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69)화 (70/141)

<69화>

* * *

칸델 공작저로 들어선 순간, 마치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던지는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뱀의 비늘이 온몸을 느리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르카네가 노골적으로 저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으득-

주디스는 증오를 담아 이를 갈며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의 격분에 사로잡힌 채 어둠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본관을 향해 달렸다.

콰앙-!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수백의 생명이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 어둠에 잡아먹히는 참상.

꿈에서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지긋지긋한 존재를 형상한 조각상 앞에 선…….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아이의 모습.

[너희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거든……. 앞으로 살아갈 생 동안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불가하게 만드는 분노에 잠식되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번의 일로 너희의 영혼에 심각한 손상이 남겨졌으니, 두 번 다시는.]

쿠과과과과-

[지금까지 너희가 사용해 왔던 것과 같은 격의 권능을 함부로 운용해서는 아니 된다.]

지독한 배반의 현실 앞.

우주의 해묵은 세월을 오롯이 기억하던 존재가 건넨 충고는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완성 직전에 다다른 소환진을 영혼이 버티지 못해 울부짖을 지경까지 내몰아, 아스트라페의 막대한 권능으로 짓누른 주디스는 삿된 존재의 조각상 앞에 홀로 선…….

‘고모할머님……?’

조부와 부모라는 작자들이 저에게 무슨 짓을 가하려던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구한 아이의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주디스는 억세게 맞물린 턱뼈가 부서질 듯 아려오는 고통을 무시하고 마인하르트의 손을 온 힘을 다해 붙들어 보호하듯 곁으로 이끈 채 앞을 응시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가하려던 것이냐!’

그녀는 영혼에 들끓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 내며 소리쳤다.

좌중을 둘러싼 칸델 가문의 일족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 시선을 보낼 뿐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네 이년!’

침묵을 깨고 고함을 지른 이는 이 가문에서,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하다면 유일한 자.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녀의 이복 오라비, 조르디였다.

‘가문의 중대사에 끼어들다니,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중대사라…….

이따위 지독하리만치 탐욕스럽고 추악한 행위를 중대사라 칭하는 이복 오라비의 작태에 주디스는 그저 환멸스러워 격양된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노망이 왔나 보네, 오라버니.’

그리고 웃음을 뚝 그치고 서늘히 읊조렸다.

어린 날, 한때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라 여기고 사랑했던 주디스의 이복형제는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얄팍하게나마 기저에 깔린 속내를 가리던 가면조차 벗어던진 채 주름진 낯을 추하게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비켜라, 모두 가문을 위한 일이다!’

‘그래? 가문을 위한 일이라…… 그래서 아홉 살 난 어린아이를 어둠의 정령왕에게 산 제물로 바치려 했어?’

주디스는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혹여 놓쳐 버릴까.

그날 내가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떠나보냈던 어린 동생처럼.

그것이 두려워 필요 이상으로 억세게 힘주어 붙든 아이의 손이 꼬물거렸다.

동시에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작고 약한 생명의 존재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확인한 순간, 가라앉힐 수 없는 분노가 영혼을 게걸스레 핥으며 다시는 꺼지지 않을 것처럼 들러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뼛조각들은 다 뭐지? 어디 한번 설명해 봐, 오라버니.’

그 무엇보다도 소원했다.

두 번 다시 상실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고.

동시에 세상을 지켜 낸 영웅으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혈족들이 헛된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참히 죽여 버린 수백 명의 생명이 남긴 백골을 그 시야에 담으며 주디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이런 끔찍한 의식의 희생양으로 삼았으면서……. 이것도 가문을 위한 일이라 자위하겠다는 건가?’

‘네년이 감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작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주디스는 곧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실망하고 또 실망하였음에도, 그럼에도 오라비라 여겼던 노인을 향해 피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들의 혈족인 내가 무엇으로 영웅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잊었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가 스스로를 부서뜨릴 듯 억세게 쥐어졌다.

‘당장에라도 내 거죽을 찢어발기고 뼈를 갈아버리고, 영혼을 진창 속 나락에 처박기 위해 달려드는 아르카네의 권속들을 상대하며 내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버텨 냈는데!’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작열하는 분노가 뒤섞인 절규를 토해 내는 이의 심정은 비수로 난도질당해 더 이상 남아 있는 부분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라고 두렵지 않았겠어? 끝없는 위협에 마음은 너절해지고 몸은 계속해서 깎여 나가고. 그런데도…… 나밖에 없으니까.’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존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직후.

그녀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고독에 휩싸였다.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원흉이자, 동시에 그녀와 피를 나눈 가족인 그들은 오직 그녀가 품은 정령왕의 일부만을 숭배하고 집착할 뿐.

그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마음 한 자락 받아 볼 수 없었다.

괴로움에 내몰려 잠식되어 갈 때,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온 소년으로부터 그나마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소년과 그녀를 향해 감당하기 버거울 만치 잔혹한 사명을 내렸고.

필멸의 숙명을 넘어 불멸에 가까운 존재와도 같이 강대한 권능을 마음껏 다룰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죽음의 공포는, 시야에 담긴 무고한 이들의 잔인한 최후는…….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포기하면 이 세상은 끝내 멸망의 길에 들어설 것이 분명하고, 그래. ……내 혈족들인 당신들도 온전한 꼴로 죽음을 맞이하진 못할 테니까! 그랬기에 내가, 어떻게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 이 제국과 세상을 지켜냈는데!’

수없이 찾아든 슬픔과 고뇌에 사로잡혀, 나를 걱정하는 전우조차 등지고 홀로 웅크려 소리 없이 흐느끼곤 했어.

어째서 운명은 내게 이토록 잔인한 것인지.

끝없이 물음을 던지며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랐어.

그럼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가도.

떠오르는 이들은 재앙이 몰려듦에도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들과.

참으로 어리석게도…….

비정하고 추악하나, 그럼에도 피가 이어진 나의 가족들.

바로 당신들이었는데.

‘그놈의 아들이 무엇이라고. 더 완벽한 영웅을 얻겠다고 이 어린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가며…… 죄 없는 생명까지 희생시켜,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카네를 소환하여. ……감히, 소원을 빌고자 해?’

그러나 미처 버리지 못했던 애착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배반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주디스의 두 눈에서 피가 뒤섞여 소름 끼치리만큼 붉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아름다운 낯 위로 피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낯 위로 증오 서린 광기가 진하게 감돌았다.

‘그러고도, 정녕 너희가 사람인가?’

사랑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역겨운 너희를 더 이상 이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게 둘 수 없다.’

오만으로 겉을 둘러 잘난 체했으나 끝내 어리석은 본성을 외면하지 못한 나는, 이런 당신들을 끊어 내지 못하고 악습을 묵인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과오를 바로잡을 것이다.

[주디스……? 그만, 그만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주디스!]

주디스는 비로소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내버리며.

뇌리에서 울리는 정령왕의 목소리조차 무시하고.

이미 버티지 못해 조각조각 금이 가 버린 영혼 틈새로 새어 나오던, 한낱 필멸자가 품기에 너무나 거대한 권능을 해방시키듯 터뜨렸다.

쿠구구궁-!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눈부신 섬광.

그 황금빛 뇌전의 광란, 온몸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고통마저 모든 과오를 씻어 내리고 자유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신호로 여겨져서.

주디스는 빛으로 섬멸하는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 * *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일족이 한낱 잿더미로 추락해 그 대가를 치르고.

화려하고 사치스럽던 저택은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라도 흐른 듯 폐허로 변모하였다.

멍하니 눈을 뜬 주디스는 곧 깨달았다.

지혜의 정령왕이 건넨 충고를 무시한 대가가, 지금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흐윽…….’

곁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인하르트가 흐느끼고 있었다.

주디스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육신을 억지로 붙들고 흐느끼는 아이를 향해 속삭였다.

‘……울지 말거라.’

‘하지만…….’

평소 염려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이였는데.

지금 이 순간, 너는 나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구나.

아이를 내려다보던 주디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낯 위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진정으로 다행이다.

꿈에도 잊지 못할 어린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그 죽음을 바라만 보았던 내 동생처럼……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어서.

하지만 나는 곧 죽을 테고, 더 이상 너를 지켜 줄 수 없는데.

네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나처럼.’

짧은 고민 끝에, 주디스는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네가 나와 같은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

너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들 속에서, 고독도 괴로움도 느끼지 못한 채 행복하게 살아가야만 해.

‘하잘것없는 마음에 얽매이지 말고 네 삶을 살아가거라. 자유롭게, 그 어떤 것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도 너 자신을 희생하지 말고.’

너는…… 나와 같은 삶을 살아선 안 돼.

결코.

흐려지는 정신 속, 주디스는 그녀에게 단 하나의 미련으로 남은 작고 약한 아이를 향해.

고통스러웠던 삶 속에서.

‘희생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단다.’

자신이 뼈저리게 깨달은 진실을 읊조린 뒤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검게 물든 눈꺼풀 사이로 모든 생명의 빛이 잠겨 어둑해진 눈동자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하여 어둠을 몰아내던 가장 격렬한 빛.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의 사랑을 받은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 수없는 고난 끝에 사랑하는 아이를 위한 희생으로 그 삶을 마치며.

최초의 대정령사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