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무슨 소리지……?’
막 잠에서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문가를 돌아보았지만, 굳게 닫힌 커다란 문은 그 너머의 참상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어린 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전히 끊이지 않는 굉음과 지독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바깥을 이상하게 여겼다.
‘메이너드…….’
나가 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 치솟았지만 곤히 잠든 동생을 보살펴야 했기에 공녀는 호기심을 꾹 참고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어쩌면 그날, 아이가 동생을 지키며 앉아 있던 방에 아무도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훗날의 운명이 비롯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콰앙-!
‘이봐, 웬 꼬맹이들이 있는데?’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저 덧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뭐?! 그럴 리가.’
‘저길 봐라, 저 어린 계집애……. 뭐야, 조디악 공자님을 닮지 않았나?’
문짝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굉음에 화들짝 놀라, 들이닥친 거대한 인영들을 올려다보던 공녀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본 한 기사가 아이의 곁에 자리한 요람을 발견하고 입을 죽 찢으며 웃었다.
‘야, 찾았다. 칸델 공작의 막내아들!’
‘저 애가……. 네가 죽일래, 내가 죽일래?’
‘글쎄다. 죽이긴 해야 하지만 애새끼 따위, 처리해 봤자 별다른 전공으로 인정받지도 못할 텐데.’
성큼성큼 걸어와 한 손으로 우악스레 아기를 들어 올리던 기사가 서슴없이 지껄였다.
어린 공녀는 다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외쳤다.
‘그만해! 메이너드는 아직 어리단 말이야, 어서 내려 줘!’
‘오, 뭐야, 제 동생이라고 지키겠다는 건가?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 식솔들은 다 피신했을 텐데.’
‘버리고 갔을 수도 있지. 의지할 형제조차 없는 공녀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 그럴 수도.’
공녀는 허공에 들린 채 서럽게 우는 동생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둘째 공자의 파벌에 속하는 기사는 오히려 흥이 돋는다는 듯 웃으며.
‘아무리 애원하셔도 안 됩니다, 막내 공녀님.’
푸욱-
‘계승자를 제외한 모든 공자는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니까요.’
툭-
‘여아로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기십시오.’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내려 눈앞을 잔뜩 물들였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니 방금까지도 살아 있던 어린 동생이었다.
‘눈앞에서 죽이는 건 좀 심했나?’
‘무슨 상관이야?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공녀 따위, 심기를 살필 이유가 있나.’
‘그래, 그렇지. 하하!’
기사들이 미련 없이 돌아서고 홀로 남겨진 공녀는 방금까지도 울던 동생의 몸을 만졌다.
따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동생을 만지던 손바닥을 들어보았다.
방이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빨갛고 축축한 것이 잔뜩 묻어 나왔다.
아이는 발작적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확인해 보았다.
여전히 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메이너드를 검으로 찔렀을 때, 자신의 머리 위로 피가 쏟아져 내렸으니까.
메이너드는 죽었다.
어째서?
계승자 외의 공자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메이너드는 내 동생이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내가 메이너드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도리어 나를 비웃으며 메이너드를 죽였어.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아, 아아아아!’
아이의 입에서 비명과 울음이 뒤섞인 외침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은 아픔, 미처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정신이 점차 흐려지는 듯했다.
그 순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던 태고의 존재가 빚어낸 근원의 일부가 눈을 떴고.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징벌이 떨어졌다.
‘으, 아아아악!’
‘공자님, 이게 무슨……. 끄아아아!’
쿠과과과-!
마구잡이로 서로를 살해하던 두 칸델 공자의 파벌에 속한 기사와 정령사들이 작열하는 광휘에 산 채로 타들어 가며 공포로 점철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뇌전에 의해 위대한 칸델 공작저가 무참히 부서져 내렸고.
쏟아지는 막중한 파편에 짓눌려 죽어 가는 자 또한 무수했다.
‘무슨, 조디악! 네가 벌인 것이냐?!’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형님! 내가 왜 내 부하들을 죽이냐고!’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던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는 두려움이 뒤섞인 눈길로 고통스레 죽어 가는 제 부하들을 응시하며, 겁에 질린 채 동분서주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보호했다.
탁, 탁…….
‘너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직후, 까맣게 타들어 간 시체 너머에서 나타난 작은 인영을 발견한 형제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경악에 차 외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막내 누이였다.
‘네가, 여긴 왜…….’
황망히 누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첫째 공자는, 기이하리만치 까맣게 죽어 있는 아이의 안광과 그 곁에 흐르는 신성하고도 강렬한 광휘를 발견하고 벼락같은 깨달음에 휩싸였다.
설마…… 저 아이가, 작금의 재앙을 일으킨 것인가?
‘뭐야, 네년이 왜 여기서 알짱거리는 거야?!’
낯빛을 무겁도록 굳힌 첫째 공자와는 달리 잔뜩 몸을 떨며 인기척의 주인을 기다리던 둘째 공자, 조디악은 그 정체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만큼 하찮게 취급했던 막내 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아이를 윽박질렀다.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구나. 분명 네 아우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았건만, ……아아, 그래. 쥐새끼같이 숨어 도망 다니는 동안 내 부하들을 모조리 태워 죽인 범인을 보았을 확률도 높겠군?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불어. 안 그러면 네 아우처럼 네년도 죽여 버릴 테니까……. 끄아아아!’
온갖 폭언을 입에 담으며 어린 누이를 향해 분풀이를 쏟아 내던 조디악이 한 발짝, 걸음을 뗀 그 순간.
콰과과광-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뇌전에 조디악은 온몸을 발작하듯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컥, 커헉……. 이, 이년이…….’
그러나 그 또한 칸델의 피를 이어받은 전기의 정령사.
아무리 선천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대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한들, 이미 장성한 동일 속성의 정령사를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미숙했다.
조디악은 꺼멓게 타들어 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살의로 점철된 증오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자신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 응시하는 오라비를 내려다보면서도 여전히 넋을 놓은 듯한 기색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의 인중을 타고, 불현듯 선혈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하, 그래! 네까짓 게 객기를 부려 봤자 그 몸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도저히 믿지 못할 지경의 강대한 권능을 운용하였으나, 결국 이것이 한계인 것이 분명하다.
조디악은 희열에 차 광소를 토해 내며 온 힘을 다해 바닥을 기어갔다.
‘내가……. 커헉!’
푹-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구나, 조디악.’
그 순간, 마찬가지로 아이의 안색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던 첫째 공자의 검이 조디악의 등을 관통해 깨진 바닥에 내리꽂혔다.
조디악의 입에서 붉디붉은 토혈이 흘러내렸다.
‘혀, 형님…….’
‘이것은 우리의 싸움인데, 막내를 끼워서야 되겠느냐.’
비겁하기 짝이 없게도,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상황을 주시하다 이제 와 자애로운 척 지껄이는 형제의 낯을 경악에 잠긴 눈으로 올려다보던 조디악은 발악하듯 외쳤다.
‘닥쳐! 저것이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았기에, 네가 이토록 손쉽게 이길 수 있던…….’
‘기력은 그만 소진하고…… 이만 편히 눈을 감으려무나, 아우야.’
그가 검을 빼내자 허공에 붉은 혈흔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솟구쳐 올랐다.
잠시 꿈틀거리며 몸부림치던 조디악의 생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씨가 스러졌다.
작위 계승식이 끝났다.
그 어떤 이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첫째 공자는 새로운 영역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어린 누이를 응시했다.
‘주디스.’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무짝에 쓸모없던 칸델 공작의 막내 여식.
‘이 모든 것을…… 전부 네가 행한 것이니?’
분명 그러하였는데…….
다섯 살 아이가 행한 일이라고는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차마 믿을 수 없이 경이로웠던 광경을 상기하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
그러나 모든 기력을 소진한 것인지 몸을 비틀거리다 풀썩 쓰러지는 주디스를 재빠르게 받쳐 들며, 첫째 공자이자.
지금 이 시간 부로 차기 칸델 공작이 된 조르디 에겔리우스 칸델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용 가치가 무궁한 패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며.
* * *
그 세대의 작위 계승식이 끝난 후 놀라운 사건이 칸델 공작저를 뒤흔들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두 공자의 파벌을 잿더미가 될 지경으로 불태워 사살하고 칸델 공작저를 거의 반파시켰던 전격의 폭풍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다섯 살배기 막내 공녀가 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조르디 칸델은 가감 없이 그날의 진실을 아비에게 알렸다.
경악스러운 사건의 내막을 온전히 파악한 당대의 칸델 공작은 그제야 하잘것없이 취급했던 막내 여식이 지닌 가능성을 엿보았다.
‘우선…… 정령사로서의 교육을 받도록 해라. 역대 공자들이 수여했던 전례를 따라서!’
조르디 칸델은 이미 본인의 지위가 공고해졌으므로 이용 가치가 다분한 막내 누이를 견제할 필요가 없었고, 칸델 공작 또한 여식이라 해도 심상치 않은 수준의 재능을 눈치채고 파격적인 대우를 명했다.
그리하여 일년 반 남짓의 시간이 흐른 이후,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은 수천 년간 이어진 정령사의 법칙을 완전히 깨트려 버린 이단아였다.
세 명의 정령, 주 속성과 부속성을 합한 세 가지의 속성.
위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벗어난 정령사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디스는 예외였다.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의 축복만을 받아 단 하나의 속성을 지녔으며.
그의 축복을 받은 동일한 정령사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것이다.
[칸델 가문에서 태어난 마지막 여아는 내가 더없이 총애하는 아이이니, 그 아이를 끝까지 지켜 낸다면 너희 모두에게 영원한 광명이 내릴 것이다.]
충격에 잠겨 술렁이던 칸델 공작저의 내부, 오래전 유물을 상실한 이후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어오던 아스트라페의 제단에 수백 년의 침묵을 깨고 계시가 내려온 것은 이 모든 일에 더욱 불을 붙였다.
그 소란은 칸델 공작가를 넘어 로샨 제국의 전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길지 않은 논의 끝에 정령학자들은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과 같은 경우의 정령사를 ‘대정령사’라는 명칭으로 정의 내리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한순간에 쓸모없는 공녀에서 칸델 공작 가문의 진귀한 보배로 격상한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은, 비록 그 자신의 영혼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상실해 텅 비어 버린 채였으나.
세상이 인정한 최초의 대정령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