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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4)화 (55/141)

<54화>

* * *

“대체 무엇 때문이지……?”

시녀들, 마인하르트, 종래엔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칸델이라는 가문은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불길한 곳이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어째서 그토록 기피하며 두려워하고, 증오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다.

“…….”

아무도 말하지 않겠다면…….

나는 표정을 굳히며 시녀를 불렀다.

더 이상 온전히 신뢰할 수 없어 이전보다 거리를 두었던 나의 스승, 유프스 백작에게 모두의 입에 오르는 것이 금지된 가문의 과거를 묻기 위해서.

* * *

이번에도 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칸델 가문이라…….”

그러나, 예상 밖으로 유프스 백작은 내 물음에 온화하던 안색을 살짝 굳히면서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칸델. 정확히는 칸델 공작 가문이었지요.”

“공작가요?”

나는 생각보다 지체 높은 작위에 놀라 되물었다.

유프스 백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바스테반 공작가와 함께 당시의 로샨 제국에서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가문이었습니다.”

아련한 향수를 머금은 목소리가 내가 태어나기 수십여 년 전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냈다.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명이 있어 그동안은 말씀드리지 않았으나…… (허허, 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디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재앙의 개시’가 이 땅에 도래했던 때 대륙을 구원한 7인의 영웅 중 한 명을 배출했던 뼈대 깊은 명문가였지요.”

“……7인의 영웅이요?”

대정령사들 중 누굴 가리키는 거지?

그들의 이름 중 칸델이라는 성을 지닌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아.

설마.

나는 단 하나,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분께서는 대공녀님의 외조부님과 어린 시절부터 아주 절친한 관계셨지요. 칸델 공작 가문의 고귀한 공녀셨던 그분의 성함은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이셨습니다.”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 세페미아 -]

흐리게 덧대어져 읽을 수 없었던 그녀의 마지막 이름이 밝혀졌다.

칸델.

그녀는 로샨 제국에서 사라진 가문의 공녀였던 것이다.

“대공녀님의 외조부님과 주디스 님, 에제키엘 님께서는 로샨 제국이 낳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녀분들이셨습니다.”

할아버지와 아주 절친했다던 사람이 바로 그 꺼림칙한 칸델 가문의 공녀였다니.

그런데 어째서…….

‘어디서 그런 이름을 들었느냐, 네게 그 이야기를 흘린 자의 이름을 당장 말하거라!’

할아버지께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도 생생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맹렬한 증오까지 내비치셨던 걸까?

“……유프스 백작님.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러는데…… 그런 위대한 영웅을 배출한 가문이, 어째서 지금은 멸문당해 이름조차 꺼내기 불길한 존재로 전락한 건가요?”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유프스 백작은 말문을 흐리며 한동안 답하기를 망설였다.

“그 이야기는 지금의 대공녀님께서 꼭 아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고 계셨으면 합니다.”

안경 너머로 언제나 온후한 빛을 머금고 있던 은빛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칸델 공작 가문은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범한 죄로 이 제국에서 사라졌습니다.”

“…….”

“영원히 부활할 수 없지요. 그 후손이 남아 있든, 남아 있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궁금했던 이야기는 듣지 못한 채 유프스 백작과의 대화는 끝을 맞이했다.

* * *

“…….”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전기의 대정령사이자 칸델 가문의 공녀 출신으로,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관계였다는 사람.

“금기를 어겨 로샨 제국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대체 무슨 용납 못 할 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무거운 벌이 내려진 걸까?

“아, 아냐. 쓸데없는 데 매달릴 시간 없다고.”

나는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요 며칠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마인하르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다.

“마인하르트와 접촉할 방도는 다른 것을 찾아보자. 마인하르트를 축복한 정령들이 누구였더라……?”

나는 가물가물한 원작을 떠올리며 천천히 방으로 들어섰다.

“……어?”

그리고 탁자 위에 고이 올려진 낯익은 물체를 발견하고 소름이 돋은 채 그것을 응시했다.

“저건.”

칸델 가문에서 내게 보내온, 꺼림칙한 초대장.

“뭐야, 왜 또 올려져 있어?”

분명 이전의 밤, 갑작스레 나타났던 마인하르트가 전격으로 태워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그런데…… 이토록 멀쩡한 형태로 나타나, 다시 한번 내 방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소름 끼쳐.”

나는 몹시 꺼림칙한 심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주받은 곳. 범해서는 안 될 죄악을 스스로 행한 곳.

그러나 위대한 영웅을 탄생시켰던 과거의 명가.

이미 멸문당해 사라진 가문에서 계속해서 초대장이 날아온다는 사실이 매우 기이하고 섬뜩했지만…….

“어쩌면.”

마인하르트와 마리에트, 할아버지, 또 이 세계가 지닌 비밀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굳혔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오리에드]!”

후우우웅-

발치에서 은근한 진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중력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무슨 용건이지?]

언제나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음성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허상처럼 사라지며.

“……도움을 청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나는 눈을 떠 천천히 숨을 내쉬고, 오리에드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도움?]

“네, 저곳에 놓인…… 꺼림칙한 초대에 부응할 생각이거든요.”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초대장을 가리켰다.

이 기묘한 초대에 응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그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해 놓는 것이 인지상정.

“태워도 태워도 계속 초대장이 날아와서 너무 꺼림칙해요. 오리에드가 저 초대장의 정체가 뭔지 확인해 주세요.”

오리에드는 정령왕이니까 별다른 일 없겠지.

더 이상은 저 꺼림칙한 물체에 손끝 하나 대기 싫었기에 나는 오리에드에게 대신 초대장을 확인해 달라 청했다.

[……그간 많은 일이 일어났었지. 잠시만이라도 조용히 지내면 안 되겠느냐?]

제게 부탁해오는 나를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오리에드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주위 환경이 저를 가만히 두질 않는걸요.”

[하…….]

오리에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초대장에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이건…….]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초대장을 열어 보던 순간.

화악-!

“!”

눈 깜박할 새 검은 돌풍이 터져 나와, 오리에드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오, 오리에드?! 괜찮아요?!”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기에 기겁하여 외쳤으나.

“……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의문에 잠겼다.

[별건 아니다. 한데…….]

검은 돌풍은 당장이라도 오리에드를 어떻게 해 버리겠다는 기세로 몰아닥쳤으나 곧 꾸물거리는 이상한 질감으로 변해 그의 몸을 휘감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뭐야, 저거.

나와 오리에드는 의아함과 약간의 불쾌감을 머금고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순간, 검은 형체는 몰아칠 때와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오리에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먹다 뱉은 거야?”

꼭 한참 동안 우물거리다 도저히 못 삼킬 맛에 뱉어 버린 것처럼 진절머리내듯 몸부림치며 떨어져 나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

나는 실수로 중얼거리고 오리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분명 빡친 것이 분명한 기색으로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꾸물거리는 검은 형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당장 갖다 버리는 게 좋을…… 으아아악?!”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잇던 그 순간, 저 멀리 떨어져 꾸물거리던 형체가 마치 나를 발견한 것처럼.

[-이디스!]

처음 몰아닥쳤던 것처럼 검은 돌풍을 일으키며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코앞까지 닥쳐와,

“-오리에드!”

그대로 나를 집어삼켰다.

검차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시야로 오리에드가 손을 뻗는 모습이 보여왔으나.

“…….”

곧이어 찾아온 것은 완전한 침묵이었다.

* * *

붙잡을 새도 없이 이디스를 휘감은 검은 돌풍은 초대장 속으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으드득-

홀로 남은 오리에드는 이를 갈며 살기로 형형한 눈빛으로 이디스를 집어삼킨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정령사가 사라졌음에도 소환이 풀리지 않았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현상인가.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군. 이런 비열한 장난질을 일삼을 놈은…….]

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오리에드는 분노를 곱씹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르카네.]

* * *

유프스 백작은 서고에 홀로 남아 서적을 정리했다.

평소 어린 제자의 질문과 그의 화답으로 생기가 깃들었던 서고는 작은 아이가 떠나가자 지독히도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칸델이라.”

그 이름을 설마 다시 들어볼 줄은 몰랐다.

유프스 백작은 너무도 멀어, 이제는 어찌해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허망히 중얼거렸다.

“저의 친우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부시게 빛나던…… 로샨 제국의 미래였지요.”

그는 제자를 향해 차마 내뱉지 못했던 진실을 홀로 읊조렸다.

“하지만 주디스는……. 그 아이의 가문은, 어찌 그리도 그 아이에게 잔혹했던지요.”

세월이 깊은 잔상을 남긴 눈꺼풀이 피곤한 듯 내리 감겼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에서 배출한 영웅을 생각한다면 결코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던 금기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에게 인신 공양을 행하였으니까요.”

운명이 선택한 지고의 영웅을 때 이른 죽음으로 이끌었던 추악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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