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62)화 (63/141)

<62화>

[오랜만에 마주하는군요. 오리에드. 그리고…… 당신 또한.]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는 우아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어조에 어딘가 묘한 구석이 존재했지만,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얼이 빠진 나는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네가 이곳엔 어떻게…….]

[아르카네의 기운이 유난히도 짙게 느껴져 와 보았습니다. 한데 이런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였군요.]

나긋하게 화답하던 이그니스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손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당신들을 이 시간에 붙들어 놓은 힘은 아르카네의 권능인 듯하니…… 제가 무력화시키도록 하지요. 그럼 곧바로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다. 이 빚은 후일 갚도록 하지.]

내가 이그니스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오리에드와 대화를 나누던 이그니스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빚이라니요. 이 일은 제게 새로운 확신이 되어 주었으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다정한 눈길에 서린 것은 찬연히 반짝이는 신의와.

이유 모를 애틋함…….

[부디 그대들의 앞날에 빛의 가호가 깃들기를.]

나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미소 짓는 이그니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혼을 좀먹어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모든 번뇌를 씻어 내려 태고의 고요함만이 들어찬 무위로 다정히 이끄는 것처럼 정결하고도 신성한 광휘가 시야를 찬연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탐욕과 교만으로 어그러져 기괴하면서도, 잊을 수 없이 애절한 슬픔이 새겨져 씁쓸한 여운을 남겼던 일련의 극의 막이 비로소 내렸다.

* * *

“으아아…….”

지친다. 나는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힘없는 탄식을 흘려보냈다.

[일은 대충 일단락된 듯하니, 나는 정령계로 돌아가 아르카네의 동태를 살펴야겠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아르카네’라는 이름은 다시금 내 앞에 튀어나와 심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금제에 얽매였으면 숨죽이고 지낼 것이지…… 또다시 더러운 수작질을 벌이는군.]

오리에드가 분노의 기색이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현실로 끌려 나와 한숨을 푹 내뱉고 말했다.

“……동태를 살피는 것만 하지 말고, 아예 수백 년 동안 다시는 아무것도 못 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 건가요?”

이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으나.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바라는 이는 바로 나겠지.]

오리에드는 조각 같은 낯에 서렸던 분기를 천천히 거둬 내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푹 쉬기나 해라.]

늘 그렇듯, 더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손가락을 뻗어 내 이마를 톡, 쳤다.

으익, 나는 이마를 감싸며 후다닥 뒤로 몸을 물렸다.

무슨 심경일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묵직한 금안이 그런 내 모습을 담았다.

공간이 일렁이는 듯한 착시와 함께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의 일로 깨달으셨겠지요.”

그 순간, 마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은 설사 정령왕을 곁에 두더라도 손을 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마인하르트?”

어느새 마인하르트가 아직도 남아 있던 문제의 초대장을 한 손에 들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를 향해 시선을 든 순간, 이미 검게 물들어 그 자체로 썩어 가는 것 같던 종잇장은 그의 손아귀에서 피어난 뇌전에 몸부림치듯 타들어 갔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이번의 경험을 잊지 마시기를.”

그가 손을 거둔 허공에 머무르다 천천히 추락하는 검은 잿가루를 응시하던 나는.

지난밤과 같이 홀연히 떠나가려는 그를 발견하고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우당탕-

“아, 안 돼요!”

“……?”

요란한 소리를 뒤로하고 달려가 없는 힘을 모두 짜내어 피로 얼룩진 로브 자락을 붙들자, 마인하르트가 의아한 기색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떠나려고 하는 거겠지.

찾을 방도도 없이 꼭꼭 숨어 있다, 위험이 닥쳐 왔을 때 홀연히 귀신처럼 나타나.

청하지 않은 도움과 바라지 않았던 희생을 마음대로 행할 것이다.

“……가지 마세요.”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내뱉은 말에 그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야 전부 알게 되었는데…… 또다시,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대체, 왜?

“계속 돌아서려는 이유가 뭐예요? ……당신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곁에 둘 수 있다고요!”

할아버지의 친우였던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이 남긴 유일한 혈족.

또한, 마리에트의 측근이었던 사람.

알 듯 말 듯한 흐린 안개에 뒤덮인 과거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

“…….”

그러니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연한 의지를 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상황에도 크게 흐트러짐이 없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처럼 생기 없던 남자의 낯빛에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나를 지키겠다고 했죠?”

‘……마리에트 님께 맹세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이를 지켜드리겠노라고. 그러니 저는 그 맹세를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내뱉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마리에트, 어머니를 향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키겠다 맹세했다고 하였지.

“그럼 바로 옆에서 지켜요!”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치자, 마인하르트의 안색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오늘 일 보세요. 괜히 숨어서 지키겠다고 행동하다, 제 경솔한 선택을 막지 못하고 이 사달이 났잖아요!”

“그건…….”

“그만, 반론하지 마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요? 바로 답답한 거예요!”

그러니까, 정 나를 지키고 싶으면…….

“그러니 앞으로는 어디 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제 옆에 있어요.”

“…….”

“그렇게 해 주세요.”

마리에트의 숨겨진 과거에 대한 실마리를 쥔 유일한 사람.

……자꾸만 홀로 돌아서려 하는 것을 차마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

“……그리하겠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끝나고.

고집스러울 만큼 목석같던 남자는, 마침내 자신의 뜻을 굽히고 내게 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광휘와 어둠을 동시에 지닌 남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오늘부터 내 궁에서 함께 지낼…… 귀빈이니 인사해.”

“저, 대공녀님. 외조부님께서 머무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분은…….”

갑작스레 나타난 커다란 사내의 손을 붙든 채 이제부터 함께 지낼 이라고 설명하자, 시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당혹과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마인하르트는 누가 보아도 질겁할 정도로 그 옷에 검붉은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는 차림이었으므로.

“할아버지와도 잘 아는 사람이야. 후일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감당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라고 합니다. 당분간 대공녀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내가 타고나기를 귀한 신분임이 드러나 보이는 정중한 어투로 인사를 건네며, 또한 극히 보기 드문 수려한 외모를 지닌 미남자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은 시녀들은.

“……아뇨, 대공녀님의 귀빈이신데, 저희에겐 모셔야 할 주인이나 다름없으시지요.”

저마다 낯빛에 수줍은 홍조를 띠며 친절히 답했다.

그들에게 할아버지를 모셔 오라 명한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참, 마인하르트.”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초대장 안으로 나를 찾아올 수 있었던 거예요?”

대지의 정령왕인 오리에드마저 별다른 방도가 없어 금제로 봉인시킬 정도로 포악한 인격을 깨워 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마인하르트는 어떻게 나를 찾아 환상으로 지어진 그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아르카네가 벌인 일이기는 하였으나.”

잠시 침묵하던 마인하르트는 피가 말라붙은 로브를 벗어 내며 이내 답했다.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주술은 아르카네가 창조한 산물, 칸델 가문에서는 제가 주술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기를 원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래서 어렵지 않게 맹점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칸델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꺼내는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침묵했다.

원작에선 그저 악녀의 존재감 없는 심복으로 서술되었을 뿐인 남자가 이토록 충격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는데.

“……마인하르트, 당신은 정말 재능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상기시켰다.

그 빛 한 점 들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마인하르트가 천천히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外. 별이 사라진 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 작위를 박탈당했다.

필요 이상으로 총애하며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게 키운 딸로 인해 그간 쌓아 왔던 모든 명예와 영웅으로서의 삶이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며, 안타까이 여기거나 혹은 조롱하는 제국민들의 목소리가 황궁의 담벼락을 찌를 듯 드높았다.

다소 희끗해지긴 하였으나 젊은 날의 위용이 모두 사라지진 않았다는 듯 선연한 붉음을 머금었던 바스테반 공작의 머리카락이 작위 박탈과 추방형이 내려진 후 단 사흘 만에 이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하얗게 세어 버렸다는 소문은 오르내리는 입방아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이렇듯 그 아비의 위신이 나락으로 추락했는데, 그 딸의 처지라고 다를 바 있으랴.

영웅의 딸이라는 이름하에 가히 로샨 제국의 황족에 비견될 만큼 굳건한 지위와 권력을 누리던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 공녀 또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성도에서 추방당하기까지 단 하루를 남긴 상황이었다.

바스테반 공작의 뒤를 이어 제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받던 약혼자를 평민 출신 과부에게 빼앗겼다는 굴욕, 그로 인한 질투와 분노에 패악을 벌였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아버지까지 연루되어 모든 것을 잃고 비참히 몰락한 신세라니.

사람들은 바스테반 공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바스테반 공녀의 추락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다.

영웅에게 삶을 구원받았던 나이 있는 사람들은 방자하게 패악질을 부리다 아비를 몰락시킨 딸을 욕했고, 젊은 사내들은 그토록 아름답다는 공녀에게 접근해 볼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니냐며 희롱을 일삼았다.

그나마 젊은 여인들 몇몇이 약혼자를 빼앗겼을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했으나.

대다수의 여인들은 평민 출신에 다른 사내의 자식까지 둔 몸으로 젊고 아름다운 대공과 진실한 사랑에 빠져 신분 상승을 이룬 샤스티아의 이야기에 열광하였다.

자극적인 소문에 휩싸인 백성들은 로샨 제국의 젊은 황제가 바스테반 공작의 권력이 황권조차 막아설 만큼 비대해졌다는 연유로 과거의 영웅을 축출시키기 위해 부러 바스테반 공녀가 행했던 ‘악행’들을 더욱 왜곡시키고 과장하여 퍼뜨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수많은 말소리가 시끄럽게 오르내리는 가운데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들은 차갑도록 고요한 침묵에 파묻혀 언젠가 세상에 드러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마인하르트.”

비밀이라는 파도 아래 가라앉은 진실을 앎에도 한 마디 입 밖으로 꺼낼 허락조차 받지 못해 들끓는 분노와 영혼을 잠식하는 무력함을 맛보며.

“……마리에트 님.”

바스테반 공작저의 푸른 장미 화원의 한가운데, 그에게서 뒤돌아선 가녀린 여인의 모습을 응시하던 마인하르트는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리며 부름에 답했다.

시야에 넘칠 듯 들어찬 서늘한 채도가 불어오는 바람조차 냉엄히 얼어 붙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데.

쏴아아아-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

담담하고도 우아한 목소리와 바람결에 흩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어찌 그리도 변함없는 자태로 다가오는 비극을 올곧게 마주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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