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얼어붙은 나는 지난 밤, 숲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우야. 네가 이곳에 있었구나.’
리아트를 따르던 수하의 몸을 뒤집어쓰고 나타나, 에시메드를 똑똑히 응시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네던.
‘이제야 너를 마주한다. 그동안 내 얼마나 애타게 너를 찾아다녔는지 너는 차마 헤아리지도 못할 게야. 대체 왜 그런 하잘것없는 존재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있느냐? 너는 미천한 피조물 따위가 아니거늘…….’
애틋하게 말을 잇다, 일리피아의 중재에 막히고 원망을 그 낯 위에 드러내던 그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멸하더라도 너만은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것이니.’
종래 섬뜩할 만큼 강렬한 집념이 담긴 눈빛으로 에시메드를 바라보며 그 말을 남기고 남자의 몸에서 떠나갔다.
그때는 인간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어 진짜 음성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몰려드는 불안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나를 농락하는 건가? 그림자에 숨어 목소리만 내뱉는 건 어느 세상의 숙적을 향한 예우더냐?]
유히리안은 검게 물든 금안을 흉포하게 빛내며 분노를 드러냈다.
[숙적이라. 유히리안, 네놈은 예로부터 너무 오만했어.]
나직한 웃음기를 머금은 매끄러운 남성의 음성이 가만가만 답했다.
[뭐라고……!]
[네 강대함은 존중하지.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못한 일시적인 발악에 불과할 뿐, 상성 상 나의 천적에 해당하는 이그니스도 네놈만큼 방자하게 굴진 않아.]
이그니스라면…… 빛의 정령왕의 이름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아르카네의 천적인 빛의 정령왕을 그가 언급하자 유히리안은 전에 없이 분노하며 외쳤다.
[그딴 겁쟁이 따위-]
[하지만 이토록 오랜만에 만난 친애하는 숙적이신데, 이대로 허망하게 보내드리는 것은 예에 맞지 않으려나.]
숲속에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만난 때와는 달리 더없이 침착하며 매끄러운 음성은 유히리안의 광분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잘라 내며 말했다.
……그때는, 울음과 환희에 젖어 엉망으로 떨리는 목소리였는데.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나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내가 직접 초대한 인간도 있고 말이야.]
아르카네가 말을 건네는 대상이 유히리안에서 나로 옮겨졌다.
……직접 초대한?
[지난번의 만남 이후,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꽤 오랜만이로구나.]
설마, 초대장을 계속 보냈던 게 당신이었어?!
나는 벼락같이 찾아든 깨달음에 경악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성가신 하카드엘라의 아이야.]
결코 좋은 감정은 담기지 않은 지칭에 온몸의 솜털이 쭈뼛 돋아났다.
하카드엘라의 아이, 라 칭한 표현에 의아함을 가질 여유도 없이 나는 스산한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움츠렸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 나는 일리피아도 나이아드도 소환할 수 없고, 이해할 순 없지만 아르카네가 우호적이다 못해 애틋한 태도를 보이던 에시메드도 곁에 없다.
오리에드, 아니, 오리에드의 거죽을 뒤집어쓴 저 유히리안이란 작자는 나를 지켜 주기는 개뿔, 애초에 나를 죽이려던 것을 오리에드의 인격이 간신히 억누른 것 같은데!
사면초가, 어떠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나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마인하르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는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이 아니다.
과거의 영웅들처럼 아르카네를 대적하여 몰아낼 수 있으리란 희망은 품지 않는 것이 나았다.
[일리피아가 너를 축복했다지? 거기에 나이아드, 오리에드까지 포함이군. ……이런 조화가 다 있나. 로어가 또다시 일을 벌이는구나.]
아르카네는 비소의 기색이 낭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대뜸 내뱉은 로어라는 이름에 나는 당황에 잠겼다.
……그토록 관련된 정보를 찾기를 원했던 지혜의 정령왕의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야.
[그 인간의 계획은 결국 허사로 되돌아갔나. 하나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어찌 보면 네 덕분에,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아이와 마침내 재회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아르카네는 느른한 말씨로 저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다 종래에 감사 같지도 않은 감사 인사를 덧붙였다.
[그것만큼은 네게 감사를 표하지.]
애타게 찾아 헤매던 아이라면…… 설마, 에시메드를 말하는 거야?
에시메드가 대체 어둠의 정령왕에게 무슨 존재이기에 저토록 각별히 여기는 거지?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생각했다.
게다가, 저자는 에시메드를 아우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어린 인간 소년이 어떻게 수천 년이 넘도록 묵은 정령왕의 아우가 될 수가 있지?
[하나 더 이상의 쓸모는 없어 보이니, 아무런 일도 벌이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죽이는 선택이 가장 편하겠지만…….]
……살인 예고?
골머리를 앓던 나는 아르카네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덜컥 굳어 다음으로 떨어질 말을 미칠 듯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은 그러할 수도 없고. 그러니 겁내지 않아도 된다. 다 보이게 벌벌 떨지 말란 말이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서 이유 모를 서늘한 살의가 제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는 기생충들이 발악하는 걸 싫어한다.]
그리고 아르카네가 한탄하듯 내뱉은 표현에 나는 멈칫하고 생각했다.
……기생충?
설마, 그거 인간을 칭하는 표현이야?
[오직 살기 위해 내 앞에서 웃기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는 것도 마찬가지. 당장에 죽일 수도 없는데, 계속해서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말려무나. 내 금제를 파훼하고 당장에라도 네 영혼을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공허에 파묻어 버리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발언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아르카네는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인 정령왕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자와 나는 서로를 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이 세상의 끝이 다가오더라도 아르카네와 내가 호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될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네게 건넬 용건은 끝났고. 그럼 유히리안, 내가 싸우기에 적절한 장소를 알고 있으니 함께 가겠나?]
[웬일이지? 네놈이 먼저 결전을 청하다니. ……아무튼,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한동안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러운 기색이던 유히리안은 아르카네의 제안을 두 번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자 사방을 둘러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어둠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윽.”
어둠에 적응된 눈에 갑작스레 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작게 신음했다.
[……이곳은.]
유히리안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내 시야에 들어찬 광경은…….
“……설산?”
곳곳에 눈 덮인 설산의 봉우리가 내려다보였다.
거대한 평원이 허공에 뜬 두 발아래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현재에 해당하는 시간에서 조금 이전의 과거. 인간들의 말로는 ‘재앙의 개시’가 도래했던 때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나는 아르카네의 설명에 경악하여 눈을 홉떴다.
재앙의 개시라면…… 종말이 다가왔다고 표현할 정도로 대륙 전체가 뒤집어졌던 혼란의 시대잖아?
뭐야, 이젠 허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인신 공양의 제물로 바쳐지는 걸로도 모자라서 시간 여행이야?
“마인하르트…… 이걸 어떻게 해야 하죠?”
“……우선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묵묵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마인하르트가 침착하게 답했다.
쿠구구구-
모래 폭풍이라도 불어오는 걸까.
웅웅거리는 거대한 소음이 들려와 마인하르트를 향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저 멀리 발아래 펼쳐진 평원의 너머에서 검게 물든…….
“……떼거지?”
뭔가 저급한 표현이나, 아무튼 뭐라 딱히 결론지어 지칭할 수 없는 존재들이 우글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아르카네의 권속들입니다.”
“……네?!”
그리고 마인하르트가 내뱉은 말에 나는 아르카네의 존재조차 잊고 외쳤다.
[……뭐 하자는 거지?]
마찬가지로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검은 무리를 눈을 가늘게 좁히고 응시하던 유히리안이 물었다.
[네놈과 내가 직접 싸웠다간 대륙은 물론이고 세상을 둘러싼 축마저 금이 갈 게 분명한데, 내 아직 그 정도로 인과율을 무력화시키진 못하여.]
아르카네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답했다.
[부디 즐거운 유희가 되기를 바라네.]
[……뭐라고? 그럼 나와 직접 겨룰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끌고 왔단 말이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굴욕과 타오르는 분노로 금흑색 눈동자가 흉포하게 이글거렸고, 유히리안은 오리에드의 진중했던 성정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험악한 욕설을 고래고래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카네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렸고.
이내 완전히 떠나간 듯 목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던 존재감이 사라졌다.
“……잠시만, 이거…….”
나는 패닉에 잠겨 중얼거렸다.
유히리안을 골려 주든 말든, 아무 상관없는데…….
“왜 우리까지 과거로 끌고 온 거야?!”
졸지에 과거에 갇혀 버렸잖아!
그것도, 전에 없던 혼돈과 재앙이 몰아닥쳤다는 가장 끔찍한 시대의 한복판에…….
“……일이 위험해졌군요. 유히리안은 설사 과거에 갇히더라도 별 관계없으나…….”
저희는 아니니.
경직된 목소리로 읊조리던 마인하르트가 끝말을 삼켰다.
그러는 동안, 한참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씩씩거리던 유히리안은 곧 아르카네의 권속들이라도 짓밟기로 결심한 것인지.
쿠구구구궁-
대지의 근간을 진동시키며, 마구잡이로 아르카네의 권속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곳곳에서 대지의 상위 정령 클래이, 즉 기괴한 생김새의 흙 거인들이 일어나 검은 파리 떼처럼 보이는 어둠의 권속들을 쓸어 버렸고.
유히리안은 끝도 없이 몰려드는 어둠의 권속들을 허공 드높은 곳에 선 채 중력을 가해 무참히 압사시켰다.
콰과과과-
그에 그치지 않고 땅을 뒤엎어 산 채로 매몰시키기까지 하는 포악함에 입술에 핏기가 가실 지경이었다.
타닥-
마인하르트는 다시금 바람의 권능을 사용하여 더 높은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하여 공격의 여파를 피했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오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유히리안의 난동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이 솟은 설산들이 위태롭게 진동하고 있던 것이다.
설산의 아래에는 워낙 고도가 높아 작은 점이 모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가까이 다가간다면 커다란 규모일 도시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설마.”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망연히 중얼거리며 불길한 가설을 떠올렸다.
재앙의 개시는 끝내 인간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금이라도 인간들에게 더 해를 끼치기 위해…… 유히리안을 과거로 끌어들여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말도 안 돼.”
그냥, 그냥 아무렇지 않게 끌고 온 것이겠지.
만약 내 생각이 사실이라면…… 대체 무슨 맹렬한 악의란 말인가, 그건?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일리피아]!”
나는 고민 끝에 다시 한번 정령 소환 주문을 외쳤다.
“안 돼…….”
그러나 여전히 소환은 불가했다.
과거로 넘어오거나 다른 정령왕의 권역 아래 갇힌다면 정령 소환은 어찌해도 불가한 걸까.
애꿎은 속만 타들어 가 입술을 짓씹으며 여전히 위태로운 대지의 상황을 초조히 내려다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앞으로도 처한다면, 나는 늘 이토록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거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마인하르트는 정령의 권능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는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정령의 권능만을 끌어내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권능을 사용하지 못한다.
……전부 내가 상시 소환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그때, 마인하르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주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킬 테니, 당신께서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과거의 인물을 찾아가십시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