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8)화 (59/141)

<58화>

* * *

마치 검은 안개가 뒤섞인 듯 일렁거리는 눈동자.

만면 가득 새겨진 진한 미소.

그동안 보아 오던 서늘하고 무심한 오리에드의 표정이 아니었다.

뭔데, 진짜 뭐냐고.

나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오리에드의 미소를 응시하며 어쩔 수 없이 작게 몸서리쳤다.

“…….”

마인하르트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올려다보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오리에드를 돌아보았는데.

바로 눈이 마주친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싶더니.

[네가 바로 오리에드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로구나.]

곧 만면 가득 진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

갑작스러운 삼인칭이라니.

오리에드가 진짜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저것도 허상인가?

오리에드의 외형을 흉내 낸 삿된 존재가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구기던 그때.

콰아아앙-!

안 그래도 폐허처럼 곳곳이 내려앉았던 천장이 박살 나며.

“히이이익!”

그 틈새로 전체적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몸에서 흙더미를 후드득 떨어뜨리는 거인이 제 얼굴을 밀어 넣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뭔데, 이거!

좀비물에서 이젠 진X의 거인이냐?!

“클래이로군요.”

“네?!”

눈 코 입이 달릴 자리에 검은 구멍이 하나씩 뚫린, 딱 흙을 끌어모아 인간의 형상만 띠도록 반죽한 듯 기괴하리만치 성의 없는 생김새의 거인을 올려다보며 공포에 잠겼을 때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한 마인하르트가 말했다.

클래이라면…… 아차, 너무 놀라서 순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유프스 백작이 건넨 교재에서 보았던 대지의 상위 정령의 형태를 기억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지의 상위 정령이 여긴 왜……. 설마?”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리에드의 모습을 취한 누군가는 나를 응시하며 마치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

“눈 감으십시오.”

“네? 어째서…….”

……뭐가 즐거운 거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오리에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마인하르트가 다급히 말했다.

의아함을 품을 새도 없었다.

콰아아앙-!

클래이가 그 커다란 손아귀로 저택 내부를 휘저으며 우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쿠궁-!

마인하르트는 나를 끌어안은 채 클래이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했다.

나는 오리에드를 따르는 대지의 상위 정령이 나를 공격해 온다는 상황이 도저히 납득 되지 않아 망연히 마인하르트의 팔에 안겨 있었다.

이 상황이 뜻하는 진실은 단 하나였다.

……오리에드가, 권속을 움직여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

내 앞에 나타난 저자는 오리에드의 모습을 취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오리에드 본인이라는 사실을.

왜?

어째서?

내게 복수를 하라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마저 아낌없이 이용하라 말했던 당신이.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야……?

그 순간, 나와 마인하르트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가까이 다가왔던 정령의 손이 코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흙 부스러기의 촉감에 나는 그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인하르트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히리안이군요.”

“……네?”

“지금 오리에드의 모습을 하고 저와 당신을 공격하는 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깜박이며 마인하르트를 홱 올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오리에드의 모습을 했는데, 유히리안이라니?

“유히리안이 누군데요? 아니, 그렇다면 어째서 오리에드와 똑같이 생긴 거죠?”

황당함에 되묻던 때였다.

[하……! 이것 봐라.]

오리에드의 모습을 한 정체 모를 존재, ‘유히리안’이라는 자가 핏줄이 시퍼렇게 불거진 제 팔목을 억세게 쥐며 비웃듯 중얼거렸다.

[근원에 처박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제 것만큼은 지키겠단 것이냐?]

근원, 제 것.

무언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단서가 부족해 망설일 때.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는 두 가지의 인격을 소유합니다.”

콰앙-!

마인하르트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고.

유히리안은 분풀이를 하듯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과-

그리하여 저택의 벽면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 너머로 드러나 보인 것은, 아까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존재하던 화창하고 고요한 정원이 아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평소에 드러나는 자아는 당신께서도 알고 계시듯 당신을 축복한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그리고 ‘저것’은 그의 숨겨진 또 다른 일면, [유히리안]입니다.”

마인하르트는 유히리안의 분노로 인한 여파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내게 설명을 이어 갔다.

“오리에드는 이성이 누르고 있을 때, 유히리안은 야성을 여과 없이 드러낼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어쩌다 유히리안의 인격이 봉인을 깨고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격이 교체되었음을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오리에드일 때는 금빛 눈동자, 유히리안의 봉인이 풀리면 그 눈이 검은색이 뒤섞인 황금색을 띤다고 하니 유념해 두십시오.”

쿠웅-!

유히리안이 바깥의 어둠이 드러난 벽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얼마 남지 않은 저택의 공간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이 거세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유히리안이 분명한 것 같군요. 오리에드 님은 결코 저리 포악하진 않으니.”

마인하르트는 나를 단단히 고쳐 안은 채 남은 한쪽 손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라난 울창한 나무뿌리가 똬리를 틀며 날아오던 파편들을 막아 냈다.

“정령사들 간에 흔히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유히리안은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마저도 기피할 만큼 비정상적인 강함을 지녀, 세계의 ‘균형’을 해친다는 명목하에 평소에는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되었다고 합니다.”

……아니, 아르카네가 기피할 만큼 강하다고?

“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오리에드가 이중인격이라는 말인 거죠? 저기 있는 이상한 놈은 오리에드가 아닌 유히리안이라는 인격이고?”

저택은 시시각각 무너져 내리지, 클래이는 아직도 얼굴과 손을 저택 안에 구겨 넣은 채 정지해 있지, 오리에드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유히리안은 저기서 무슨 생각일지 모를 힘자랑이나 하고 있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점점 아득해져 가는 정신줄을 간신히 붙들고 물었다.

마인하르트가 만들어 낸 나무줄기들은 더욱 굵어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쇄도하는 파편들을 막아 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히리안이 봉인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군요.”

그의 목소리가 이어 흘러나오던 사이, 무슨 집념인지 모르겠지만 감탄스러울 만큼의 악바리로 무저갱에서 기어 올라온 시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추잡한 꼭두각시 따위가, 꺼져라!]

그러자 유히리안은 시체들이 짜증 난다는 듯 발을 허공에 대고 쾅쾅 내리찍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터져 나가며 움직임을 멎었다.

“유히리안은 모든 정령왕들 중 가장 강대한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아르카네와의 전쟁에 나선다면 자연계 정령들과 이 세계에 커다란 승산이 될 것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그가 아르카네와 전면전에 나서지 못하고 봉인된 이유는, 그가 살육과 폭압. ……그리고 전투를 지나치게 선호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 모습으로도 포악하기 그지없어 보이긴 하지만, 정말로 성정에 결함이 많은 이였구나.

“유히리안은 위대한 전사이자 가장 강한 정령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안중에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인하르트는 나의 머리맡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아직도 살짝 떨리는 손으로 마인하르트의 로브를 꼭 쥐며 유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 대지의 정령왕의 몸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온몸을 짓누르는 끔찍한 중력에 인간들이 찢겨 나가든, 흙과 암석에 짓눌려 압살당하든, 영영 찾을 수 없는 지하 깊은 곳으로 추락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전투에만 미친 듯이 몰입하는 그의 행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다른 정령왕들이 유히리안을 봉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랬구나. 그래서라면 어째서 유히리안보다 약하다는 오리에드가 대지의 정령왕의 자리에 있는지 이해될 만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서 이런 정보들을 얻은 거지?

뒤늦게 의문이 일어 마인하르트를 쳐다보았고, 순간적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령학 교재들에 이러한 정보는 기술되어 있지 않았는데.

“……개인적인 인연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정령사들은 알지 못하는 이야기지요.”

내 속내를 눈치챈 듯, 마인하르트는 흘긋 내 눈길을 피하며 꼭 얼버무리듯 말했다.

끼기기긱-

그 순간, 유히리안의 주위로 마치 공간이 통째로 아작 나는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전과는 강도 자체가 다른 거대한 균열에 나는 기겁하여 유히리안을 바라보았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올라오는군……. 저것들은 빌어먹을 오리에드 놈 때문에 죽일 수도 없고.]

오리에드의 얼굴로 나를 직시하며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던 유히리안은, 곧 모두 부서져 나가 어둠밖에 남지 않은 위를 응시하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은 장난은 집어치우고 그만 모습을 드러내라, 아르카네.]

“……아르카네?”

뜻밖에 등장한 이름에 잠시 멈칫하던 사이.

사아아아-

“!”

골조나마 남아 있던 저택의 모습이 허상처럼 사그라졌고 오직 검은 어둠에 뒤덮인 공간만이 남아 나와 마인하르트를 둘러쌌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입을 헤벌리며 닥쳐온 상황을 애써 분석하려 할 때,

[오랜만이구나.]

우리의 머리 위로.

[유히리안.]

전후 상황을 짐작하여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임이 분명한 음성이 마치 화답하듯 들려왔다.

……미친, 이렇게 갑자기 최종 보스 등판이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