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간소하게나마 전기의 권능이 깃든 아티팩트가 있으니 지니고 계십시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드릴 겁니다.”
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태양의 빛을 가린 채, 그는 어둑히 침잠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럼 당신은…….”
“저는 괜찮습니다.”
“……!”
그 순간, 되돌아온 답에 나는 멍하니 그의 낯을 바라보았다.
마인하르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 한 점 없이 무감각하던 낯 위로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실낱같이 머금은 미소는 알 수 없게도, 너무나도 따듯하고 다정하게 느껴져서.
“……마리에트 님께 맹세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이를 지키겠노라고. 그러니 저는 맹세를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정말로 나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으려는 듯 허공 위로 걸음을 옮겼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죄악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진정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이는 가장 당연한 선택이며, 저는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희생을 말했다.
마인하르트를 떨리는 눈길로 올려다보던 순간, 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울지 말거라.’
어린 마인하르트를 온몸 바쳐 구하고 한 줌 재로 스러졌던.
할아버지의 전우였던 주디스, 그녀를.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리고 나는 물었다.
“어린 당신을 구했던 그 사람, 주디스 님과 당신은 무슨 관계죠?”
“…….”
우뚝.
허공을 분주히 거닐던 그의 발걸음이 멎었다.
캄캄한 심연을 머금은 눈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 고모할머님이셨습니다.”
그리고 흘러나온 대답에 나는 그저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구나.”
역시 가족이었구나…….
“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두 손을 꼭 그러쥐며 말했다.
“……예?”
마인하르트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시금 강조하여 말했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니까, 알고 있는 사실이나 더 말해 줘요.”
마인하르트는 얼이 빠진 얼굴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쉬익-!
그 순간, 당황하여 이동을 멈춘 바람에 날아오는 파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마인하르트!”
날카로운 암석 조각이 매섭게 스치며 마인하르트의 뺨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상처가……!”
커다랗게 긁힌 상처에서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급한 대로 소매로 그의 상처를 틀어막고서 외쳤다.
“오리에드와 유히리안에 대해서, 나는 모르던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유히리안의 약점이나 그를 다시 봉인할 수 있는 방법 비슷한 것이라도, 아는 게 있으면 모두 말해 달라고요!”
가지 않겠다고 말한 직후부터, 솔직히 말하자면 꿀 먹은 벙어리 같았던 마인하르트가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실 제가 말씀드렸던 이야기는 모두 고모할머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짐작은 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을까.
“유히리안의 봉인을 담당했던 정령왕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현재 저희의 상태로서는 정령 소환이 불가합니다. 저 또한 계속해서 정령의 권능만 끌어와 사용하였고…….”
……소환이 불가할 뿐이지, 정령의 권능을 끌어오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당신의 정확한 속성이 뭐예요?”
“주 속성은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 부속성은 각각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 바람의 상위 정령 진입니다.”
숲, 숲이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예로부터 숲은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들 했다.
작은 씨앗은 척박한 대지에서 꿋꿋이 싹을 틔워 뿌리를 내리고, 거친 비와 뜨거운 햇빛을 견디어 끝끝내 그 무엇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으로 자라나니.
아마 그것이 생명의 의미를 가장 정확히 나타내는 현상이리라.
그러니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의 권능과 식물을 다스리는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권능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존재하지 않을까?
“마인하르트, 부탁할게요. 드라이어드의 권능을 가장 강하게 불어넣은 식물을 자라나게 해 주세요.”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토록 섬뜩하고 두려운 존재인 아르카네가, 일리피아의 제지를 거스르지 못했던 모습을.
정령왕들 중 가장 강하다는 유히리안도, 상성 상 천적인 이그니스마저도 말 한구석에서 어딘가 조롱하는 기색이 강하게 느껴지던 그 아르카네가 일리피아에게만은 어떠한 무시도 내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는 이 우주에서 최초로 존재했던 정령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아르카네는 그 자신이 마치 ‘악’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처럼 부정적인 관념에서 탄생한 모든 정령들을 속박하고 그 위에 군림하지요. 그의 권능은 매우 포괄적이며, 어떤 때는 전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술’ 또한 그의 권능에서 기원한 힘이니까요.’
모두가 그리 알듯 아르카네는 일반적인 정령왕들과 격을 달리하는 존재.
까마득한 태고, 가장 먼저 존재한 정령왕이었던 그가 일리피아에게만은 ‘존중’을 보였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 가설을 세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일리피아 또한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여타 정령왕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고.
그는 아르카네를 제외하고 최초로 탄생한 정령왕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는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은 바로 일리피아의 권능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지만.
내가 권능을 불러올 수 있을지도, 또 일리피아의 권능을 불러온다 한들 오리에드의 인격이 깨어날 거라는 확신도 할 수 없지만!
“식물은 그 자체로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 그러니 드라이어드의 권능으로 피어난 생명에게 부탁할 거예요.”
부디 너희의 근원, 생명의 권능을 불러와 달라고.
“그리고 생명의 권능을 유히리안의 몸에 불어넣는다면…… 어쩌면 오리에드가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것만이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계책이었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위험합니다. 유히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계획이니까요.”
마인하르트가 굳은 안색을 한 채 답했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해야 돼요. 당장 과거의 어디인지도 모르는 도시를 헤매며 강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이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당신 혼자 저 흉포한 정령왕을 막으며 버틴다는 계획보다는 훨씬 나아요!”
“…….”
그는 잠시 동안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침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 장막이 걷어지고.
깊은 심연을 머금은 눈이 드러나며.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그는 한 손을 허공에 뻗으며 섬찟한 안광을 빛냈다.
쿠과과과-!
그의 손아귀에서 드라이어드의 권능이 폭발하듯 자라났다.
그리하여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거대한 나무를 응시하며, 나는 손을 뻗고 접촉했다.
얇은 피부 너머로 숲의 마나가 생생히 와닿았다.
어떻게든 내게 닿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마나를 향해 마음 깊숙이 소원했다.
너희들의 근원, 생명의 권능을 불러와 달라고.
그것만 도와준다면 너희가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이 대지 어느 곳에 뿌리내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모든 말을 건넨 순간, 숲의 마나가 일제히 움직임을 멎었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눈을 감은 채 놀라던 찰나였다.
[꺄하하하!]
[생명이 사랑하는 아이야, 우리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너는-]
귓가가 웅웅거리다 못해, 머릿속까지 몰려와 터질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고 버티던.
그 순간이었다.
“!”
사아아아-
불길에 사로잡힌 방 안, 홀로 숨이 막혀 몸부림치며 죽어 가던 그때.
[이디스, 일어나렴.]
들어본 적도 없는 어머니의 음성을 닮은 자애로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울리고, 내 몸을 감싸 안아 주던 시원하고 포근한 공기…….
“……이것이었구나.”
나는 온몸에 스며들어 은은하게, 그러나 꺼지지 않는 분명한 활기를 머금고 박동하는 생명의 권능을 체감하며 절로 웃음을 지었다.
“……성공하셨군요.”
그런 나를 말없이 지켜보던 마인하르트가 그 눈에 놀람의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상시 소환 상태를 유지했던 나이가 열두 살이었습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여덟 살에 성공했으니 또래보다 뒤처진 것은 아니구나.
“그럼, 가 볼게요!”
나는 망연히 나를 바라보는 마인하르트의 품에서 벗어나, 허공을 양단하듯 자라난 나무를 밟고 똑바로 섰다.
온몸에 가득히 차오르는 끝없는 생명의 권능을 느끼며 저 아래 대지 위로 무수히 죽어 간 아르카네의 권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몸을 가득 채우던 권능이 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고.
[……뭐야?]
유히리안이 걸음을 옮긴 자리에 빼곡히 놓여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어둠의 권속들이 일제히 되살아났다.
그러자, 이변을 눈치챈 유히리안이 정확히 내가 선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일리피아의 기운?]
바로 알아챈 듯 유히리안은 광포하게 물들었던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순간, 유히리안의 동공을 탁하게 물들이던 검은 기운이 순간 맑아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탁해졌다.
“……이거다.”
찰나였지만 똑똑히 보았어.
오리에드의 안광이 돌아오는 것을.
일리피아의 힘이 오리에드의 인격을 다시 불러오는 열쇠인 것이 분명해!
[같잖은 재주를…….]
다시 정신을 붙든 듯 유히리안이 살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마인하르트에게 말했다.
“일리피아의 권능이 오리에드를 다시 불러올 열쇠에요, 분명히! 마인하르트, 제가 유히리안과 접촉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마인하르트는 긴말하지 않고 내 뜻을 이해하며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최대한 시선을 끌 테니, 반드시 성공하십시오.”
그는 내가 딛고 선 나무가 유히리안을 향해 자라날 수 있도록 제 몸을 날려 시선을 끌었고.
쐐애애엑-!
바람을 날카롭게 벼려 유히리안을 공격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유히리안은 머릿속까지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르며 마인하르트를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했다.
쿵, 콰광-!
온몸이 찢겨 나갈 듯한 중력, 쇄도하는 거인의 몸, 날카로운 암석의 폭풍.
마인하르트는 식물과 바람으로 간신히 그의 공격을 버텨 냈으나 인간과 정령왕의 전투는 당연히 정령왕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
금세 피투성이가 된 마인하르트가 숨을 몰아쉬며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끌어내 유히리안의 시선을 빼앗았다.
바로 지금이었다.
찰나의 기회, 나는 마인하르트의 희생으로 생겨난 틈을 놓치지 않고 마인하르트의 유도로 내게 가까워진 유히리안을 향해 곧게 자라난 나무의 줄기를 따라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무슨- 넌!]
한 발짝의 거리만을 남겼던 순간, 유히리안이 내 기척을 눈치채고 다급히 뒤돌았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설사 저 흉포한 정령의 손에 죽게 되더라도.
나는 이가 깨질 듯 악물고 몸을 날려, 그의 목에 매달리듯 두 팔을 감고 생명의 권능을 있는 대로 그에게 불어넣었다.
비워지면 또 차오르는 대로, 몇 번이고 멈추지 않고.
이러다 기력이 모두 상해 다시는 정령의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마 다가올 일이 두려워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살며시 뜨고, 아까 전부터 미동이 없는 유히리안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분명 유히리안이 너를 보호하진 못해도 아르카네는 충분히 상대하리라 생각하였는데, 내 불찰이었구나.]
마침내 한 점 그림자 없이 광휘로 빛나는 눈으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꽉 죄어들던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자유로워졌다.
“오리에드…….”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워했던, 나를 축복한 유일무이한 대지의 정령왕이 다시 돌아와 그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