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6)화 (47/141)

<46화>

* * *

동이 트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캄캄하고 무서운 밤의 숲속, 어스름하게 내리꽂히는 달빛에 서로를 의지하며 조금씩 나아가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

에시메드가 발길을 멈추더니 작은 신음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나는 에시메드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리아트가 올가미로 옥죄어 막무가내로 끌고 갔던 여파로 남겨진 상처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되겠다, 에시메드.”

나는 입술을 깨물다 에시메드의 양손을 붙들고 주위에 자리하는 쓰러진 고목들 중 아무 나무에 앉혔다.

“이디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에시메드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처 치료부터 하자. 아프잖아.”

계속 마음이 쓰여서 못 견디겠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일리피아]!”

나는 얼굴을 굳힌 채 에시메드의 상처를 응시하며 일리피아를 소환했다.

어두운 숲을 따듯하게 밝히는 빛이 우리의 사이로 환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디스, 나를 불러 주었구나.]

곧이어 따스한 광휘를 두르고 모습을 드러낸 일리피아가 기품 어린 미소를 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데…… 어쩌다 이 어두운 밤의 숲을 헤매게 되었느냐?]

그러던 일리피아는 사위를 돌아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에는 아주 깊은 사연이 있지요…….

분명 나이아드가 애를 태우고 있을 텐데, 정령왕들끼리는 정보 공유가 불가능한 건가?

“나중에 설명할게요. 우선 에시메드의 상처부터 치료해 주세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부탁을 건네자 일리피아는 지체하지 않고 에시메드의 목을 부드럽게 쓸며 리아트가 남긴 상흔을 치유했다.

“이제 괜찮아?”

“응, ……고마워.”

다시 하얗게 돌아온 목을 영 어색한 듯 만지작거리던 에시메드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그 반응이 어딘가 웃음을 자아내어, 나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쐐액-!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목덜미를 스치는 강렬한 통각에 나는 화들짝 몸을 떨며 목을 감쌌다.

“이디스!”

에시메드가 비명을 지르듯 내 이름을 외쳤다.

황망한 와중에도 어딘가 불길한 축축함을 느끼며 목에서 손을 떼자, 일리피아의 주위에서 은은히 배어나는 광휘에 비쳐 드러난 것은…….

검붉은 혈흔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멍하게, 지독하게 비현실적으로 와닿는 혈흔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야!”

충격에 잠긴 나와 반대로 곧바로 정신을 차린 에시메드가 사납게 이를 갈며 쓰러진 고목에서 일어나 내 몸을 감싸듯 선 채 주위를 경계했다.

저벅, 저벅.

일리피아의 광휘가 닿지 않는 어둠 저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와 에시메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만, 나서지 마렴.]

그 순간, 일리피아가 우리를 막아서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르카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구나.]

……아르카네?

아르카네라면, 어둠의 정령왕?!

뭐라고?

나는 충격에 잠겨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갑자기 아르카네가 왜 튀어나와?

뜬금없다고 여기거나 말거나, 착실히 걸음을 옮겨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자는 전신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는 검은 색의 옷을 입은 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인간 남자였다.

……엥? 사람이잖아?

그런데 일리피아는 왜 저자를 가리켜 아르카네라고 한 거지?

나는 의아함에 잠겨 여전히 차분한 안색의 일리피아를 올려다보았다.

일리피아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상처를 치유해 주고는, 눈앞의 사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갑자기 등장한 정체 모를 남자라니…….

불안이 전신을 휘감았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다른 정령들의 소환을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소환의 주문을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

그 남자가 갑자기 제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던졌다.

그리하여 드러난 얼굴은, 맙소사.

“리아트의 수하잖아……?”

리아트가 마차를 습격하던 때, 언뜻 스쳐 지나가듯 보아 분명한 인상이 남진 않았지만.

분명 그때 자리했던 것이 틀림없는 리아트의 수하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에시메드 또한 놀란 듯 내 팔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흠잡을 데 없이 수려한 생김새를 지닌 그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혼몽하게 풀린 눈길로,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에시메드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런데, 눈빛이 왜 저래?

슬슬 괴이쩍음을 느끼던 찰나, 그 남자가 드디어 입을 떼고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우야. 네가 이곳에 있었구나.”

……?

……저놈이 지금 뭐라고 말한 건지 이해되시는 분?

사랑하는 아우?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저기…… 에시메드.”

모든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두려움보다는 의문에 찬 채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에시메드를 향해 물었다.

“혹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이 한 분 더 계셔? 아니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형제가 존재한다거나…….”

역시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남자를 응시하던 에시메드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답했다.

“없어. 황태자하고 머저리만 빼면 아무도 없는데.”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저 인간은 대체 왜 너를 아우라고 칭하는 거니?

우리가 자신을 미친놈 보듯 하든 말든 남자는 감회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야 너를 마주한다. 그동안 내 얼마나 애타게 너를 찾아다녔는지 너는 차마 헤아리지도 못할 게야. 대체 왜 그런 하잘것없는 존재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있느냐? 너는 미천한 피조물 따위가 아니거늘…….”

대체 무슨 개소리를 줄줄이 늘어놓는 건지…… 더 듣고 있기도 지쳤다.

나는 여전히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선 채, 그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는 일리피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낯이었다.

일리피아가 분명 저 남자를 향해 아르카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했지?

뭐가 어찌 되었든, 어둠의 정령사임은 확실한 것 같은데.

어둠의 정령왕을 압도할 만한 강력한 정령이 누가 있을까.

내 속성 중 빛이 존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행히도 없으니…….

물리력이 가장 강한 오리에드를 부르는 게 가장 나을 듯했다.

그를 소환하기 위해 입을 떼던 순간이었다.

[그만, 아르카네.]

불현듯, 일리피아의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르카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차례로 경악에 잠겨 말을 토해 냈다.

아니…… 잠깐만.

저 남자가, 아르카네라고?!

말도 안 돼, 어디로 봐도 낮에 보았던 리아트의 수하인 데다 정령에게서 느껴지던 그 특유의 기운도 없는데?

“……일리피아. 역시 그대는 알고 있었군.”

에시메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남자는 순식간에 방금의 기색을 지워 내며 자못 원망이 섞인 눈길로 일리피아를 응시했다.

그 변화에 흠칫, 몸을 떨던 것도 잠시.

“어찌 내가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발길을 붙잡으시오?”

여전히 짙은 원망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직은 너의 때가 아니다.]

일리피아는 보기 드물게 모든 미소가 사라진 무표정한 낯으로 손을 저으며 답했다.

“일리피아……!”

일순간 사나워진 기색으로 그가 외쳤다.

[세 번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일리피아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가거라.]

“…….”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러쥔 그의 손아귀에서 붉은 피가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사이에 오간 일련의 대화에 담긴 의미를 알 수조차 없어 그저 침묵만 하던 때, 그 남자.

그러니까 일리피아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몸을 뒤집어쓴 아르카네의 시선이 정확히 에시메드를 향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섬뜩할 만큼 강렬한 집념이 담긴 안광을 빛내며 그가 말했다.

“모든 것을 멸하더라도 너만은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것이니.”

그의 몸 주위에서 검은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개 숙인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달싹거리는 듯했다.

“내 아우…….”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걸까?

“……에시메드야.”

정말 알아듣기 힘든,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담긴 호칭은…….

“……아우?”

아우면…… 동생을 뜻하는 표현이잖아.

이때까지는 그저, 조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어둠의 정령사가 지껄이는 말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어째서, 어둠의 정령왕이 에시메드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나는 에시메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시메드는 방금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

상황도 상황이니,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나을까.

쿠과아앙-!

바로 그때, 숲의 바깥쪽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과 거대한 굉음이 울려왔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나는 직전의 고민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다급히 우리가 지나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탁-

“가지 마, 이디스.”

그 순간, 에시메드가 나의 손을 붙들었다.

그 소년은 고요히 빛나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다시금 말했다.

“그 사람들을 믿자.”

에시메드가 믿자는 이들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데려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할아버지께서 무사하실까?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숲의 저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이때까지 모르다 오늘에서야 안 사실이긴 하지만, 영웅이셨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그러니…… 할아버지를 믿자.

아무리 리아트가 희한한 권능을 구사한다고 해도 우리 할아버지는 반드시 승리하실 거야.

“일리피아, 부탁이 있어요. 우리에겐 더 이상의 위협이 없는 것 같으니 숲의 바깥, 할아버지와 어르신들께 가 주세요. 그리고 다치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을 치유해 주세요.”

그렇지만 안전장치는 마련해 놓자.

[네 뜻대로 하마.]

일리피아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머지않아 여명이 밝아올 것이다. 숲의 끝으로 가렴. 내 모두를 데리고 너희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

“네!”

그는 모든 말을 마치고 그 특유의 온화한 빛무리로 화해 모습을 감추었다.

“가자!”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는 에시메드의 손을 꼭 맞잡고 숲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 * *

뛰는 걸음마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두렵기보다는 설레었고, 사위는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맞잡은 손에 의지할 수 있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우리를 포위하듯 촘촘히 둘러싼 나무들 사이로 서서히, 연한 보랏빛과 따스한 주홍빛의 색채가 뒤섞인 여명이 비쳐 들어왔다.

“다 왔다……!”

그리고, 마침내.

밤그림자에서 풀려난 아이들은 여명이 터오는 숲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아침이 왔네!”

지난밤이 너무나 길고 또 길었다.

지혜의 정령왕과 마리에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리테라로 떠난 여행길.

뜻밖에도 찾아왔던 무수한 고난을 상기하며, 이디스는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조금은 힘없이.

그렇지만 기쁨이 담긴 미소를 그리며 에시메드를 바라보았다.

“…….”

에시메드는 그 티 없이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울려오는 고동 소리를 망연히 감내했다.

분명 처음은 증오에서 비롯된 악의였고, 그다음은 동질감이었으며.

마지막은…….

“……대체 뭘까.”

“응? 뭐라고?”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이디스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다 한들 지금의 에시메드에게는 달리 내어줄 답이 없었다.

아직은 이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하지만 그리 머지않은 때, 이 모든 운명을 자아낸 단 하나의 이유가 밝혀질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