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6)화 (57/141)

<56화>

‘어릴 적 제 가문이 몰락하고 거리를 떠돌던 아이였지. 그걸 네 어머니가 발견해 데려왔단다. 나 또한 애타게 그 행방을 찾아 헤매던 차라 직접 거두어 자식처럼 길렀지. ……내가 차마 내칠 수 없는 아이였어.’

할아버지께선 가문이 몰락하고 거리를 떠돌던 마인하르트를 마리에트가 발견하고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마인하르트가 칸델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함구하셨던 거지?

저주받은 가문.

초대장을 보내 알 수 없는 힘으로 나를 강제로 끌고 온 가문.

그리고 뜻밖에 마주한, 마인하르트의 어린 시절임이 분명한 저 소년은…….

“…….”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영혼마저 텅 빈 것 같은 공허한 눈빛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누구일지 모를 인물을 조각한 형상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발치까지 흘러내리는 곧고 탐스러운 장발.

매끈한 몸의 윤곽을 따라 찰랑거리듯 늘어뜨려진 의장.

두 개의 거대한 뿔이 돋아난 무엇인지 모를 짐승의 뼈로 추측되는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려 더더욱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정령을 조각한 것만은 분명했다.

사위에 흐르기 시작한 기묘하고 섬뜩한 기류에 나는 두려움이 치밀어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마인하르트가 등장한 것은 차치하고.

이제 정말로 인신 공양이 시작되는 건가?

어떡하지?

무슨 짓을 해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칸델 가문의 인간들이 거대한 홀의 중앙에 위치한 술식의 바깥을 빙 둘러싸듯 선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일제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새카만 술식에서 황금색 전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검은색과 뒤섞인 금색 전류가 바닥 곳곳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광경을 응시하며.

나는 드디어 인신 공양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제물로 바쳐져 나와 상관도 없는 이의 소원을 이루는 희생양이 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나았다!

“마인하르트…….”

저 소년은 어린 시절의 마인하르트였다.

그러니 나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인하르트!”

그러나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은 오직 그뿐이었다.

쿠구구궁-

공작저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듯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제발, 마인하르트-!”

두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그의 이름을 간절히 외치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거대한 조각상이 자리한 선단 위에 서 있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마주친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너무나 텅 비어 버린 듯해, 아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보단 섬뜩함이 먼저 느껴지던 저 소년은 분명 마인하르트가 맞다고.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으나 그 소년이 나를 응시하는 순간 가동되던 의식의 흐름이 조금이나마 느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칸델 가문의 어느 혈족이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곧이어 분노한 기세로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공양의 진행을 방해했다고 내게 달려오기라도 하는 걸까?

두려움에 잠겨 고개를 돌리던 때였다.

쿠과아앙-!

“-!”

거대한 굉음과 함께 눈부신 전격이 코앞으로 내리꽂혔다.

심장을 쥐어 짜내는 듯한 충격이 급작스레 몰려왔다.

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콰앙-!

다시 한번 전격이 내리꽂혔다.

온 바닥이 산산이 조각나 무수한 방향으로 파편이 튀었음에도 나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튕겨 나갈 뿐이었다.

제대로 숨조차 내쉴 수 없었으나, 그 현상이 몹시 당황스러워 눈이 부시도록 먹먹한 사위를 응시하던 때.

쿠과과과과-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마지막으로 울렸고.

“…….”

자욱한 연기 한가운데,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의 장막이 모두 걷히고 나타난 이의 정체는 어느 여인이었다.

흐르는 시간은 붙잡을 수가 없어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대라는 사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나, 세월의 더께는 아름답게 쌓여 단 하나의 추함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화려하고 매혹적인 인상을 지닌 미인은 마인하르트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붙든 채.

그 소년과 꼭 닮은 검은 눈동자를 분노로 형형히 불태우며 노호를 토해 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가하려던 것이냐!”

격렬한 분노를 쏟아 내는 그녀의 주위로 밤하늘을 밝히며 뜨겁게 타오르는 황금빛 별을 삼켜 낸 용맹한 사자와 같은 기세가 강렬하게 맴도는 듯했다.

……그런데, 대체 누구지?

그녀의 노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어린 마인하르트와 그 아이의 손을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힘으로 붙들었으나…….

어째서인지 그 소년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이년!”

그 순간, 한눈에 보기에도 지체 높아 보이는 노인이 금빛 뱀이 휘감은 검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걸어 나오며 소리쳤다.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뭐라고?

그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외친 이름에, 나는 넋을 놓았다.

어린 마인하르트의 손을 잡고 선 저 여자가……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이라고?

“가문의 중대사에 끼어들다니,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내가 충격에 사로잡혀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때.

그녀, 주디스는 호통을 치는 노인의 말에 부자연스러울 만치 격양된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노망이 왔나 보네, 오라버니.”

그리고 웃음을 뚝 그치고 서늘히 읊조렸다.

누이라고 여기기엔…… 지나치게 젊은 외관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오라버니라 불린 노인이 자글자글 주름진 낯을 추하게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비켜라, 모두 가문을 위한 일이다!”

“그래? 가문을 위한 일이라…… 그래서 아홉 살 난 어린아이를 어둠의 정령왕에게 산 제물로 바치려 했어?”

주디스가 느른히 미소 지으며 던진 질문에 나는 경악했다.

칸델 가문의 혈족으로 추정되는 마인하르트를 어둠의 정령왕에게 산 제물로 바치려 했다니?

그렇다면 설마 방금의 인신 공양은…….

“그리고 저 뼛조각들은 다 뭐지? 어디 한번 설명해 봐, 오라버니.”

이어진 주디스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나와 함께 제물로 바쳐졌던 사람들이 있었던 곳을 돌아보았다.

“……!”

그리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입을 틀어막고 삼켰다.

기백 명은 족히 넘을 듯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백골로 변모하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이런 끔찍한 의식의 희생양으로 삼았으면서…… 이것도 가문을 위한 일이라 자위하겠다는 건가?”

“네년이 감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작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주디스는 곧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오라비라 부른 노인을 향해 외쳤다.

“당신들의 혈족인 내가 무엇으로 영웅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잊었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가 스스로를 부서뜨릴 듯 억세게 주먹을 쥐었다.

“당장에라도 내 거죽을 찢어발기고 뼈를 갈아버리고, 영혼을 진창 속 나락에 처박기 위해 달려드는 아르카네의 권속들을 상대하며 내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버텨 냈는데!”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작열하는 분노가 뒤섞인 절규는 듣는 이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나라고 두렵지 않았겠어? 끝없는 위협에 마음은 너절해지고 몸은 계속해서 깎여 나가고. 그런데도…… 나밖에 없으니까.”

분노로 몸서리치는 목소리가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내가 포기하면 이 세상은 끝내 멸망의 길에 들어설 것이 분명하고, 그래. ……내 혈족들인 당신들도 온전한 꼴로 죽음을 맞이하진 못할 테니까! 그랬기에 내가, 어떻게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 이 제국과 세상을 지켜냈는데!”

점점 격해진 어조로 고함을 토해 내던 그녀의 두 눈에서 피가 뒤섞여 소름 끼치리만큼 붉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그놈의 아들이 무엇이라고. 더 완벽한 영웅을 얻겠다고 이 어린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가며…… 죄 없는 생명까지 희생시켜,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카네를 소환하여. ……감히, 소원을 빌고자 해?”

아름다운 낯 위로 피눈물을 흘리며 실소하듯 읊조리던 그녀의 낯 위로 증오 서린 광기가 진하게 감돌았다.

“그러고도, 정녕 너희가 사람인가?”

나는 아연히 질린 채 그녀의 절망을 똑똑히 응시했다.

“…….”

완전히 압도된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며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는, 오라비라 칭하던 노인을 향해 주디스가 나직이 말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역겨운 너희를 더 이상 이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게 둘 수 없다.”

꿈에도 잊지 못할.

한 자 한 자 타들어 가는 증오를 새긴 말이 끝맺어지던 순간.

두 눈이 멀어 버렸다.

쿠과과과과-!

아니, 멀어 버린 것처럼 ‘느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눈부신 섬광에, 그 황금빛 뇌전의 광란에 나는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

“아……!”

웅대한 하늘의 분노에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삼켜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반쯤 정신을 붙든 내 주위로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는 새카만 잿더미로 변한 것들이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럽던 저택은 찰나의 시간 동안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라도 흐른 듯 폐허로 변모되어 있었다.

“……울지 말거라.”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나의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퍼뜩 시선을 돌리자 어린 마인하르트가 두려움에 질린 눈길로 누군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의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 누군가는 주디스였다.

온몸이 전류에 타들어 가 금방이라도 잿더미로 바스라져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깨달았다.

방금의 일을 행하기 위해 그녀가 한계 이상.

인간이 범해서는 안 될 지경의 권능까지 전부 끌어냈음을.

작열하는 뇌전에 결국 자기 자신마저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린 마인하르트는 그 공허하던 낯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를 내려다보던 주디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낯 위로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처럼 하잘것없는 마음에 얽매이지 말고 네 삶을 살아가거라. 자유롭게, 그 어떤 것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도 너 자신을 희생하지 말고.”

검게 물든 눈꺼풀 사이로 모든 생명의 빛이 잠겨 어둑해진 눈동자가 모습을 감추었다.

“희생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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