의 정령사들을 공격하던 또 다른 할머니가 리아트를 발견하고 공격의 대상을 바꾸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나무 덩굴들이 리아트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나는 일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리아트는 노기를 감추지 못한 기색으로 팔을 휘둘러 허공을 양단했다.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검은 잔상이 거대한 식물의 덩굴에 닿은 순간.

사아아아-

흔적도 없이 완전히 소멸했다.

원래 존재하지조차 않았다는 듯.

“……이런.”

식물을 다루던 할머니의 낯빛에 난처함이 깃들었다.

“니샤의 왕족이 나올 줄이야. 꽤나 까다롭게 되었군.”

할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무리 말도 안 나올 만큼 강하다고 해도…….

나는 초조하게 전황을 살펴보며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모든 공격을 소멸시켜 버리는 리아트의 권능 앞에서 어떻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로군.”

이지적인 빛을 머금은 벽안이 흘긋 나를 담았다.

“그 이유는 역시…….”

우리의 앞을 가로막듯이 서 보호하던 할머니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는 저 숲속으로 들어가거라.”

“네?”

나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할머니의 손끝이 가리키는 그 숲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저기로요?”

그야말로 어둠, 밤이 아가리를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칭해도 하나 이상할 점 없을 만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숲이 자리했다.

“이곳에 있는 것보다 숲으로 피하는 게 더 낫다. 나 또한 참전해야 하니 더 이상 너희를 엄호해 줄 수도 없어.”

망할…….

리아트, 저 사람의 섬뜩한 집착이 더없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는 내 손을, 에시메드가 붙잡고 앞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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