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 *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칸델의 일족들은, 특히 당대의 칸델 공작이었던 조르디 에겔리우스 칸델은 남성도 아닌 여성인 주디스가 감히 가문의 수장인 자신조차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잡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저 아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 자신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선대 공작에게 말씀드려 비로소 재능을 개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감사함은 모를망정 지금의 바스테반 공작과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오만방자해지지 않았나.
그래도 가문의 번영을 위해,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위를 맞춰야 했으므로 인내했다.
하나 저의 축복받은 재능을 이어받은 자손을 남겨 가문에 이바지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홀아비가 된 바스테반 공작에게나 마음을 쓰는 꼴이란…….
그러다 칸델 공작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저토록 긴밀한 관계인 저 둘을 엮어서 후사를 보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바스테반 공작에게는 전처가 남긴 여식이 있으므로 그 아이에게 바스테반 공작 위를 물려주면 될 테고, 주디스가 낳은 자식은 칸델 가문으로 데려와 기르면 될 것이다.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하나 그 괴물 같은 존재인 대정령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영웅이었던 사내이니…….
어쩌면, 주디스에 필적할 정도로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자손이 태어나지 않을까.
그리하면 주디스가 일군 광영과 권력을 끊이지 않고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계산을 마친 칸델 공작은 주디스에게 제안을 건넸으나 결과는 격분한 주디스로 인해 완전히 못 쓸 지경으로 망가진 응접실과.
‘으아, 끄아아악!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남은 여생 동안 한쪽 다리를 절게 될 만큼 깊은 부상이었다.
‘내가 아직도 오라버니의 명이 제일 무서운 것처럼 벌벌 떨며 순종하는 어린아이인 줄 알아? 똑똑히 들어. 나는 죽는 날까지 혼인하지 않을 테고, 자식 또한 두지 않을 거야. 당신이 욕망하는 영원한 권력 따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라고.’
조르디는 병상에 누워 격분으로 속을 썩였다.
대안이, 대안이 필요했다.
‘아버님, 이 무슨 변고입니까. ……고모님께선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시는군요. 아무리 재앙을 물리친 영웅이라 하나, 엄연히 아버님께선 가문의 수장이신데…….’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마인하르트는 요즘 어떠하냐.’
‘잘 자라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전기의 정령들이 마인하르트의 곁에 맴돌더군요.’
‘그래……?’
그들이 찾은 대안이란 바로 칸델 공작의 손자, 마인하르트 시엘 칸델이었다.
칸델 공작의 장손으로 태어난 마인하르트는 주디스처럼 태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특별한 대정령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디스와 동일하게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의 축복을 받았으며, 숲의 정령왕과 바람의 상위 정령 진의 축복을 받은.
보기 드물 정도로 탁월한 천재성을 지닌 소년이었다.
아직 어렸음에도 그 아이가 차기 공작 후계자로 낙점되는 결정에는 아무런 반대도 없었다.
주디스의 압력으로 인해 작위 계승식이 폐지된 시점에서 마인하르트의 탄생은 칸델 공작에게 더없는 안도로 와닿았다.
다만, 가문의 일족을 지독히도 경멸하며 멀리하던 주디스가 유독 마인하르트만은 몹시 귀애했다는 것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네가 바로 마인하르트로구나? 귀여운 것, 제 할아비를 안 닮아서 다행이다.’
어린 날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동생이 무사히 자라났다면 이러했을까, 싶은 생각에 그랬던 것인가.
아무도 주디스가 마인하르트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직 그녀만이 아는 마음으로, 주디스는 마인하르트를 사랑했다.
마찬가지로 조부와 부모의 기대와 압박 하에 갇히듯 살아가며 오직 타고난 재능을 키우는 것에만 매진해야 했던 마인하르트에게 주디스는 어두운 감옥 속 유일한 온기처럼 다가온 가족이었다.
‘고모할머님께서는, 할아버지가 싫으세요?’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칸델 공작과 주디스의 관계는 어린아이조차 모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주디스는 뜻밖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마인하르트의 뺨을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답했다.
‘음……. 글쎄. 마인하르트, 너는 아직 어려서 알지 못하고 또 알 필요도 없는 영역이지만…… 분명 같은 피를 물려받은 가족임에도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아낄 줄 모르는 인간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단다. 오라버니도, 내게는…… 그런 존재였어.’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아직은 몰라도 돼. 네 조부와 부모가 너에게 무거운 기대를 지운다 해도, 다 너를 진심으로 아끼니까 그리하는 것일 테야.’
워낙 감정 표현이 드물었던 아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저를 꼭 끌어안은 주디스의 품이 어머니가 안아 주실 때보다도 따듯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칸델은 내 가문이야.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는 머저리들로 가득 찬 곳이어도, 끝없는 강요와 탐욕에 지쳐 신물이 올라와도……. 나를 탄생시킨 가문이니까. 그리고 마치 선물처럼, 너라는 아이를 내게 보내 준 가문이기도 하지.’
주디스는 보들보들한 마인하르트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조금만 더 버티렴. 노망난 오라버니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네 친부는 감히 내 뜻을 거스를 만큼의 담력도, 지위도 지니지 못한 인물이니 그때가 되면 너를 온전히 내가 기를 수 있겠지.’
품으로 파고든 아이의 어깨를 조심스레 쥐고 눈을 맞추며, 주디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가 차기 공작이 되면 이 가문도 이전보다는 나아질 거야. 훨씬.’
자신을 향하는 그녀의 바람은 늘 그렇듯 과분하기 그지없었다.
마인하르트는 희망이 깃들어 아름답게 빛나는 주디스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 * *
얼핏 순조로워 보이던 시간이 흐르며 칸델 공작은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마인하르트는 주디스와 비교했을 때 모든 조건이 흡족했다.
하지만 그것은 타고난 재능의 크기를 제외했을 때였다.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주디스보다 더 흠결 없는, 위대하고 완벽한 전기의 정령사이자…… 차기 칸델 공작을 탄생시켜야 해.’
그래야 저 오만방자한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의 위명을 꺾어 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칸델 공작은, 감히 정령왕의 근원을 지니고 태어난 대정령사조차 뛰어넘는 차기 칸델 공작을 탄생시키고야 말겠다는 욕망으로.
금서에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 * *
저자 불명, 그러나 정령계의 어두운 영역에서는 암암리에 읽어 보지 않은 자 없다고 소문이 무성한 금서에는 아르카네가 여타 정령왕들과는 애초에 격이 다른 존재이며 그에게 불가능한 기적은 없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전능한 어둠.
그것이 아르카네를 상징하는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라 이르며.
아르카네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생명이자, 가장 집착하는 일은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생명을 사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르카네에게 어떠한 소원을 빌고 싶거든, 무수히 많은 수의 생명을 산 채로 바쳐라.
칸델 공작은 금서의 내용대로 젊은 남녀, 노인, 어린아이 기백 명을 납치하든 대가를 주고 사 오든, 갖가지 수를 써 칸델 공작저로 끌어모았다.
이들을 아르카네의 소환 제물로 바치고, 마침내 소환된 아르카네를 향해 마인하르트의 영혼의 소유권을 넘기는 대가로.
마인하르트를 주디스조차 뛰어넘은 위대하고 완전한 정령사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기로 결심했다.
그 전능한 어둠이라는 존재가 불과 수십여 년 전까지 세상을 위협하던 재앙을 몰고 온 배후라는 사실은 탐욕에 눈먼 자의 뇌리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린 마인하르트의 앞날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아르카네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 안배되었다.
‘주디스가 공작저를 비운 때 거행하도록 하지.’
‘이틀 뒤가 좋겠군요. 시녀가 보고한 바로는 고모님께서 그날 바스테반 공작저에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그래, 준비해 두거라. 그년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긴밀하게.’
‘알겠습니다, 아버님.’
어둠은 아스트라페가 총애한 생명을 향해 서서히 아가리를 벌려 오고 있었다.
* * *
쨍강-
‘……이런,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이깟 거 가지고 뭘.’
주디스는 시오른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심드렁히 답했다.
기척 없이 다가온 바스테반 공작저의 시녀들이 깨진 찻잔의 잔해를 말끔히 치워 내는 동안, 그녀의 안색에는 이유 모를 수심이 서려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안색이 어두운데.’
‘……요즘 오라버니가 무슨 꿍꿍이를 품은 것 같은데. 아니면 이렇게나 조용할 수가 없다고.’
‘그 노인네가 또? 징글징글하네, 정말.’
시오른은 그 욱하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이를 아득바득 갈며 칸델 공작을 향한 욕설과 저주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신해서 신랄하게 까 주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심기를 가라앉히던 주디스는, 순간 수풀 너머로 보이는 시오른과 똑 닮은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고 식겁하여 시오른의 팔목을 붙들고 속삭였다.
‘야, 저기 네 딸……! 입 다물어!’
‘뭐라고……? 헉, 마리에트!’
포식자의 위압감이 흐르는 금안과 매섭고 깊은 눈매는 시오른을 소름 끼치도록 빼닮았지만, 바다를 닮은 짙푸름과 작열하는 불길처럼 강렬한 적색이 섞여 은은한 라벤더색을 띤 머리카락과.
차분하고 고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특유의 인상이 그 어미인 아타라를 속속들이 닮아, 전체적으로 아비보다는 어미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외양을 지닌 소녀가 사뿐히 걸어와 주디스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주디스 님, 직접 인사드리는 것은 오랜만이에요.’
‘그래……. 마리에트, 너는 여전히 어른스럽구나.’
참, 그 시오른 바스테반의 딸이 이렇게나 음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주디스는 아타라의 복제판인 듯한 어린 공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저……. 마리에트, 아까 아버지가 한 말을 들었…… 니?’
‘……칸델 공작 각하에 대해서 신랄하게 욕을 퍼부으셨죠.’
망했다.
딱 그 단어가 쓰인 표정을 짓고 절망하는 시오른을 웃음기 어린 기색으로 바라보던 주디스의 뇌리로.
[주디스, 어서 칸델 공작저로 돌아가. 어떡해, 아르카네가, 아르카네가, 그곳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제발, 주디스…….]
‘……!’
아스트라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디스? 갑자기…… 왜 그래.’
불현듯 벌컥 일어선 그녀를 향해 놀라 묻던 시오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창백하게 굳은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했다.
‘시오른, 나, 가 봐야 할 것 같아.’
‘잠시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같이 가자. 뭐가 되었든, 같이…….’
다급히 돌아서는 주디스를 붙들며 외쳤지만.
주디스는 시오른을 돌아보며 흐린 미소 한 줄기를 입가에 드리울 뿐이었다.
‘아니야.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인걸. ……시오른,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하지 마, 뭐가 되었든 하지 마!’
시오른은 진심으로 화를 내며 거부했다.
그러나 주디스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 내게 변고가 생긴다면…… 마인하르트를 부탁할게.’
‘무슨……. 잠시만, 주디스!’
콰광-!
시오른이 자신을 뒤쫓아오지 못하도록 후원에 거대한 벼락을 내려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린 뒤 주디스는 홀연히 바스테반 공작저를 떠났다.
‘주디스!’
그것이 시오른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