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7)화 (48/141)

<47화>

* * *

“하……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곳곳이 흐트러져, 여유만만했던 몇 시간 전의 모습과는 딴판인 몰골의 리아트는 온몸이 단단한 나무뿌리로 포박당한 채 퀭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어…….”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던 거였군.

“……그러게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셨소?”

에시메드와 나를 저택에서 구출했던 할머니가 착잡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설마 의장께서 저 아이들을 데리러 오실 줄이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리아트는 곳곳에서 번득이는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인들을 돌아보며 작게 실소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군. 니샤의 국왕 놈이 우리 이디스를 왜 납치한 거지?”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 냅다 달려가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그런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 안으시던 할아버지께서 의문스럽다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아마……. 그런데, 너 설마 모르고 있었어?”

“뭐를?”

목소리를 들어 보아 방금 리아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할머니인 듯했다.

그 할머니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 네 딸아이랑 리테라에서 같이 수학했던 애야…….”

“……뭐라고? 이 천하의 빌어처먹을 놈이?!”

버럭, 고함을 지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뒤로 리아트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처먹을 놈……. 더 이상 잘 보일 필요도 없지만…….”

“그 입 닥쳐라! 마리에트와 함께 수학한 동문이면서도 파렴치하게 내 손녀딸을 납치해 가?! 비 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 처맞아야 그 썩어빠진 정신이 조금이라도 개조되겠구나!”

“야, 그만해! 아무리 그래도 이놈은 일국의 왕이라고!”

격분한 할아버지께서 다시금 검을 치켜들고 리아트를 향해 달려들려 하시는 바람에 나는 재빨리 할아버지에게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어르신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만들 하려무나. 이제 그만 일을 정리해야지.]

한바탕 벌어졌던 난리 통은 일리피아의 제지로 사그라들었다.

“그래, 일단 우리가 너희를 구해 내긴 했지만…… 아마 로샨 제국은 완전히 뒤집어져 엉망진창일 거다.”

할아버지께서 가라앉은 어조로 말씀하셨다.

“일단은 우리와 함께 돌아가자꾸나. ……이놈도 끌고 가는 게 좋겠지.”

“아니요, 할아버지.”

나는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니샤의 국왕께서 하시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어요. 로샨의 황제가 에시메드의 암살을 의뢰했고, 의뢰를 수행할 겸 저도 같이 납치한 것이라고.”

“……뭐라고? 황제놈이…… 그러니까 2황자를, 자기 친아들을 죽이려 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할아버지의 반문이 돌아왔다.

나는 에시메드가 신경 쓰여 잠시 그를 돌아보았다.

에시메드는 생각보다 담담한 기색이었다.

……아니, 정말로 아무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무던한 낯빛이었다.

나는 속사정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향해 에시메드의 과거를 최대한 간략하게 축약하여 설명했다.

한편으로 어르신들은 어둠의 정령들을 몰아낸 영웅들인 만큼 혹여 에시메드에게 적대감을 내비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말세로구나……. 아무리 아르카네의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한들, 제 친자식이거늘 그리도 미워하다 못해 죽이려고까지 하다니……. 그것도 적국 왕의 손을 빌려서!”

“……옛날부터 로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갖 고결한 척은 다 하면서 뒤로는 음험한 짓거리를 일삼곤 했으니.”

하얗게 센 금발 머리의 할아버지가 한탄하듯 중얼거렸고 분명 다비드라는 이름을 지닌 듯했던, 무서운 인상의 할아버지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 내뱉었다.

예상 밖의 반응들이었다.

“……상황이 복잡해요. 아무리 제가 헤일리안 대공녀고, 에시메드가 2황자라 한들 로샨 제국의 황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적국의 왕에게 암살을 사주해 이 난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금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대체 얼마나 거대한 파란이 일 것인가.

“우선 니샤의 국왕 전하는 풀어 주고 저희만 로샨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니샤의 군주.

또한 내 어머니와 과거에 연이 닿았던 사람.

……로샨의 황제와 로베릭처럼 아주 악질적인 인간은 아닌 듯해 보이니 굳이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손녀가 아주 똘똘하구나. 나도 이 아이의 의견에 찬성이야.”

갖가지 거대 식물을 다루던 할머니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디스, 그래도 이 할아비는…… 저놈을 이대로 풀어 주기에는 분이 영 풀리지 않는구나.”

다른 어르신들도 동의하는 듯해 보였으나, 오직 할아버지만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셨다.

“할아버지, 저는 그냥 얼른 쉬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꺼내다가 아까부터 조용한 리아트를 돌아보았다.

“…….”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디스.”

먼저 입을 연 건 리아트였다.

“……나를 원망해?”

그는 조용히, 단지 그것만을 물었다.

글쎄.

당신 때문에 원래 겪을 일 없던 고생도 하고, 사정이 어찌 되었든 나를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에시메드까지 해치려 들고, 자기 멋대로 나를 니샤에 끌고 가려고도 했지만…….

“딱히요. 당신이 이 난리를 벌인 덕분에 알게 된 진실도 있고요.”

덕분에 로베릭과 루에이리 황가가 내게서 철저히 차단시켰던 과거의 진실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를 향한 원망은 반절 이상 상쇄된 터였다.

진짜 적은 눈앞의 이 남자가 아니다.

“……그런가.”

리아트는 작게 실소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웃음을 토해 내다, 천천히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군.”

“……이만 풀어드릴게요. 더 이상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시고, 얼른 니샤로 돌아가세요.”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이 건을 빌미로 황제를 압박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니샤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서던 찰나였다.

“로샨 제국으로 돌아가면……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산재할 거다.”

불현듯, 리아트가 말을 꺼냈다.

마치 내 발길을 붙잡으려는 듯.

“그럴 바에는 나와 함께 어떠한 위험도 없고, 누구도 너를 공격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수는 없겠나?”

나는 어떠한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채 리아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내가 자신의 제안에 따라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무언가 중대한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리아트. 저는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

내가 말을 내뱉은 순간, 리아트의 회안에 파문이 일었다.

이 사람은 나를 마리에트와 겹쳐 보고 있다.

내가 로샨 제국으로 돌아가면 마리에트처럼 죽음을 맞게 될 거라고 단정 지어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

하지만.

“맞서 싸워야 한다면 피하느니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싸울 거예요. 그리고 승리를 쟁취할 것이고요.”

“…….”

“그게 제 결심이에요. 그 어떤 달콤한 제안을 갖고 오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을.”

한동안 망연한 낯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리아트의 입에서 실낱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야지…….”

고개를 기울인 채 눈앞의 내가 아닌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을 바라보는 듯하던 그는.

종래에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야 마리에트의 딸이겠지.”

* * *

헤일리안 대공저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하나뿐인 친딸이 2황자와 함께 리테라로 향하던 길목에서 실종된 이후로 헤일리안 대공은 연일 잠 못 이루고 제국 전역을 이 잡듯 뒤졌다.

그러다 못해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말리는 대공비를 뿌리치고 직접 수색에 나서기까지 했다.

대공비는 그 사실에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에도 몇 번씩 울음을 터뜨리다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로 인해 대공저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하릴없이 흘러가던 나날, 하루가 멀다 하고 몸져누워 있던 대공비 샤스티아가 뜻밖에도 바깥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하게 손을 싸매고 이리저리 종종걸음을 옮겼다.

“……샤스티아.”

저 멀리서 가라앉은 음성이 그녀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샤스티아는 몸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췌한 그녀의 낯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페리온!”

그녀는 법도조차 잊은 듯 치맛자락을 붙들고 뛰쳐나가 페리온의 앞으로 다가섰다.

“세상에, 안색이 왜 이래요…….”

고향으로 내려가 몸을 추스르기를 바랐건만, 눈에 띄게 마르고 어두워진 그의 낯빛에 샤스티아가 아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리온은 강퍅하게 마른 얼굴 위로 애써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대공비 님의 낯빛이 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근심으로 인한 것이겠지요.”

아, 세상 어느 곳에도 페리온만큼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이가 없었다.

샤스티아는 솟구치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 여자의 딸이 헤일리안 대공가에 정식으로 입적된 후부터…… 나는 단 한순간도 마음 편히 지내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희망이 생겼다.

샤스티아는 페리온의 두 손을 꼭 붙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부디 기뻐하세요. 이런 변고에 기뻐하는 나 자신이 조금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그 여자의 딸이 사라졌어요. 한 달의 반이 훌쩍 넘어갈 때까지 로베릭조차 찾지 못하고 있지요. 그러니, 우리는 다시 예전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예전의 일상이라…….

페리온은 제 손을 단단히 맞잡아 오는 창백하고 가냘픈 손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비록 자신은 영원토록 이 이상 샤스티아의 곁에 다가갈 수 없다 해도…….

그 여자의 딸만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품은 희망을 무참히 비웃을 따름이었다.

쿵-!

말도 안 되는 억지였으므로.

“꺄악-!”

그 순간 거대한 진동이 대공저의 지반을 흔들었다.

“샤스티아, 저를 붙잡으십시오! 무슨 일인지…….”

휘청이는 샤스티아를 다급히 부축하던 페리온은 바로 옆, 진동의 진원지인 대공저의 후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이 나간 채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리에드 님, 이렇게 부드럽게 이동할 수 있으시면서 저희 때에는 어찌하여 그리도 막 굴리셨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너와 이 아이가 같은가?]

“짧은 휴가도 이제 끝이로구나. 다시 돌아가면 그동안 밀린 공무를 처리하느라 일주일 밤낮을 새워야 하겠지.”

“아가, 멀미는 안 났니? 혹시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려무나.”

페리온과 샤스티아의 경악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저마다 말을 주고받는 이들의 정체는 바로 대지의 정령왕과 이제는 전설로 남은 과거의 영웅들.

그리고 작은 아이 두 명이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그 아이들 중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한 샤스티아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디스는 자신을 귀여워하며 어르던 손길에서 고개를 돌려 샤스티아를 돌아보았다.

무덤에서 되살아나 걸어 나온 이를 발견한 것처럼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샤스티아와, 보기 싫게 마른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페리온을 바라보던 영롱한 눈동자가 한 번 감겼다가 다시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작은 머리로 도대체 무슨 영악한 생각을 한 것인지.

이디스는 사랑스럽게 그지없는 미소를 그리며 그들에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샤스티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무런 답도 내뱉지 못했다.

페리온을 불러들인 꼴을 보아 알 만한 상황에 이디스는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바로 그때, 손가에 미지근한 온기가 닿아왔다.

이디스는 눈을 크게 뜨며 에시메드를 돌아보았다.

에시메드는 고요히, 하지만 분명한 뜻을 품은 눈빛으로 이디스를 마주 응시하며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작은 소녀의 낯 위로 진심 어린 미소가 꽃망울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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