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 *
마인하르트는 멀지 않은 곳에 머물던 시오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마치 십여 년 만의 재회였으나 해후를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 권능은 오랜만에 사용하는 것인데…… 잘 될지 모르겠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시도해 봐! 내 손녀가 위험하단 말이다!”
“알겠으니까 그 입 좀 닥쳐라, 시끄럽다!”
“……망할, 네놈이 노총각으로 늙다 못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 한 번 못하여 자식도 낳아 보질 못했으니 그리 태평하게 굴 수 있는 게야!”
“뭐야?! 내가 이 나이까지 결혼을 못 한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대지의 대정령사 다비드 칼란 테라시움과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 늘 그랬듯 날 선 말을 툭툭 쏟아 내다, 끝내 싸움으로 번지기에 이르렀고.
“그만, 그만해. 지금 상황이 급박하잖아.”
“너희는 언제쯤 사이가 좋아질래? 아직도 만나기만 하면 싸움을 벌이다니!”
에제키엘과 시시페아가 중재하며 막아서던 순간.
쿵-
“너희들의 그 주둥아리만 닥쳐도 일각은 빠르게 향할 수 있었을 거다.”
자욱한 흙먼지가 날리며 굉음이 울리고, 대기를 짓눌러 그들이 서 있는 지반을 움푹 내려앉게 만든 메카일라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
“…….”
다비드와 시오른은 한층 숙연해진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대지의 정령왕을 대신하여 명하노니, 우리의 앞에 길을 열어다오. 간악한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앉은 곳으로…….”
드드드드-
흙 위로 손을 짚은 다비드가 조용히 읊조린 순간, 대지가 몸을 떠는 듯한 진동이 한 차례 울렸다.
그리고.
기적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는 자의 심정이 바로 이러할까.
“성공했어! 역시 할 수 있다니까, 다비드!”
“그래……. 아직은, 할 수 있구나.”
지층을 이루는 암반과 그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식물, 산, 강,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대지의 주인이 품은 근원의 일부를 지닌 인간의 명에 복종하여 수일이 걸릴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펼쳐냈다.
에제키엘은 그 낯 위로 온화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비드를 도닥인 뒤 앞장서 발을 디뎠다.
“자, 어서 가자. 시오른과 아타라의 손녀를 데리러 가야지.”
어둠을 상대하는 오랜 규율대로, 빛의 정령사가 선두에 위치하고 전기의 정령사는 후방을 지킨 채.
일행들은 걸음을 옮겼다.
* * *
“결계를 쳐 두었구나. 평범한 정령사들은 발견조차 쉽지 않겠어.”
에제키엘이 언뜻 보기에 평범한 밤의 숲처럼 보이는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이야기했다.
우웅-
“아예 파훼시켰다간 그들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 조금의 균열만 일으키도록 할게.”
“에제키엘 님께서는 후방을 지켜 주십시오. 잠입하여 동태를 살피는 역할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래, 나도 나이가 있으니……. 부탁하마, 마인하르트.”
에제키엘이 약간 염려 섞인 눈빛으로 마인하르트를 응시하다 곧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쿠과과광-!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뇌전 수십 갈래가 대지로 내리꽂히고, 니샤의 정령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오랜만이라며 전장을 아수라장으로 어지럽히는 옛 영웅들.
그리고, 마침내.
“…….”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오롯이 마주하는 최초의 만남.
이 전장으로 향하기 전 마주했던 사내는 분명 혐오스럽고 역겹기 그지없었는데…….
뜻밖의 존재를 발견했다는 듯 놀라 커다래진 눈망울은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이 그려질 만큼 사랑스러웠고.
그 아비의 모습을 숨길 수 없이 품은 외형은 더 이상 시선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아이의 무구한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느새 마인하르트는 저 아이, 그의 작은 주인을 마음 깊이 아끼고 있었다.
그조차 모르는 순간 깊게 스며들어 다시는 지워 낼 수 없이 자리한 감정이었다.
이디스가 납치당했을 때 모든 의무를 망각할 정도로 다급해졌던 이유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닌, 저토록 작고 어여쁜 아이에게 지독한 위협이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운명을 생각한다면 설득력 없는 망상에 사로잡힐 정도로 짙은 염려 때문이었음을.
마리에트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로베릭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린 것은 그 자신이었음에도 로베릭의 곁에서 살아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동안 그토록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죄책감, 연민.
허울 좋게 가져다 대었던 그 어떤 감정도 아닌, 저 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자유롭게 웃으며 살아가던 모습이 진심으로 마음에 겨웠기 때문이었음을.
결국 예언도 운명도 상관없이 저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그저 바라게 되었기 때문이었음을…….
“…….”
수년간 이어져 왔던 고뇌의 끝, 뒤늦게 깨달은 진실 앞에서.
그럼에도 저 아이를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역설적이게도 마인하르트는 모든 감정의 이유를 명확히 깨달은 순간 더없는 비참함에 잠겼다.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이나 그는 마리에트를 끊어 낼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잊어 놓자. 네가 그분의 사랑을 되새겼을 때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날까지…….’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은 마인하르트의 모든 것이었다.
모든 의지도, 욕망도 사라져 공허할 뿐인 삶.
유일했던 구원.
신과 같은 존재로서 그를 인도하던 자.
그리하여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스스로의 감정마저 외면해 가며 덧없는 명령에 매달려 살아올 만큼…….
“어딜 또 가려는 것이냐.”
이토록 불안정한 상태로 아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도망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끝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돌아서려는 마인하르트를 붙든 것은 시오른의 목소리였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어째서 자꾸 떠나려는 것이야?”
속이 타는 듯 물음을 쏟아 내는 시오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고백할 수 있을까?
고백해 봤자, 이 마음을 옥죄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이 오갔지만 끝내 마인하르트는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돌아섰다.
니샤의 국왕은 더 이상 이디스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황제 또한 이번의 일로 로베릭의 눈치를 보게 되었으니 생각이 있다면 또다시 수작질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적막히 시간을 흘려보내던 어느 날.
“……칸델?”
님프가 귓가에 속삭인 그 한 마디의 단어로 그를 잠식했던 모든 공허가 산산이 조각났다.
“…….”
창백한 그의 낯빛 위로 흐르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두려움.
“어떻게…….”
그가 기억 저편에 묻어 버렸던 끔찍한 과거의 파편이 그림자로부터 기어 나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디스를 향해 겨누어졌다.
* * *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의 본래 이름은 마인하르트 시엘 칸델이었다.
칸델 공작 가문.
그 어떤 가문도 범접하지 못하는 고귀한 헤일리안 대공가를 제외하고로샨 제국을 지배하던 두 개의 공작가 중 하나.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가 사랑했던 정령사를 시조로 둔 그들은 대대로 야심이 넘치다 못해 탐욕스럽다는 평가까지 들어오던 가문이었다.
다른 가문과는 달리 끝내 건국을 이루지 못하였던 과거에 대한 열등감이 그 이유였을까.
그들은 ‘강대한 정령사’의 존재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혈통을 관리해 지속적으로 영웅을 배출하여 권력을 공고히 유지하고자 했다.
칸델 가문에서 사용한, 혈통을 관리하기 위한 방도란 직계 가족 중 반드시 전기의 속성을 지닌 정령사가 존재하는 가문에서 데려온 부인이 결혼한 지 오 년이 지났음에도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거나.
또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혼사를 치르던 때부터 미리 서명해 둔 서약서의 조항에 따라 이혼하여 가문에서 내쫓은 뒤.
다시 조건에 맞는 젊고 건강한 여자를 데려와 부인을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수많은 이의 피와 고통이 흩뿌려진 기반을 딛고 선 가문은 언뜻 보기엔 더없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듯했다.
그렇게 수백여 년이 흐르고, 어느 시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응애애애!’
칸델 공작이 새로 얻은 젊고 건강한 부인이 공작의 장남과 스무 살이 넘도록 차이 나는 막내딸을 출산했다.
‘여식은 열 명에 달하나 아들은 둘 뿐이라, 혹여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건만……. 쯧.’
당대의 칸델 공작은 여식이라는 소식에 눈에 띄게 실망하며 아이에게 이름을 내린 뒤 눈길 한 자락조차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이 그토록 실망했던 막내 여식은.
‘부디 네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어미가 아들을 낳아야 할 텐데…….’
가문과 제국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정령사의 자질을 품고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질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작위 계승식을 시작하겠다.’
그 아이가 다섯 살을 맞이하던 해, 가문의 법도에 따라 작위 계승식의 포문이 열렸다.
다소 빠른 시기였으나 당대의 칸델 공작이 노환에 시달리고 있던 것을 비롯하여, 이전에 겪어본 적 없던 전대미문의 재앙이 무섭도록 세를 키워 가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젊고 강건한 후계자를 정해 가문의 대를 안전하게 이어 가기 위함이 실질적인 이유였다.
이들이 말하는 작위 계승식이란 공작의 아들들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공작저 내에서 전투를 벌이는 행위를 뜻하였는데.
계승식이 거행되기 전 식솔들은 모두 공작저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처사였으나.
‘안 돼, 안 됩니다! 제 아들은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아이도 어찌 되었든 공작의 아들이지. 작위를 계승하는 한 명의 후계자를 제외한 모든 아들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칸델의 오래된 법도. 그리고, 실비아. 네 아들은 손위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몇 년의 유예가 더 주어지더라도 세력을 키울 가능성은 희박하지. 냉정하긴 하나,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거야.’
법도대로 칸델 가문의 휘하 가신에게 출가한 뒤 오랜만에 친정에 들른 칸델 공작의 누이가 건넨 냉정한 조언은 공작 부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안 돼……. 어흐흑…….’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칸델 공작이 작위 계승식을 명했으며, 법도에 따라 어린 아들을 홀로 저택에 두고 떠나야 할 상황으로 내몰린 공작 부인은 몇 날 며칠을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오랜 절망 끝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아, 아가씨! 보시면 안 돼요……. 어찌 이런 비극이!’
자결이었다.
작위 계승식까지는 단 이틀이 남은 상황.
사용인들은 쉬쉬하며 죽은 공작 부인의 시신을 치웠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나 다름없던 어미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막내 공녀와 이번 계승식에서 죽을 것이 사실상 확실한 막내 공자를 향해, 떠날 준비를 마치느라 정신이 없는 사용인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아비인 칸델 공작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나마 공녀를 돌보던 시녀가 계승식이 거행되기 전 반드시 공작저를 떠나야 한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럼 메이너드는 혼자 남아야 하는걸…….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데, 메이너드는 어떡해?’
‘아가씨, 어차피 메이너드 공자님은…….’
어린 공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기댈 곳 없이 남겨졌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으며.
같은 처지로 내몰린 남동생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공작저를 빠져나가는 인파의 물결에서 시녀의 눈을 피해 몰래 뛰쳐나온 어린 공녀는 망설이지 않고 동생이 홀로 남겨진 방으로 달려갔다.
‘메이너드, 괜찮아. 누나는 떠나지 않고 네 곁에 있을게.’
‘우아, 아!’
요람에 눕혀져 작은 손을 버둥거리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조잘거리던 공녀는 몰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쿵, 콰광!
‘끄아아아-!’
아이가 다시 눈을 뜬 시간은, 칸델 공작의 아들들과 그들을 따르는 세력이 공작저를 점령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