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5. 악행의 이면
샤스티아가 평소와는 달리 집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날이었다.
로베릭은 알레아를 돌보는 와중에도 염려스러운 마음에 하릴없이 고요한 문가를 연신 돌아보았다.
달칵-
“샤스티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들려온 기척에 로베릭은 곤히 잠든 알레아를 요람에 눕히고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아, 로베릭…….”
그러나 마주한 샤스티아는 로베릭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신…… 왜, 그런.”
온몸에 음식물 찌꺼기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인가.
머리카락, 얼굴, 옷까지 어느 하나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허둥거리며 자리를 피하려는 샤스티아를 붙든 로베릭은 서슬 퍼런 분노를 드러내며 물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로베릭…….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실수로 뒤집어쓴 것일 뿐…….”
“거짓말로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설마, 마을의 주민들이 이리한 것입니까?”
시선을 피하며 옅게 몸을 떠는 샤스티아를 향해 묻던 로베릭은 곧 이때껏 마을의 주민들이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대하던 태도를 떠올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
정답인 듯 샤스티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 로베릭은 날카로운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도대체 이 마을의 사람들은…… 당신처럼, 믿기 힘들 만큼 선한 사람을 어찌하여 이토록 모욕하는 것입니까?”
로베릭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앞의 이 가여운 여인이 자신을 구한 이유는 그의 신분을 보고 돈을 뜯어내려는 게 아니라, 순전히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마음임을.
그래서 가난한 형편에도 정성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더더욱, 의지할 곳 없는 가여운 여인을 배척하다 못해 저열한 괴롭힘까지 가하는 이 마을의 행태에 로베릭은 분노가 치밀었다.
말간 분홍색 눈망울 아래로 굵은 눈물을 떨구던 샤스티아는 그것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감싸 준단 말인가?
“대체 뭐가!”
“당신이, 있으니까요.”
답답하리만큼 선량하기 짝이 없는 여인을 향해 분노를 담아 외치던 로베릭은, 그 순간 샤스티아가 내뱉은 말에 멈칫했다.
“나를 혐오하지도, 경멸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 주는 당신이 있으니까.”
“…….”
“이젠 괜찮아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대체 어떤 기구한 삶을 살아왔기에……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을 향해 건네었던, 지극히 당연한 호의에도 이토록 감사해 할 수 있단 말인가.
“……울지 마십시오.”
차마 어떠한 말도 더 이상 내뱉을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로베릭은 가련하게 흐느끼는 여인을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오물로 더러워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음 날,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집을 나선 로베릭은 곧장 마을의 촌장을 찾아가 고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어찌하여 가엾고 힘없는 여인 한 명에게 그따위 저열한 악의를 품고 핍박하는 것이지? 이유라도 들어야 조금이나마 내 분기가 가라앉을 것 같군.”
“그, 그것이…….”
촌장의 집에 모여 있던 마을의 사람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것이 느껴지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내를 향해 두려움을 품고 쩔쩔매었다.
“저, 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마을만 떠나면 다 해결될 일인데…….”
“가진 것 없고 어린 딸까지 있는 여인에게 대체 어디로 떠나란 말이지? 어이가 없군.”
내놓는다는 변명이 이따위 것인가.
로베릭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조소하며 말했다.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그 여자의 죽은 남편이 얼마나 흉악한 자였는지!”
그러나, 되돌아온 이야기는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로베릭은 미간을 좁히며 그 말을 내뱉은 촌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속에 깃들어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는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공포였다.
* * *
“방금 황제궁에서 시종이 왔는데, 헤일리안 대공께서 폐하와 알현을 마치신 후 별궁으로 오실 거래!”
“맙소사, 리아. 내 몰골 좀 봐 줘. 머리가 헝클어지진 않았어? 어제 잠을 못 자서 안색도 엉망일 텐데…….”
“신경 꺼. 대공 각하께서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 눈길 한 번 주신 적 있었니?”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가 머무는 별궁에 소속된 시녀들은 헤일리안 대공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부산스레 움직이며 가지각색의 반응을 내비쳤다.
그들의 주인이신 대공녀께서 친부의 방문을 영 탐탁지 않게 여기셨기에 헤일리안 대공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극히 드물게 별궁에 찾아오곤 했다.
“대공비께서 건재하시고 적법한 후계자이신 이디스 대공녀님까지 얻으셨는데, 대공 각하께서 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동하실 리가 있겠어?”
“그따위 저열한 속내를 품고 이러는 게 아니거든!”
“그럼 뭔데?”
“당연히…… 헤일리안 대공 각하께서는, 이그니스의 뺨을 칠 정도의 절세 미남이시니까!”
멜리사라는 이름의 시녀는 상기된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소리쳤다.
다른 시녀들은 정령왕 모독조차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자신의 동료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나의 못난 생김새가 혹여 그 영롱한 눈동자에 맺히기라도 한다면……. 아아, 결코 안 될 일이야. 그분께는 오물 한 점 묻어서는 안 되는걸.”
그러거나 말거나, 헤일리안 대공을 향한 광기 어린 숭배에 사로잡힌 멜리사는 몽롱한 목소리로 혼잣말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니 아무리 타고나기를 못났더라도 최대한 외관을 정돈해야 하지 않겠어? ……아, 대공녀님께서 대공 각하를 닮은 아드님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지금도 어린 정령처럼 사랑스러우신 분이지만, 공자님이셨다면 그분을 모시는 일이 더더욱 행복했을 텐데.”
“중증이구나, 너…… 절대 대공녀님 앞에서 네 광기를 드러내면 안 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중얼거리던 시녀 역시 멜리사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로샨 제국에서는 한 대에 꼭 한 사람씩, 각국에 내로라하는 미남들을 모조리 씹어 먹을 정도의 절세 미남이 나오곤 했는데.
전대의 미남이…… 아, 그래.
마침 이 별궁에 기거하고 계신 옛 바스테반 공작이었다.
그 넓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어 보는 상상을 하지 않았던 여인이 또래 중 한 사람도 없을 지경이었노라고, 그녀의 할머니가 아련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하셨다.
정령의 권능을 견뎌 내는 것도 모자라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내기까지 할 지경의 강인한 육체를 지닌 것뿐이랴.
그 용모조차 비리비리한 귀공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위험한 야성미를 물씬 풍겼기에 더더욱 뭇 여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하셨지.
게다가 전우였던…… 그, 뭐였더라.
아무튼 망국 출신이었던 물의 대정령사와 결혼한 뒤 그녀가 죽은 후에도 어떠한 여인과의 스캔들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순애보만큼은 젊은 시절의 옛 바스테반 공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작금, 로샨 제국 최고의 미남이 누구던가.
바로 전대와는 완벽히 상반된 아름다움을 지닌 사내,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었다.
정령왕들 중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는 바로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라 전해져 내려온다.
그런데 고지식하고 나이 지긋한 귀족 사내들조차 마치 이그니스가 인간으로 현현한다면 그와 같지 않겠노라고 진심으로 탄복할 정도의 미남자가 바로 헤일리안 대공이었다.
태생 자체부터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것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되는 신성한 고귀함.
단 하나의 오물이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새하얀 머리칼과 섬세하면서도 이유 모를 우수에 잠겨 있는 듯 깊고 영롱한 붉은 눈동자…….
사내는 결코 여인의 깨질 듯 연약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없다 하나, 그 법칙을 깬 유일한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일 것이었다.
“오고 계셔! 얼른, 얼른 물러서!”
로샨 제국이 탄생시킨 미남들을 생각하던 도중, 마침내 그 헤일리안 대공께서 행차하셨다.
그들은 일제히 물러서 고개를 숙이고 모든 희색을 감춘 채 침묵했다.
영원히 젊고 아름다울 것만 같이 여겨지는 헤일리안 대공은 하얀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그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향기를 남기고 시녀들의 앞을 지나쳤다.
한편 멜리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대공이 지나치던 찰나의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헤일리안 대공의 기척조차 들려오지 않을 즈음, 불현듯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멜리사를 놀라서 부축하는 동료 시녀들을 돌아보며 그녀가 힘없이 읊조렸다.
“……미소 짓고 계셨어. 따님을 만나신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쁘셨으면……. 어둠의 정령왕조차 그분의 미소 앞에서 항복하고 말 정도로, 신성하고 아름다운…….”
“……또 시작이다.”
괜히 걱정했다 싶어, 그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각자 이를 악물고 몸서리쳤다.
“참, 대공녀님께선 침실이 아니라 후원에 계시지 않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이미 별궁으로 오시기 전 시종을 보내 대공녀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물으셨거든.”
“그렇구나……. 잠깐. 그런데, 지금 대공녀님의 곁에 있는 사람이…….”
평온한 어조로 이야기하던 시녀는, 문득 떠오른 이의 얼굴에 헤일리안 대공이 떠난 자리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인하르트 님께서 대공녀님과 함께 계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