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자, 시오른. 인사해야지. 너랑 같은 나이의 친구란다.’
‘안녕! 내 이름은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야, 네 이름은 뭐야?’
그러나 슬픔의 끝에서 또 다른 희망이 찾아오듯이.
동등한 지위, 같은 나이였던 바스테반의 공자 시오른과 친분을 쌓아 가며 주디스의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는 점차 아물어 가는 듯했다.
당대 로샨 제국의 귀족 자제들 중 따라갈 자 없는 개구쟁이였던 시오른은 주디스가 지닌 힘이 가져다줄 권력과 명예를 욕망하며 아이를 억압하려 드는 칸델 가문의 인간들을 첫눈에 싫어하게 되었고.
‘읏차! 나 잡아 봐라-!’
‘꺄아아악! 바스테반 공자께서, 또!’
악의 반, 정의감 반으로 칸델 공작저의 진귀한 장식물과 저택의 건물을 상습적으로 부수고.
때로는 그 파편을 지고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그들을 골려 주곤 했다.
칸델 공작과 그 휘하 일족들은 방문하는 즉시 건물 파손과 재산 손실을 밥 먹듯 일삼는 바스테반의 망나니 공자를 더없이 질색하였으나.
바스테반 공작가에 항의해 봤자 애들 노는 게 다 그렇지 뭐, 보상은 해 주겠다는 성의 없는 답변만 돌아왔기에 더욱 속을 끓였다.
‘가만 보면, 너는 마음 없이 텅 빈 인형 같아.’
‘……내가?’
푸른 화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후원의 뒤뜰,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편히 드러누운 시오른이 툭 던진 말에 곁에 있던 주디스가 곤혹스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늘 악동 같은 웃음을 머금고 반짝이던 황금빛 눈동자가 기묘할 만치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욕심만 그득한 네 이복 오라비와 일가친척들 말을 왜 순순히 들어주고 있어? 내가 안 오는 날에는 하루 온 종일 수련만 하고 있다며? 안 지겨워?’
‘……그래도, 오라버니가 시키는 일이니까.’
주디스는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시선을 떨구고 애꿎은 손만 매만졌다.
‘너 정도 수준의 재능이면 평생을 먹고 놀아도 문제없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나중에 작위를 물려받아야 할 나조차도 열 살 생일을 넘긴 후에 차차 배워 가면 된다고, 지금은 마음껏 놀고 건강히 자라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
소년의 말을 들은 순간 주디스의 심경에 떠오른 감정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었다.
큰 오라버니, 그러니까 이제 칸델 공작이 된 조르디는 평소 주디스를 향해 더없이 다정한 태도로 대하다가도 조금만 수련을 게을리하면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하곤 했는데.
‘그건, 네 부모님께선 너를 사랑하시니까…….’
아, 그래서였구나.
주디스는 시오른을 향해 조용히 항변하던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르디 오라버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렇게나 혹독히 몰아붙이는 거야.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유약했지만 자애로웠던 어머니도, 아직 말조차 떼지 못했음에도 누이를 보면 환히 웃던 동생도…….
모두 죽었으니까.
‘그건……. 야, 너 왜 울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온 눈물이 뚝, 뚝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시오른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더 눈물이 솟구쳐, 주디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저기, 내가…… 미안해. 말이 좀 심했어.’
‘흐어어엉, 엄마아……. 끄읍…….’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더듬더듬 사과를 건네었지만, 멈추지 않는 주디스의 울음에 굳은 기색으로 고민하던 시오른은 정공법을 택했다.
‘……너, 지금 우는 이유가 뭐야?’
‘몰라, 넌 아무것도 몰라! 이 가문에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야! 아무도 나를…… 내 재능을 제외한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은 없다고…….’
‘……그게 뭐가 문제야?’
뭐라고?
주디스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시오른을 바라보았다.
네가 내 심정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야?
‘너……!’
‘내가 아껴 줄게.’
새된 목소리로 소리치려던 순간, 시오른이 더없이 진지한 기색으로 내뱉은 말에 주디스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우리 부모님도 널 좋아해. 음, 너희 가문 사람들 때문에 입양을 한다거나, 그런 건 불가능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네 재능 따위 상관없이 너를 좋아하고, 그러니까…….’
주디스가 넋이 나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어깨 위로 턱하니 손을 올리며 시오른은 말했다.
‘자신감을 가져! 설사 네가 가족에게 반항하다 못해 제대로 탈선해서 희대의 탕아가 되더라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좋아할 테니까!’
‘…….’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으나.
사감 하나 섞이지 않고 올곧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주디스는 깨달았다.
이 소년은 더없이 순수한 친애로서 이러한 약속을 외친 것이었다.
‘그게 뭐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옅은 실망감이 감돌다, 결국 어이없는 마음에 웃음을 터뜨리며.
‘시오른, 넌 진짜 이상한 애야…….’
주디스는 얼굴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내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 * *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시오른은 어린 날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처음으로 어색하게나마 오라버니를 향해 반항하던 날.
곁에 있던 시오른은 주디스가 기특하다는 듯 등을 다독이며 함께 조르디를 상대해 주었고.
점점 자신감이 붙어 때로는 오만하게 강짜를 부려도, 여전히 곁에 함께하며 그 위압적인 태도로 상대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도록 커다랗게 웃어 젖히곤 했다.
재앙이 침범한 세상을 구원하기까지의 혹독한 여정마저도 함께한 시오른은 주디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서로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은.
그야말로 최고의 친우였다.
‘아스트라페의 광명이 함께하는 자,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공녀님을 뵙습니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칸델 공작저에는 더 이상 성가시게 기어오르려는 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
운명이 내린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주디스에게 남은 것은 로샨 제국을 넘어 대륙 최고의 영웅에게 따르는 명예로운 찬사, 더 이상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가로막지 못할 단단한 권력.
‘축하한다, 시오른. 드디어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네.’
‘주디스! 왜 이렇게 늦게 와? 기다렸다고.’
사명을 함께한 또 다른 전우, 물의 대정령사 아타라와 혼인하는 시오른을 가장 각별한 친우로서 축복할 수 있는 기쁨이었다.
‘황제가 끝에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들러붙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 해결됐어.’
‘……나한테까지 둘러대려고? 말 돌리지 말고 어서 고백해. 황녀 대신 아타라와 결혼하는 대가로 무엇을 지불했는데?’
식이 거행되기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았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주디스는, 또 넉살 좋은 태도로 말을 둘러대는 시오른을 비웃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같은 로샨 제국의 귀족인 너를 제외하고, 다른 녀석들과 개인적으로 왕래하지 말래. 철저히 로샨 제국의 신하로서 살라고. 다 감시할 거라던데?’
‘미친X끼 아냐?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가, 네가 뭘 하든 지가 어쩌겠다고!’
‘쉿, 조용히 해! 부모님과 아타라에겐 비밀로 했단 말이야.’
시오른은 속도 없는지, 주디스가 버럭 분통을 터뜨리자 안절부절못하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다급히 말했다.
‘너…… 황태자가 얼마나 폐급인지, 잘 알고 있지?’
‘응.’
‘그런데 그 맹세를 받아들이냐?! 그건 다른 말로, 다 늙은 현황이 죽고 나서 황위를 물려받을 새 황제에게도 네 목줄을 쥐여 주라는 소리잖아!’
멍청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시오른을 속이 터지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주디스가 식은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 그렇다고 네가 맹세를 어기는 놈도 아니고, 너 이제 꼼짝없이 새 황제가 아무리 X또라이에 반역 마려운 폭군이어도 반역 일으킬 생각도 못 한 채 끌려다녀야 해.’
‘……괜찮아.’
‘뭐가 괜찮아?! 아타라도 모국이 멸망한 지 오래라 너에겐 별다른 힘이 못 되어 줄 텐데, 안 되면 다비드나 메카일라라도 불러서…….’
‘네가 있잖아.’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아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던 찰나, 시오른이 조용히 내뱉은 말에 주디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오른은 그 낯에 잠잠한 미소를 드리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 황태자가 제국을 엉망으로 말아먹는다면 네가 나 대신해서 반역 일으키면 되잖아. 오히려 더 안심이지. 위대한 전기의 대정령사께서 직접 폭군의 머리를 따 버린다! 아예 네가 황위 찬탈까지 하면 더 좋고. 너라면 진심으로 고개 숙여 황제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으니.’
‘너…….’
‘괜찮아, 좋게 생각하자. 그 힘들었던 사명도 이루어 냈는데 앞으로 우리에게 불가능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성한 청년은, 어린 시절 그녀를 향해 당찬 목소리로 맹세하던 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그래.’
네가 있는데, 내게 그 무엇이 불가능한 일일까?
결국 주디스는 어린 날처럼 시오른을 향해 힘없이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황태자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등극 전부터 짙었던 우려에 비해 다행히도, 바스테반 공작과 헤일리안 대공을 필두로 한 신하들의 보좌로 정신이 불안정하여 주색을 탐하던 젊은 황제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 국정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다.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던 세월이 흘러갔다.
‘주디스, 어떡하지……? 역시 아이는 허락되지 않은 존재라 여기고 포기해야 했던 걸까, 아타라가, 나 때문에…….’
‘네 잘못이 아니야, 시오른. 그리고 정신 차려.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언제까지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거야?’
혼인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하던 시오른과 아타라에게 기적처럼 찾아온 딸아이는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타라가 아이를 출산한 직후 숨을 거둔 것이다.
시오른은 더없는 기쁨마저 무참히 부서뜨리는 지독한 슬픔에 잠겨 몇 달이 지나도록 아이의 모습을 보지 못할 지경까지 내몰렸다.
주디스는 그런 시오른을 염려하며 수시로 바스테반 공작저에 드나들어 그를 보살폈다.
그리하여 시오른은 점차 아내를 잃은 슬픔을 딛고 마침내 딸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칸델 가문의 일족들은 그들의 각별한 관계를 오랫동안 주시해 온 듯했다.
‘그 물의 대정령사가 바스테반 공작의 후계자를 낳고 죽었으니, 공작 부인의 자리가 비게 되었구나.’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진 노공작이 온후한 오라버니의 모습을 가장하고서 망언을 내뱉은 것이다.
‘주디스, 너는 대체 언제까지 혼인하지 않고 지낼 생각이냐? 바스테반 공작과는 대업을 함께하기도 했고……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관계였으니 오가는 감정 또한 깊을 터.’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나직하게 읊조리던 주디스의 손끝에서 금빛 광휘가 감돌았다.
노공작은 그녀의 목소리 저변에 깔린 분노를 감지하고 더욱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하나뿐인 오라비로서 염려가 되어 그런다. 주디스, 네 재능을 물려받은 자손을 남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 바스테반 공작의 후처로 들어가는 것은 어떠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