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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2)화 (53/141)

<52화>

“……네?”

어이가 없어 물은 말에 돌아온 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디스, 제발……. 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부디 더 이상 아버지를 힘들게 만들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로베릭은 무릎을 굽혀 내 양어깨를 붙들며 간곡히 말했다.

“아니…… 할아버지랑,”

“그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거라. 듣기도 싫으니.”

무슨 말을 못 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로베릭의 행태에 그간 잊고 있던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그분들에게 나를 맡기는 게 싫으니까 충분히 안전한 계획인데도 저지하는 거잖아.

“…….”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더 이상의 말을 삼키기로 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무슨 설득을 하겠는가.

로베릭에게 동행을 청한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기가 싫었으니까.

진심으로.

* * *

“결국 리테라는 못 가게 되었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나는 이불 속으로 더욱 몸을 웅크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공녀가 되고, 황제에게 에시메드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 내면 뭐하나.

아직도 내 행동을 결정하는 권한은 로베릭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가 반대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언제쯤이면 로베릭과 황제를 몰아내고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콰과과광-!

“!”

아까부터 비가 내리는 것 같더니 꼭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천둥까지 치는구나…….”

모든 불을 꺼 어둠에 물든 방은 하늘에서 땅으로 뇌전이 내리꽂힐 때마다 번쩍, 하얗게 밝아지며 내리는 빗물의 그림자로 곳곳이 물들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굉음에도 점차 익숙해져 편안히 누워 허공을 응시하던 때, 불현듯 일전의 기억 중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로부터 무수히 내리꽂히던 황금빛 뇌전.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고 넋이 나간 내게 지독히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던 소란스러운 사위.

새하얀 로브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내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나를 돌아보던 한 쌍의 검은 눈동자…….

“……젊은 남성, 전기를 다루고, 금빛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잠시만, 어?!”

그 순간, 벼락같이 내리친 깨달음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뭐야, 원작에서 등장했던 인물이잖아……?”

그 이름은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

악녀 마리에트의 충실한 심복이자, 주인공 일행의 앞길을 열심히 방해했던 조연 중 한 명이었다.

* * *

“할아버지-!”

“이디스, 넘어질라! 천천히 오거라!”

다음 날 아침, 나는 날이 밝자마자 부리나케 채비한 뒤 할아버지의 처소로 다급히 향했다.

정원에 나와 신문을 읽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놀라 천천히 오라고 외치셨다.

아니요, 그렇게는 못 해요. 급해 죽겠다고요!

“헉, 헉…….”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기에 이리 숨을 헐떡일 만큼 뛰어오느냐. 자, 물이라도 좀 마시거라.”

할아버지께서 건네주신 물을 몇 모금 삼키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좋아, 나는 의욕을 다지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장착한 채 순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일이 워낙에 많아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날 있잖아요.”

“그날?”

“네, 니샤의 국왕 전하에게 납치당한 저를 구하러 오셨던 할아버지와 어르신들이 전투를 벌이던 날!”

“아…….”

할아버지께서 얕은 침음을 흘리셨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랑 함께 저를 구하러 오셨던 그 젊은 사람은 어디로 간 거예요? 잠시 동안 같이 지낼 때도 보이지 않았는데!”

“…….”

리테라로 향하는 일도 좌절되고, 다른 수수께끼들도 명쾌히 풀어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남자가 원작의 그 마인하르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누구인가.

마리에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자, 그녀의 내밀한 속내까지 모두 알고 있던 자타공인 악녀의 최측근이 아닌가!

마리에트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방도에는 리테라로 향해 그녀를 축복한 정령왕인 로어에 대한 기록을 탐색하는 것과, 마인하르트를 만나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묻는 것이 있었으나.

리테라행이 좌절되었으니, 나는 마인하르트를 찾아 마리에트에 대해 물어보는 것으로 계획의 머리를 틀었다.

할아버지라면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

마인하르트는 마리에트의 심복이기도 했지만 바스테반 공작이 친히 거두어 기른 아이이기도 하였으니까.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답을 기다리던 때였다.

“……글쎄다, 눈 깜박할 새 자취를 감추었더구나.”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이상하리만큼 당황하시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 뭐지?

나는 뜻밖의 반응에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하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어…… 그럼 그 사람의 이름은 뭐예요?”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 그렇겠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저 이름 하나 말해주면 되는 것인데도, 망설임이 다분한 기색으로 입을 달싹이시다.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였지, 아마.”

겨우 이렇게만 대답하실 뿐이었다.

“……?”

뭔가 이상했다.

다행히도 내 추측대로 그 남자는 악녀의 심복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가 맞았으나, 할아버지께선 이상하리만치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시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마인하르트가 원작에서 할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은 인물이었던가?

기억을 뒤져 보았으나 딱히 그런 묘사는 없었다.

그저 마인하르트는 마리에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그들 부녀에게 충성을 다했던 인물로 그려졌을 뿐.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기회마저 이대로 놓쳐 버릴 수는 없다.

“그렇구나, 그럼 그 마인하르트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저는 이름도 들어 본 적 없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분인데 할아버지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람인가요?”

나는 오기를 품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처럼 할아버지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이디스, 그 사람이 그리도 궁금하더냐?”

“네!”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에 대해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 뜸을 들이다 내가 한참을 계속 조르자 겨우 입을 열고 마인하르트의 과거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어릴 적 제 가문이 몰락하고 거리를 떠돌던 아이였지. 그걸 네 어머니가 발견해 데려왔단다. 나 또한 애타게 그 행방을 찾아 헤매던 차라 직접 거두어 자식처럼 길렀지. ……내가 차마 내칠 수 없는 아이였어.”

뒤에 덧붙인 말은 알아듣기 힘겨울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셨다.

마인하르트의 과거가 어떠하였는지는 일절 서술되지 않았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어째서 그가 마리에트에게 그토록 충성했던 건지 과거를 듣고 나니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거취를 알아야 접근할 방도를 찾든가 하지.

“……이런, 이디스. 이 할아비가 요즘 시간을 정해 두고 산책을 하고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보아야 할 것 같구나.”

“……응? 그럼 저랑 같이하세요.”

“아니, 아니다. 오랜만에 유프스 백작과 같이 운동도 할 겸 만나기로 했거든. 다음에 같이 하자꾸나. 그럼, 이만.”

그러나 할아버지는 자리를 피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바삐 일어나 떠나 버리셨다.

“……엥?”

할아버지가 대답을 피하실 거란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왜 저러시는 거지…….”

생각보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기묘한 거부 반응과 막막해진 앞길에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어라, 이건 뭐지?”

그렇게 돌아온 방, 탁자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들어 올려 확인해 보았더니 다름 아닌 초대장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데다 범상치 않은 출신 성분 때문에 나를 자신의 가문에 초대하고자 하는 귀족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런데 이 초대장은 대체 어느 독특한 귀족가에서 보내온 걸까?

“……칸델?”

발신인은 칸델이라는 가문 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인데.”

황족과 약혼하게 되면서 로샨 제국에 존재하는 귀족 가문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배운 터라 초대장에 적힌 가문의 이름이 현존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일단 읽어 보자.”

나는 초대장을 펼쳐 그 안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렸다.

“위대한 칸델 가문의 정기 연회에 귀하,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을 초청합니다. 연회에 참석하시려면 초대장 하단에 그려진 문양에 피를 떨어뜨리세요……? 뭐야, 이 정신 나간 소리는.”

그 설명대로 초대장의 하단에는 거대한 뱀이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자신의 꼬리를 문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거야?”

아무리 보아도 질 나쁜 장난인 것 같았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맞다. 딱 행운의 편지 비스무리한 건가.

나는 침대가에 내려온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녀들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이디스 대공녀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일렬로 들어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탁자 위에 이런 초대장이 올려져 있던데, 누가 가져다 놓은 거야?”

나는 종잇장을 팔랑거리며 물었다.

시녀들은 내 손에 들린 초대장을 응시하더니, 곧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난처한 기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 죄송하지만 대공녀님, 저희는 초대장을 가져다 놓은 적이 없습니다.”

“……뭐?”

아니, 아무도 안 가져다 놓은 초대장이 왜 탁자 위에 고이 놓여 있던 건데?

“그럴 리가. 너희가 아니면 누가 가져다 놓았겠어?”

“정말로 그런 초대장이 온 적이 없는데……. 어느 가문에서 보내왔는지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묻긴 물었지만, 솔직히 나도 슬슬 이 초대장이 꺼림칙하게 여겨지고 있다.

“발신인은…… 칸델, 이라고 적혀 있어.”

나는 다시 한번 초대장의 겉면을 확인하며 그녀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예?”

“대, 대공녀님, 지금 무슨 말씀을……!”

“맙소사, 위대하신 불의 정령왕이시여, 저희를 지켜 주소서!”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일이람?”

네다섯 명의 시녀들이 하나같이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경악을 뛰어넘어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초대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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