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72)화 (73/141)

<72화>

* * *

오랜만에 딸아이를 만나는 날이었다.

로베릭은 미소를 머금고 이디스가 있는 후원에 도착했다.

새뜻한 녹음을 띤 작은 언덕 위, 누군가를 향해 즐겁게 재잘거리는 이디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안색은 한층 더 밝아졌다.

아이를 향해 한 발짝 내딛던 찰나, 시선을 그 옆으로 돌렸고…….

“……말도, 안 돼.”

그 곁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은은한 미소를 띠며 아이의 작은 손을 살며시 붙드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깃들었던 모든 미소가 지워지고.

“네놈이 왜 이곳에…….”

이성이 멎어 버리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힌 로베릭은, 곧 불길처럼 타들어 가는 분노에 잠겨 외쳤다.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

평화로운 한때, 갑작스레 울려 퍼진 격렬한 분노가 서린 고함에 이디스는 화들짝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곧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로베릭을 발견했다.

“미천한 죄인의 자손이 감히 지엄한 황궁에 들어와 있다니, 당장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로베릭은 마인하르트를 향해 모욕스러운 언사를 서슴없이 쏟아 냈다.

그의 행태에 이디스의 낯 위로 불쾌함이 서렸고, 마인하르트는 더없이 무심한 태도로 로베릭에게 눈길 한 자락조차 주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로베릭은 마인하르트의 무시에 더욱 살벌한 기색을 드러내며, 이디스의 손을 붙들고 마인하르트에게서 떼어 내 자신의 곁으로 잡아끌었다.

“이런 천한 죄인과 한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분명 시오른 아르카이츠가 데려왔겠지. 당장 저놈을 내쫓아야…….”

“제가, 머물러 달라고 권했어요!”

씹어뱉듯 말하던 로베릭은,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디스가 내뱉은 말에 일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뭐?”

그런 로베릭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이디스는, 순간적으로 힘이 풀린 로베릭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손을 빼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곁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드렸다고요. 마인하르트는 저를 몇 번이나 도와주었고,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저분의 가문이 어떻든 간에…… 더 이상 마인하르트를 모욕하지 마세요.”

딸아이가 내뱉은 이야기에 황망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던 로베릭은 곧 이를 악물며 반박하듯 외쳤다.

“이디스! 너는 저자가 어떤 저주받은 피를 물려받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내 말을 들어라. 저놈은 네 곁에 있으면……!”

“알고 있어요.”

그 순간, 조용히 읊조리듯이 답한 이디스의 목소리에 로베릭은 화를 내던 것도 멈추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디스는, 날 선 비난이 코앞에서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무심한 기색의 마인하르트를 설핏 돌아보았다.

그 또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검은 눈동자가, 처음에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꺼림칙하다고 여겼지만…….

“할아버지의 전우셨던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 님께서 남기신 유일한 혈육이잖아요.”

이제는 그 단단한 모습 속에 숨겨진 아픔과.

드러내지 않는 온화한 애정을 알고 있기에.

“!”

“아버지께서는 재앙의 개시와 그 재앙을 물리쳤던 영웅들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하도록 제게서 온전히 차단하고 왜곡하셨지만요.”

로베릭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디스는 그가 자신에게 가한 행동을 비꼬듯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때껏 한 번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아요.”

“이디스…….”

입을 달싹이며 감정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하던 로베릭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치솟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말을 이어 갔다.

“……설사 저자가 주디스 세페미아 칸델의 조카손자라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너도 다 알게 되었다니 편히 말하마. 칸델 가문은 감히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어겼다. 아르카네를 향해 인신 공양을 행하였단 말이다! 그런 흉악한 혈족의 후손을 네 곁에 둘 수는 없어, 절대로.”

로베릭을 가만히 주시하던 이디스가 물었다.

“대공비님은요?”

“……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며 로베릭이 되묻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대공비님도 그 흉악하고 불길한 아르카네를 숭배했던 사람의 가족이었잖아요.”

이디스가 평온한 어조로 읊조린 말에, 로베릭은 멍하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흉악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알아듣게 말해.”

마을의 촌장은 식은땀을 훔치며 두려움이 짙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도 그 남자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 흉악한 인간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비밀스럽고 강퍅했던 한 남자의 윤곽을 그려 갔다.

샤스티아 프라이움의 남편이자 프라이움이라는 성의 주인이었던 남자의 이름은 칼라일 프라이움.

어느 날,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홀연히 나타나 이 마을에 정착했던 젊은 사내.

진한 검은색을 띤 그의 머리는 무성히 자라 마치 짐승의 갈기와 비슷한 몰골로 어깻죽지 부근에 머물러 있었고, 몸피는 유달리 마른 편이었다.

인상이 그렇지 않았다면 미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자못 뛰어난 외모였으나…….

언제나 예민하고 날 선 기류가 그 주위에 깃들어 있었던 터라, 주위를 경계하고 세상 모든 것을 불신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이유 모르게 선사했다.

칼라일 프라이움은 그 외모처럼 말수가 적었고 마을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거의 칩거하다시피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눈에 띄는 특이한 점은 없던 남자였다.

또 그 아내였던 샤스티아가 워낙 여린 성품을 지녀 눈물이 많았다는 것만 빼면 모두에게 상냥하였기에 원만히 마을에 녹아들었고, 늘 그랬듯 평화로운 세월이 흘러갈 줄 알았으나.

‘불이야! 프라이움의 집에 불이 났어!’

그날, 칼라일 프라이움의 집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오르던 날.

샤스티아와 어린 딸은 다행히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으나 그 남편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무너진 천장에 깔려 죽고 말았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 어린 딸아이조차 돌보지 못하는 샤스티아의 처지를 가여워하며 폐허가 된 집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이봐, 집터에…… 뭐가 있는데?’

‘뭐?’

한창 내려앉은 기둥과 잿더미를 치우던 때였다.

잔해를 어느 정도 걷어 내고 나자, 그 위로 작은 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안색이 천천히 굳어 들었다.

생명이라면, 본능적으로 불쾌함에 사로잡힐 난해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술식들이 시커멓게 그을린 돌 위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바깥의 정령사들은 정령의 권능뿐만 아니라 주술도 다룰 줄 안다던데, 설마 이게 그…… 주술진이라는 건가?’

‘뭐야, 그렇다면 프라이움이 정령사였다고?’

‘어이, 여기로 와 봐! 뒤뜰 깊숙이 있어서 그런지, 창고 하나는 멀쩡해!’

평생을 작은 마을 안에서만 살아왔던 사람들은 그 문양의 정체를 짐작할 수조차 없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던 때, 다른 주민의 부름에 그들은 일제히 불에 타지 않고 남겨진 작은 나무 창고의 앞으로 향했다.

‘내가 열어 보도록 하지.’

끼이이익-

어딘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창고의 문 너머로 비친 광경은.

‘……이건 또, 뭐야?’

작은 창고 안을 빼곡히 채운 하얀 종이, 그 위에 검붉은 무언가로 그려진, 마치 집터에 새겨져 있던 해괴한 문양을 축소한 듯한 것.

무엇보다 작은 선반 위에 올려진 어떤 존재를 나타낸 조각상은 이 괴이한 광경을 향한 불쾌감에 기름을 부었다.

우당탕-

‘아이고, 어르신! 이곳에는 어쩐 일로…….’

‘아, 아아아아!’

서로 찝찝한 눈빛을 주고받던 순간,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비명이 연달아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소란에 돌아본 곳엔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얼굴이 새파래진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을 뻗어, 정확히.

창고 안의 작은 조각상을 가리켰다.

‘저건, 아르카네다!’

‘……예?!’

수십여 년 전, 아르카네의 신도라 불리는 자들에게 모든 가족을 잃고 초로의 노인이 될 때까지 홀로 살아온 노인이 외친 말에 마을 사내들의 안색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 꿈에도 잊은 적이 없어! 죽은 프라이움이, 아르카네의 신도였구나!’

그 노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치 정신을 놓은 것처럼 죽은 가족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서둘러 노인을 부축한 이들은 짙은 혐오와 적개심이 깃든 눈빛으로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조금 예민하고 특이해 보이는 사람이긴 해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여겨 왔던 이웃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흉악한 아르카네의 신도였다는 사실을 그날 우리 모두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리께서는 그 사실을 안 후에도, 죽은 프라이움의 아내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으십니까?”

불안한 듯 손을 매만지던 촌장이 몸서리치듯 말했다.

“저는, 저희는 결코 그리할 수 없습니다. 비록 직접 겪어 보진 못했다 하나 그 어르신과 부모님께서 해 주신 그 시대의 참혹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온 저희는, 결코!”

“…….”

로베릭은 거대한 충격에 잠겨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샤스티아처럼 선량하고 가여운 여인의 남편이…… 아르카네를 숭배하던 이단자였다니.

진실이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촌장과 그 주위 사람들의 눈빛은 순수한 두려움과 적의로 물들어 있었기에 거짓이라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로베릭은 그저 연민하던 여인이 어딘지 꺼림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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