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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0)화 (51/141)

<50화>

* * *

결국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베릭을 다시 황궁에 불렀다.

나 또한 그의 앞에 불려갔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애원하겠다, 로베릭. 제발…… 이번의 일을 용서해다오.”

그가 황제로서의 명예, 위신, 자긍심조차 모두 던져 버리고 나와 로베릭을 향해 무릎을 꿇고 사죄를 고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그 오만하고 여유롭던 황제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로베릭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죄악감마저 느껴지니 신하 된 자에게 무릎 굽히지 마십시오.”

“로베릭!”

그러나 로베릭은 황제의 굴욕적인 사죄에도 별다른 동요 하나 드러내지 않으며 차갑게 말할 따름이었다.

“그대가 내 사죄를 받아들이고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자 답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겠다.”

“……황제 폐하.”

천사 같은 외양도 한몫하였지만 평소에는 더없이 유순해 보이던 로베릭이 한 번 마음을 정한 일에는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직접 체감해 본 나였다.

이대로 두었다간 이들의 분쟁은 지겹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폐위도, 양위도 뜻대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눈을 한 번 내리감았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은 약조를 받아야겠다.

“아버지, 그만 황제 폐하를 용서해 주세요.”

“……이디스,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그의 소매를 살짝 부여잡으며 건넨 말에 로베릭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며 황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에시메드에게서 그 특유의 시린 안광을 뺀 것 같은 짙은 벽안이 불안을 머금고 나를 응시해 왔다.

“이번의 납치에서 제가 가장 분노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친자이신 2황자 전하를 암살하려 하셨단 사실이에요. 어떻게…… 그토록 잔혹하실 수가 있나요?”

나는 말을 멈추고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건, 내가 대공녀에게 할 말이…….”

대체 어둠의 정령이 무엇이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하게 된 걸까?

“2황자 전하는 정령왕께서 제게 정해 주신 반려자세요. ……더 이상 황제 폐하께서 저와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겨워요.”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다시는 2황자 전하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세요. 그리해 주신다면 더는 폐하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대공녀.”

순간, 황제의 낯에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낯 속 오롯이 남은 것은 차가운 증오와 그에서 비롯된 고뇌였다.

이 상황까지 몰렸음에도 에시메드를 향한 증오를 놓을 수가 없는 걸까?

나는 기가 막히면서도 분노가 치밀어 이를 악물고 황제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 아비 된 자로서 아들을 해치려 하는 것만큼의 죄악은 존재하지 않겠지. ……약조하겠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 다시는…….”

결국 침묵의 끝, 황제가 시선을 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짐의 아들, 2황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고 황태자, 3황자와 동등하게 대우하겠다.”

“……황제 폐하의 약조를 믿겠습니다.”

이번의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더 이상 에시메드가 어떠한 목숨의 위협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버지, 황제 폐하께서 약조해 주셨어요. 그러니 이만 화를 풀어 주세요.”

나는 로베릭을 돌아보며 간곡히 청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로베릭은 턱에 힘이 들어가도록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리고 답했다.

“그래, 네가 용서하겠다는데 내가 더 이상 무슨 고집을 부리겠느냐.”

그러나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은 더 이상 황제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깨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견고한 우정의 종말이었다.

* * *

납치극이 빚어낸 변화는 그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디스는 결국 나와 내 전우들이 가서 구해냈다.”

“…….”

“헤일리안 대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도 아무것도 못 하고 멍청하게 헤매기만 한 네놈이 정녕 못 미더워서 더 이상은 이디스를 마냥 맡겨 놓을 수가 없구나. 내가 이디스와 함께 지내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할아버지께서 내뱉으신 폭탄선언에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로베릭이 낯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하, 뭐가 당당하다고 고함을 질러?”

그러나 할아버지의 차가운 조소에 그는 아무런 반발도 못 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이디스에게 이번 일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 제 아들을 미워하다 못해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결국 이디스마저 위험에 몰아넣은 황제가 있는 황궁에 더는 이디스를 홀로 둘 수 없다. 너 또한 더 이상 황제를 신뢰하지 않을 텐데?”

“…….”

“내가 너를 증오하는 만큼 너 또한 나를 혐오하지. 그러나 이디스를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이디스의 곁에 머무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도가 존재하느냐?”

“그건…… 대공저로 다시 데려오는 방법 또한 존재하지요.”

“헛소리!”

할아버지께서 날카로운 코웃음을 치시며 로베릭의 말을 일축했다.

“그 평민 출신 대공비가 네놈이 대공저를 비운 사이에 벌인 짓거리를 망각이라도 하였느냐? 이디스에게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씌우다 들통나 쫓겨난 기사 놈을 다시 불러들였다지? 그 광경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어! 그런 여자가 이디스의 계모 노릇을 제대로 할 것 같으냐?”

“…….”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더 이상 개소리 늘어놓으며 시간 끌지 말고 내 결정에 따라라!”

로베릭은 매우 못마땅한 기색으로 답을 미루었으나 결국 그 또한 이번에 진심으로 신뢰하던 황제의 배신과 샤스티아의 옳지 못한 행동에 적잖이 실망하였던지.

끝내 할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했다.

“할아버지, 이제 정말로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그동안 홀로 얼마나 힘들었겠누, 내 아가…….”

그리고 나는 리아트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토록 빨리 할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다니!

나는 또다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눈물을 글썽이는 할아버지를 꼭 끌어안으며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내가 머무르던 2황자 궁에 딸린 별궁의 공간은 널널했기에 할아버지의 거처를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련의 일들이 모두 마무리된 후, 그간 정들었던 할아버지의 옛 전우분들과의 작별이 찾아왔다.

“이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지.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가야.”

군데군데 하얗게 세었지만 젊었을 시절엔 선명한 초록빛 머리칼을 지녔을 것이 분명한, 시시페아 할머니가 온화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곧이어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는다 생각했던 에제키엘 할아버지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건강하렴, 다음에 꼭 다시 보자꾸나.”

“다음에는 제가 할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놀러 갈게요.”

“그래, 꼭 놀러 오너라. 기다리고 있으마.”

……이 할아버지는, 로베릭을 닮았다.

아니, 올바르게 표현하자면 로베릭이 이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겠지.

참으로 이상하다.

아무런 관계도 없을 할아버지의 옛 전우분께서, 어째서 로베릭과 닮은 외양을 지닌 걸까?

“이만 가자, 시시페아.”

“그래. 에페미아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겠어.”

에제키엘 할아버지는 곧 아내인 시시페아 할머니와 함께 떠나갔다.

“다음에 꼭 리테라에 들르려무나. 이번의 만남이 불발된 것이 아쉽기 그지없구나.”

그리고 사실상 아주 오래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친우분이시자, 알고 보니 내가 그토록 방문하기를 희망했던 리테라의 의장인 메카일라 할머니가 무덤덤한 기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

마지막으로…… 나로서는 그 영문을 알 수 없을 회한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내 모습을 조목조목 뜯어보는 할아버지가 남았다.

다비드라는 이름의, 대지의 대정령사이신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처럼, 아니.

오히려 할아버지보다 더한 기백이 그분의 주위에 성성히 흐르고 있어 그 열렬한 눈길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조건 안전제일, 건강은 제이다. 이번 일로 고생 실컷 했을 테니 앞으로는 괜히 이곳저곳 들쑤시지 말고 얌전히 지내거라.”

한동안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다비드 할아버지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내 머리를 꾹꾹 누르듯이 거칠게 쓰다듬었다.

……뭐지, 대지의 대정령사라더니 어딘가 익숙한데?

성격이나 태도가 이렇게나 오리에드와 닮을 일인가?

“내 손녀딸 함부로 대하지 말고 얼른 가기나 해라!”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분을 올려다볼 때, 할아버지께서 기어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드셨다.

다비드 할아버지 또한 참지 않고 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내가 네 손녀한테 해코지하길 했나, 대체 뭘 했다고 성질이야?!”

“이렇게 작은 아이한테 네 솥뚜껑 같은 손이 가당키나 해? 얼른 가라니까!”

“이게 또 해 보자는……!”

으아아아, 할아버지의 친우분들과 지내는 동안 숱하게 목격해 왔던 싸움이 또다시 불붙으려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제발 그만 좀 하시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콰앙-!

“…….”

바로 그 순간, 로베릭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차분하고 정제된 공격성을 띤 바람이 다비드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를 땅바닥 위로 무참히 쓰러뜨렸다.

“애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들이니?”

그 사이로 메카일라 할머니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등장했다.

“이 진상은 내가 데려가마.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메카일라 할머니는 기절한 다비드 할아버지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퇴장했다.

아직 떠나지 않으셨던 건가……?

나는 점점 멀어지는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할아버지와 어르신들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졌다.

지금도 이런데 한창때엔 정말 얼마나 대단할 지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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