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48)화 (49/141)

<48화>

4. 잃어버린 이름

새근, 새근.

어두운 밤, 황궁의 처소에선 곤히 잠든 아이의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어둠에 물든 창가를 한참 동안이고 올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어딜 또 가려는 것이냐.”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것일까.

시오른은 어김없이 모습을 감추려는 남자를 못마땅한 기색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하얀 후드에 가려진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어째서 자꾸 떠나려는 것이야?”

시오른은 속이 타는 심정으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인하르트.”

시오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마인하르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각하께는 송구할 따름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사죄뿐이었다.

시오른은 복잡한 심정으로 마인하르트를 바라보며 이디스를 구하러 가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스테반 공작 각하.’

지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그림자 한 자락 볼 수 없었던 아이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한참을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던 시오른은 이내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던 게냐? 왜 일언반구도 없이 떠났던 거지? ……그리고, 어째서 마리에트의 임종조차 지키지 않았던 거냐?’

모든 질문에는 단 한 번의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오른은 휘몰아치는 분노와 배신감, 의문과 미련을 삼키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찌하여,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에게 이디스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냐.’

그 순간, 마인하르트가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그러쥐는 것을 시오른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것과는 상반되게도 조용한 목소리의 답이 되돌아왔다.

‘그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라고만 답해드리면 만족하지 못하시겠지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시오른은 역정을 내려 했으나 자신을 직시하는 마인하르트의 눈빛에 곧 입을 다물었다.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배신하여 원수에게 빌붙기 위해 행했던 일이 아니었음을 그의 곧은 눈빛이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디스 아가씨께서 니샤의 국왕에게 납치되셨으니까요.’

‘……무어라? 납치?!’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소식에 경악하던 시오른은 다급히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정말 사실인 것이야? 아니, 그보다 어찌하여 네가 이디스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야!’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으나 여전히 되돌아오는 답은 단 한 가지였다.

‘제가 각하께 거짓을 고할 것이라 여기십니까.’

그 답은 시오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인하르트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제 혀를 깨물지언정, 거짓으로 자신의 허물을 덮는 이는 아니었다.

‘……좋다, 믿으마! 대신 이 일이 모두 해결되고 나면 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지냈는지 상세히 따져 물을 것이야!’

시오른은 그 길로 빠르게 전우들에게 도움을 청해 이디스를 구출하러 길을 나섰다.

그리고 일이 간신히 정리되자마자 마인하르트는 또다시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거두어 직접 길렀으나 여전히 그 속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아이를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시오른이 말했다.

“……혹, 마리에트의 죽음 때문인 것이야? 그 아이의 죽음이…… 네게 그리도 충격적이었더냐.”

그 순간, 짙은 그림자 아래 가려진 눈빛이 광채를 잃고 멍해지며.

‘……얘.’

과거의 기억이 걷잡을 새 없이 피어나 마인하르트의 현실을 흐렸다.

‘왜 이곳에 혼자 있어?’

모든 것을 잃었던 어린 시절.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하염없이 헤매다 길거리 구석진 곳에 주저앉아 멍하니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오던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왜 대답을 안 해? 살아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감정이랄 것 하나 없는 무표정한 낯으로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 둔탁해질 대로 둔탁해진 마음으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경 꺼.’

모든 게 지독히도 무기력했다.

살아 있음을 향한 의지도, 육체를 자극해 오는 기본적인 욕구조차 죄악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마인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찾아올 영원한 적막만을 기다리며.

‘……기본적인 삶의 의지조차 없어 보이네. 하지만 그것도 모두 한때에 불과할 뿐. 분명 바라는 끝을 맞이하고 난 뒤, 넌 분명히 후회하게 될걸.’

영문 모를 말을 읊조리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성가셨다.

마인하르트는 지난 일 이후 처음으로 낯 위에 표정을 드러내며 다시금 눈을 뜨고 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소녀를 응시했다.

‘갈 곳이 없다면.’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검은 눈동자와 세상 모든 광명을 끌어안은 것처럼 휘황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소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제 고운 손을 내밀었다.

‘…….’

마인하르트는 저를 향해 내려와 하얗게 빛나는 자그마한 손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이토록 방황할 것이었다면 임종이라도 지키지 그러하였느냐.”

그 순간, 그를 현실로 끌어올리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마인하르트는 입안에 감도는 쓰디쓴 미망을 애써 삼키고.

“송구합니다.”

언제나 똑같은 사죄를 입에 올렸다.

시오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되었다, 내가 네 고집을 어떻게 꺾겠느냐. 네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포기한 듯 이야기하는 시오른을 향해 마인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 대답했다.

“각하께서 제게 베푸셨던 은혜는 잊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생의 모든 순간을 다해 갚아야 하겠지요.”

“그 소리는 이제 되었다.”

시오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감사 인사만 하고 살게야. 너도 이제 네 삶을 살아야지.”

그가 보살핀 아이들 중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아이였다.

이제 그만 방황하고 한 자리에 정착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진심 어린 염려를 담아 건넨 말이었으나, 마인하르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이디스가 잠든 방의 창가를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인하르트는 하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궁을 둘러싼 담벼락에 올라 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저 고집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적막만이 흐르는 사위에 홀로 남은 시오른이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성도로 돌아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에시메드와 내가 가장 먼저 감당해야 했던 상대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공저에 들이닥친 로베릭이었다.

“이디스!”

족히 수일은 잠을 못 이룬 듯 초췌해진 안색의 로베릭은 내 곁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말로 무사히 돌아온 거니? 다친 곳은 없어? ……대체 누가 너를 납치했던 거지?”

“……납치의 배후에 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게요. 할아버지께서 저와 2황자 전하를 구해 주셨어요.”

“뭐?!”

그제야 주위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 듯 로베릭은 창백히 질린 낯으로 고개를 들어, 서슬 퍼런 기세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다 네놈이 무능한 탓이지.”

흥, 비웃듯 내뱉은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어르신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옛 전우들을 만나러 떠난 길이었기에 거칠 것 없이 쳐들어가 이디스와 2황자를 구출했다. 이 공은 너 또한 인정해야 할 게야.”

“……그 정보를 어떻게…… 설마, 그놈이?”

으득, 누군가를 떠올리며 노골적으로 이를 갈던 로베릭은 그제야 나를 놓고 일어서며 적대적인 어조로 물었다.

“배후는 누구였습니까. 대체 누가, 헤일리안의 유일한 후계자를 납치하였느냔 말입니다!”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로베릭이 고함을 지르듯 외친 순간 뒤편에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아직 방에 머무르고 있던 샤스티아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유일한 후계자라니, 그럼 우리 알레아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으나 안타깝게도 로베릭과 방 안 사람들은 그녀의 충격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황제도 서신을 받았겠지.”

할아버지께서 느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황제? 오스발트가 왜……?”

로베릭이 분노조차 잊고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바로 이것이 할아버지와 우리가 납치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부러 보름간 성도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였다.

……때는, 리아트가 니샤로 돌아가기 전의 일.

“이번의 일로 내가 너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그러니 후처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어르신들에게 당해 무참히 쓰러진 수하들을 빛의 대정령사 할아버지가 치유해 주었고 그들을 추슬러 길을 떠나기 직전.

리아트가 발길을 멈추고 대뜸 말했다.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놓으마. 네 친부를 그 앞에 데려가면 알아서 실토할 거야.”

리아트는 그 말만을 남긴 뒤 홀연히 떠나갔다.

“지금 당장 이디스를 데리고 입궁하도록 해라. 아, 2황자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할아버지께선 말씀을 아끼시며 나와 에시메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래, 드디어 반격을 가할 때였다.

나와 에시메드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 * *

“이…… 미친…….”

얼굴에 시뻘겋게 열이 오른 채 서신을 읽어 내리던 오스발트의 두 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간악한 아르카네의 졸개 따위가!”

거칠게 서신을 내던진 오스발트는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서신을 보내온 이는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헤일리안 대공녀를 2황자와 함께 고이 돌려보내오니 대공녀의 친부가 납치극의 배후를 묻기 위해 입궁했을 때 황제께서 해야 할 답을 친히 정리해 드리지요.]

[눈엣가시 같은 2황자를 치우고 싶어 짐이 니샤의 범죄 길드에 2황자의 암살을 의뢰하였는데,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그들이 ‘실수로’ 헤일리안 대공녀까지 함께 납치해 버렸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때맞춰 당도한 옛 영웅들이 대공녀와 2황자를 무사히 구출하였기에 끔찍한 변고를 막을 수 있었다.]

[짐은 이 일에 백번, 천 번을 고개 숙여도 할 말이 없다. 대공녀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구한다.]

[이후에 광분하여 날뛰는 대공을 달래는 일은 황제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하나 만약 제가 알려드린 대로 처신하지 않으시고 끝내 저의 이름을 거론하신다면…….]

[그때는 로샨의 황제께서 자신의 친아들을 적국 범죄 길드의 손을 빌려 암살하려 했단 사실을 대륙 전역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과 함께 동봉된 것은…….

“이딴 금괴 따위를 보내 짐을 조롱해?!”

계약을 어기고 2황자를 살려 보낸 일을 보상하는 의미로, 오스발트가 지불했던 선급금의 몇 배에 달하는 정령석이 쌓인 궤짝들이었다.

말이 좋아 보상이었지, 실상은 누구보다도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을 틀어쥐었다는 조소와 협박이었다.

“가만두지 않아, 내 결코!”

오스발트는 산처럼 육중한 궤짝들을 무참히 걷어차고 깨부수며 울분을 토해 냈다.

“폐, 폐하!”

“-무슨 일이냐!”

눈치 없는 시종 하나가 그의 분노를 끊고 들어와 말을 고했다.

오스발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버럭 외쳤다.

“헤일리안 대공 각하께서…… 폐하께 독대를 청하옵나이다.”

아, 목뒤가 아리다 못해 눈앞까지 새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오스발트는 제 목을 부여잡고 당장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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