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상을 구한 영웅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
세상을 구한 영웅은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자신의 혈족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마침내 지옥으로 끌고 가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나는 재로 흩날려 사라진 그녀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차오르는 먹먹함에 얼마 동안 침묵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마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피하셨는지.
내가 칸델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던 때 어째서 그토록 분노하셨는지.
그토록 격렬한 증오를 내비치고 지친 듯 얼굴을 감싸던 할아버지께서 대체 어떤 심정이셨을지를.
“…….”
주디스가 재로 흩날려 사라진 후 마인하르트는 차라리 울음을 터뜨리는 게 나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곳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주디스는 이미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소환 술식을 온전히 파훼한 뒤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망설이며 소년을 향해 걸음을 떼던 그 순간이었다.
화악-!
“!”
누군가 팔을 강하게 잡아채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놀라 헛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분명 알려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낯익은 목소리가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아…….”
나는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현실의 마인하르트가 내 팔목을 붙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인하르트?”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영문 모를 감정이 요동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홀로 남겨져 있었던 아이가 떠올라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두커니 서 있던 작은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허상인지 과거의 한 장면이었을지 모를 세계의 바깥에서, 해가 저문 것인지.
천장에 난 원형의 창으로 주홍색 석양빛이 들어와 모두가 떠나가고 남은 이 텅 빈 쓸쓸한 폐허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마인하르트.”
방금의 그 광경이 과거에 실존했던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정체 모를 초대장이 나를 붙들기 위해 보인 허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마인하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나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바스락-
그 순간, 그와 나만이 오롯이 살아 있던 공간에서 들려올 리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내 시야에 보여서는 안 될 광경이 들어왔다.
“……뭐야?”
주디스의 권능에 칸델 가문의 혈족들은 재가 되어 스러졌다.
분명, 그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마, 마인하르트!”
곳곳에 쓰러져 있던 잿더미들이 다시 살아나, 생전의 모습을 되찾으며 우리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살아생전과 모습은 똑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생기가 사라져 텅 비어 죽어 버린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흐익!”
바로 그때, 단단한 팔이 내 몸을 휙 들어 올려 품속에 안아 들었다.
내가 가리킨 광경을 말없이 응시하던 마인하르트가 한 행동이었다.
갑작스레 들어 올려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전히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파지지직-
“이건…….”
마인하르트의 발치로 황금빛 전격이 서서히 피어올라 너른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탁, 타다다닥-!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시체들은 전격의 진에 그대로 타 버리며 이전의 새카만 잿더미로 되돌아갔다.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친 건가?
나는 생명을 잃었음에도 살아 움직임을 흉내 내는 시체들을 황금빛의 전격이 촘촘히 피어올라 재로 되돌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묘한 설렘을 느꼈다.
마인하르트도 상시 소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구나.
정령의 이름 한 자 내뱉지 않고서 자유자재로 권능을 다스리는 모습은 절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쓸데없이.”
“!”
그렇게 나 혼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때, 무심히 닫힌 곧은 입매가 설핏 비틀리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는 괜히 흠칫 놀라 그의 기색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그 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맙소사…….”
바로 마인하르트가 둘러놓은 전격에 타들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던 시체들이었다.
재로 바스러진 부위가 다시 뭉쳐지며 끈질기게 걸음을 이어오고 있던 그것들은 시간이 흐르자 점점 전격에 타 버리는 속도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대체…….”
나는 마인하르트의 옷자락을 무심코 꽉 붙들며 두려움에 잠겼다.
쿠구구구-!
그 순간, 죽은 시체들이 딛고 선 지면이 박살이 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뭐야, 이건 또!
“떠, 떨어진다!”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던 시체들은 지면이 무너져 내리고 드러난 끝없이 어두운 무저갱으로 추락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다행인 일이 아니냐고?
덩달아 나를 안고 서 있던 마인하르트의 발아래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게 문제였다!
이대로 가다간 시체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게 분명해, 도저히 두 눈을 부릅뜬 채 추락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앞일을 두려움에 질린 채 기다렸다.
“……?”
그러나 공기가 내 몸을 사납게 할퀴기는커녕, 부드러운 실바람이 나를 감싸며 지나갔고.
공중에 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건…….”
……바람?
나는 머리칼을 살며시 흔들며 불어오는 실바람과, 허공에 부유한 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선 마인하르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째서 우리가 추락하지 않고 공중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추락할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이야기했다.
마인하르트의 속성 중에는 바람도 있었던 것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기억해 두며, 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무저갱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바닥은 왜 무너져 내린 거야?
쿵, 쿠궁-
“아, 이건 또 뭐야…….”
뒤이어 거대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게 몇 번째지?
나는 이젠 지친 심경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의 일로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앞으로 태워 버려도 계속 날아오는 발신자 불명의 물건에는 결코 호기심도 가지지 말 것.
설사 정령왕을 동반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상기하라.
지긋지긋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곤경에 처하지 않았는가.
“……어라?”
그런데…… 이번 진동은 뭔가 달랐다.
꼭 누군가의 걸음걸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디스 님.”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던 때, 불현듯 마인하르트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들었던 고개를 내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나는, 언제 나타났을지 모를 이를 마주하고 멍하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오리에드?”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오리에드가 마인하르트처럼 공중에 선 채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
하지만 정말 오리에드가 나를 찾아온 것이라면…….
나는 환히 미소를 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
미동 한 점 없이 나를 응시해 오는 흉포한 안광을 발견한 순간, 나는 직전의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마인하르트. 오리에드가 왜…….”
목 뒤까지 소름이 쭈욱 돋아난 채, 마인하르트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빛이 왜 저래요……?”
분명 저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나를 축복한 정령왕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동일했으나.
늘 엄격하고 서늘하던 그의 황금빛 안광에 스며 탁하게 빛을 흐리는 검은 기운과, 나를 향한 이질적인 감정이 깃든 눈빛에 나는 그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이 세상에…….]
이디스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적막에 사로잡힌 방에 홀로 남아 이디스를 집어삼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한 초대장을 살벌히 응시하던 오리에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감히 내가 밟지 못할 대지는 없다.]
그것이 설사 허상 위에 지어진 것일지라도.
오리에드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권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초대장은 마치 오리에드를 비웃듯 그의 힘을 밀어냈다.
[…….]
오리에드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삭혔다.
필연적으로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이 뇌리에 떠올랐다.
[오리에드. 너는 네 ‘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게 있어 이 우주의 생명과 한 점 다름없는 기생충 한 마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림자에 파묻혀 자신을 향해 비웃듯 읊조리는 그 형체.
아르카네에게 당했던 굴욕적인 기억.
[…….]
저열한 비웃음이 환청처럼 맴도는 듯했다.
분노와 무력함에 고뇌하던 오리에드는 결국 선택했다.
그의 근원 속, 깊숙이 새겨진 봉인을 푸는 길을.
[명심해.]
그 순간, 또 다른 기억이 솟구쳐 그를 붙들었다.
[이 봉인은 결코 풀어서는 안 될 금제.]
햇볕 아래 놓여 있음에도 결코 녹아내리지 않고 영원히 얼어붙은 만년설의 색이 이러할까.
은은한 빛을 머금은 백발이 매몰찬 고갯짓 하에 공중에 흩날리고.
움푹 파인 날카로운 눈매 속 맑은 은빛을 머금은 회안이 모든 것을 꿰뚫는 강렬한 지성을 품은 채 그를 응시하며.
[그림자를 몰아낼 존재는 너의 ‘이면’이 아닐 것임을, 그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마라.]
그런 성정임을 지극히 알고 있었음에도 혀를 내두를 만큼 냉담함을 머금은 음성이 엄중히 경고했다.
[…….]
대지의 정령왕에게 감히 경고하는 이의 권능이 다스리는 영역은 지혜요.
그의 진명은 로어라.
세상의 진리를 꿰뚫은 현자라 자부하는 이들 중 그를 뛰어넘을 자는 영원토록 탄생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정령왕들조차 힘의 우위를 따지지 않고 신뢰하는 존재.
바로 지혜의 정령왕, 로어였다.
그가 자신을 향해 친히 건네어 준 충고를 되새기던 오리에드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내가 축복한 아이를 눈앞에서 빼앗기게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겠나.]
로어의 충고조차 그를 막아 세울 수 없었다.
이 모든 선택의 이유는, 오직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한 작은 생명을 위함이었으므로.
마음을 굳힌 오리에드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모든 정령왕이 모여 그에게 새겨 넣었던 오랜 금제가 풀려나고.
곧이어 다시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찬란한 금빛을 머금고 있었으나, 그 속에서 불길한 밤의 저변이 남긴 그림자가 어둑이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