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 *
“……뭐라고?”
황궁, 알현실.
로베릭은 제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게 물었다.
이상해 보일 정도로 얼굴을 붉힌 황제가 옥좌의 팔걸이를 부서뜨릴 만큼 억세게 틀어쥐며 로베릭의 시선을 피했다.
“……니샤의 범죄 길드에 2황자의 암살을 의뢰하였어. 그런데 그자들이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착오가 있었는지…… 헤일리안 대공녀까지 함께 납치해 이번의 변고가 일어났다.”
오, 정확히 무슨 내용의 서신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쏙 빼놓고 모두 황제의 책임으로 돌려 버린 리아트의 술수에 속으로 감탄하며 나는 넋이 나간 듯해 보이는 로베릭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모두 내 탓이다. 진심으로…… 사죄한다, 로베릭. 헤일리안 대공녀에게도 마찬가지로.”
황제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며 옥좌에서 일어나 로베릭을 향해 말했다.
“너…….”
한참 동안을 멍하니 황제를 응시하던 로베릭은, 순간.
“오스발트!!”
그야말로 불같은 진노를 드러내며 감히 황제의 진명을 입에 올렸다.
“너라면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내 피를 이은 가족을 얼마나 갈망해 왔는지……! 한데, 간신히 찾은 내 아이를, 내 유일한 혈육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이런 끔찍한 위험에 빠뜨려?!”
“……미안하다, 정말로…….”
로베릭이 절절히 끓는 분노를 토해 내던 때, 귓가를 할퀴고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로베릭의 주위에서 눈에 띄게 요동치는 공기를 응시했다.
실체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사납게 깔깔거리며 그의 주위에 맴도는 바람의 정령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에시메드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얼릴까?’
에시메드가 나를 향해 입만 벙긋거리며 물어 왔다.
요동치는 바람을 얼린다면 오히려 더 위험한 무기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젓고 그의 손을 붙들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나도 네 아이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한 치도 없었다! 그저 에시메드, 저것을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을 뿐이었어. 내 증오가 얼마나 끔찍한지 과연 네가 아나, 로베릭!”
“그 입 닥쳐라, 오스발트! 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디스가 동행할 때 이런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었어, 만약 시오른 바스테반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더라면……!”
보는 내가 다 두려울 만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로베릭이 몸을 비틀거리며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바로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로베릭의 곁을 맴돌며 낄낄거리던 바람의 정령이 더욱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정신이 나간 듯한, 그래.
광소라는 표현이 가장 걸맞은 웃음을.
……저건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무슨 정령이 저래…….”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정령이 존재한다지만, 저것은 이상하리만큼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심을 굳히고 조용히 소환의 주문을 입안에 머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전부 너 때문이다, 모든 게 다……. 이디스를 잃을 뻔했어. 하나뿐인 내 자식을…….”
“……로베릭?”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걸까.
로베릭은 주위의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는 듯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천천히 로베릭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래, 방해물은 치워 버리면 그만이야. 전부 부서뜨려서, 낱낱이 분해하면…….”
“로베릭, 너 갑자기 왜 그러는……. 로베릭-!”
쿠과과과-!
부유하던 공기가 살아 춤추는 칼날처럼 공중을 할퀴며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디스!”
“이게 뭔…….”
에시메드가 다급히 나를 끌어당겨 로베릭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음박질쳤다.
“……젠장!”
우리가 급히 몸을 피하던 때, 황제는 팔을 들어 제 안면을 보호하며 거칠게 이를 악물었다.
화아아악-!
화려하리만치 작열하는 불길이 너울거리는 채찍이 그의 손아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속에 잊을 수 없이 각인된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나는 에시메드를 바라보았다.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기색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쿠콰아아앙-!
휘몰아치는 폭풍과 강렬하게 너울진 불길이 거칠게 맞부딪쳤다.
키이이잉-!
“으윽…….”
귀를 아프게 할퀴는 파공음이 커다랗게 진동했다.
공기가 요동치다 보니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지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나는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부디 어느 한쪽이라도 승기가 판가름 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바람과 불, 두 가지가 맞부딪치면 무슨 조화가 발생하겠는가.
어느 하나를 잠재울 수 없이 더욱 기세를 북돋아, 서로의 승패를 가르기 위해 맞붙고 또 맞붙더라도……. 오히려 더 불이 붙어 영원토록 서로를 이길 수 없는!
그야말로 싸움에 있어 최악의 상성!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나이아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과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만큼 작열하는 불길이 합쳐져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해진 화마가 알현실 전체를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이아드, 저 불길 좀 잡아 주세요!”
새하얀 물거품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두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외쳤다.
쏴아아아-!
그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기운이 온몸을 시원하게 휘감았다.
그와 함께 알현실을 향해 파도가 몰아닥치는 소리가 거대하게 울려 퍼졌다.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싸아아아-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고막을 가득 채웠다.
“이건…….”
곧이어 눈을 뜨자 짙푸른 바다처럼 일렁이는 나이아드의 옷자락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얼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로베릭과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물? 설마, 이디스 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로베릭은 온몸이 물에 푹 젖은 자신의 몰골을 확인하고 퍼뜩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대체 뭐 하는 거람, 진짜.
설마 남주가 제 속성의 정령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마뜩잖은 심정으로 로베릭을 응시했다.
이 와중에도 꼴사납기는커녕 물에 젖어 더욱 청초한 외모를 빛내며 한동안 눈만 깜박이던 로베릭은 곧 황제를 돌아보며 낯빛을 차갑게 굳혔다.
“로베릭…… 방금의 일은,”
“이디스 덕분에 불필요한 사고는 막을 수 있었군.”
황제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으나 로베릭이 냉담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이번의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도록 하지.”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원한을 읊었다.
* * *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생각하였는데, 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베릭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거짓을 보태지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 혀가 잘릴 죄인 것을 알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살짝 정신이 나가신 것 같으셨어요.”
내 시중을 드는 시녀 중 하나가 나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대공저까지 비우시고 제국 전역을 수색하고 다니셨으니까요. 대공녀님의 안전을 확인할 수 없어 신경이 예민해지셔서 그러셨겠지만, 휘하 기사분들께서 대공 각하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여럿 실려 나갔다고도 하고……. 아, 괜한 이야기까지 말씀드린 것 같네요.”
로베릭이 제 혈육을 향한 집착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시녀를 물리고 꿀을 넣어 달콤하게 우려낸 차를 한 모금 삼키며 생각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도 로베릭의 주위에 맴돌던 그 정령이 신경 쓰였다.
분명 바람의 정령이었지.
로베릭의 속성은 빛, 생명, 바람이었다.
그러나 생명 속성에 대해선 조금 꺼림칙한 것이, 내가 처음으로 정령사의 재능을 각성했을 때 로베릭이 했던 발언이 마음에 걸렸다.
‘이디스. 네가 바로…… 내 잃어버린 축복이었구나.’
잃어버린 축복.
그전에는 일리피아를 향해 오랜만이라고 말하기도 했지.
……뭘까, 대체.
설마, 정령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을 거두어 갈 수도 있는 건가?
“아, 머리 아파.”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우선 로베릭의 속성에 대한 건은 접어두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바람의 정령들이 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것인지만 알아보자.”
하지만 로베릭의 주위를 맴돌며 미친 듯 깔깔거리던 바람의 정령의 괴악함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기에 그것만은 확실히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황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찻잔을 내려놓고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로베릭은 그날, 까딱했다간 황궁의 반을 날려 버릴 뻔한 사건 이후로 더 이상 황제에게 이전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적대감.
원작을 상기해 보아도, 그토록 진실하고 둘도 없이 각별하던 우정이 단번에 끊겨 나간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로샨 제국에서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의 수장이 자신을 향해 적의를 품은 이 상황에 속만 태우는 중이었다.
물론 본인이 자초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마침 로베릭도 이렇게 난리인 판에.
황제를 폐위시키는 건 어떨까?
“……아니다, 그건 너무 일이 커질 것 같아.”
마음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황제를 몰아내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로베릭의 힘을 빌려야 한다.
게다가 현 황제는 비록 2황자와 관련된 문제로 그간의 평판이 많이 훼손되긴 하였지만 미치광이 선황이 저질렀던 실책을 모두 수습하여 로샨 제국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 없는 명군으로 인정받는 이였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폐위를 강행한다면 결국 그것은 황위 찬탈.
즉, 반역이 된다.
게다가 에시메드는 현황의 아들이었다.
심하면 목숨을 잃거나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손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양위시키는 건 어떨까.
이 부분은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진행하면 그럴듯할 것도 같은데…….
“……아니야.”
황위를 에시메드가 물려받으려면 상당한 난관이 존재했다.
두어 살 차이였지만 황태자보다 나이가 어린 것부터 시작해서 주 속성은 아니었으나 부속성으로 어둠 속성 정령을 둔 사실이 여전히 발목을 붙들었던 것이다.
로샨 제국에서는 아무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황태자보다는 정령왕의 축복이라도 받은 2황자를 후계자로 교체하는 데 대다수가 찬성하고 있었지만 국외의 사정은 달랐다.
대륙의 패권을 쥔 대제국의 황위를 어둠의 축복을 받은 황자가 물려받는다는 사실에 타국의 지배자들이 계속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었기에, 결국 에시메드는 친형인 황태자를 몰아내고 차기 황위 계승자로 입지를 굳히기에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다.
로베릭이 타국과 세간의 비난도 감수하고 제 딸의 약혼자인 2황자를 옹립시키지 않는 한에서…….
그러나 만약 위의 방도대로 로베릭의 조력을 받아 에시메드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면, 어린 나이로 인해 필시 섭정이 필요할 테고.
……되레 로베릭의 권한만 더 늘려주는 악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에시메드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면…….”
결국 폐위도, 양위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우선 황제를 치워 낼 계획은 접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