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 *
“알레아는 그 숭배자의 딸이었고요.”
망연한 표정을 지은 로베릭은 아무런 대꾸도 내뱉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인하르트를 향해 그가 쏟아 냈던 날 선 혐오는, 아르카네의 숭배자가 남긴 이들을 제 가족으로 들여 헤일리안 대공비와 대공녀 작위를 내린 이가 지껄일 말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가족이 지은 죄를 함께 짊어지고 배척받아야 한다면 마인하르트뿐만 아니라 대공비님과 알레아도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돼요.”
이디스는 로베릭의 모순을 짚으며 조곤조곤히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대공비님과 알레아의 가족이 지었던 죄악은 덮어 주셨잖아요. 그러니 저 또한, 마인하르트의 가족이 지었던 죄를 덮고 곁에 두겠다는 것뿐이에요. 이래도 허락하지 않으실 건가요?”
“…….”
로베릭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안색에 드러난 감정은, 다름 아닌 곤혹스러움이었다.
이디스는 그런 로베릭에게서 떨어져 마인하르트를 향해 돌아섰다.
“…….”
마인하르트는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이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디스는 그를 향해 생긋,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다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디스…….”
“아직도 마인하르트가 제 곁에 머무는 일을 허락하지 못하시겠다면, 허락하실 때까지 제가 아버지와 말을 섞을 일은 없을 거예요.”
이디스의 강경한 목소리에 로베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발길을 돌려 떠났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로베릭의 뒷모습을 흘긋 돌아보던 이디스는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마인하르트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함께 지낸 지 어느덧 보름 가까이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토록 마인하르트를 찾아 헤맸던 이유인…… 마리에트에 대한 질문을 고민 끝에 묻기로 했다.
워낙 말수가 적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를 않는 사람이라 넘쳐흐르는 의문은 꾹꾹 눌러 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야.
“저, 마인하르트.”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돼.
“말씀하십시오.”
마인하르트는 늘 그렇듯 무심한 목소리로 답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두 손을 모으며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와 가까운 사이셨죠?”
“그랬지요.”
그의 대답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 마리에트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흔치 않을 기회다.
나는 모든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어머니와 대공비 사이에 어떤 악연이 존재했는지는 저도 알고 있어요.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를 악녀라고 칭하고, 저는 악녀의 딸이라는 이유로 갖은 혐오와 멸시를 받아 왔으니까요. 하지만…… 지난번 유히리안을 맞닥뜨렸을 때,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죠.”
잠시 말을 끊었던 나는 곧바로 힘주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자식을 지키겠다고, 제 어머니와 맹세하였다고.”
“……이디스 님.”
이 이야기를 꺼내는 내 속내를 눈치챈 듯 마인하르트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내 이름을 불렀다.
“자식을 지켜달라는 맹세를 믿고 맡길 정도라면 당신은 분명히 어머니께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셨던 비밀을 아는 사람일 거예요. 어쩌면 할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알고 계실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마인하르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검은 눈동자에 말로 치환되지 못한 모든 비밀들이 숨죽이고 가라앉아,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나를 알아봐 달라고.
마치 간절한 손짓을 보내오는 것 같다고 느껴진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헤일리안의 대공녀가 되던 순간부터 알고 싶었어요. 어머니께선…… 정말로 순전히 질투 때문에, 헤일리안 대공비와 대공녀를 해하려 하셨던 건가요?”
[마리에트는…… 참으로 아름다운 아이였지. 외모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샅샅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단다.]
[또래 아이들보다 몇 배나 배움이 빨랐고, 굶주리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지 못했다. 아랫것들에게는 언제나 공정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손속이 자비로웠으며, 제 바람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비를 두었음에도 과도한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내 정령왕으로서의 지위를 걸고 보증하지. 마리에트는 결코 악으로 물들 아이가 아니었다.]
나이아드가 마리에트를 회상하며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결코 거짓이 섞인 것이 아니었다.
‘부모의 죄가 자식의 죄가 될 수는 없어. 사람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주는지에 따라 운명은 바뀌는 거야.’
‘나는 저 죄인의 아이를 구해, 그 부모와 같은 운명을 걷지 않게 하겠어.’
그리고 내가 직접 보았던 어린 마리에트의 모습.
[일리피아가 너를 축복했다지? 거기에 나이아드, 오리에드까지 포함이군. ……이런 조화가 다 있나. 로어가 또다시 일을 벌이는구나.]
그 실체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아르카네와, 그가 나를 축복한 정령왕을 하나하나 읊으며 종래에 비소하듯 중얼거렸던 이.
지혜의 정령왕, 로어.
인간을 혐오하고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재앙을 불러온 어둠의 정령왕과, 그를 적대했던 지혜의 정령왕.
그리고 지혜의 정령왕이 축복했던 마리에트.
마리에트에 대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든 일은 로어가 알고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던 나이아드…….
산산이 조각난 단서가 가리키는 진실은, 마리에트의 악행이 숨겨 둔 이면에 순전한 질투와 로베릭을 향한 배신감만이 존재하진 않았으리라는 답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이와 같은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인하르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아귀에 다 덮일 만큼 작은 나의 머리 위를 살짝 덮었으나.
차마 닿지 못한 채 그 손을 거두고.
“제 주인,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 공녀께서는 지혜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이 세상이 감춰 둔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신 분이셨지요.”
마인하르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분의 혜안은 그 대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에 족하지 않고, 종래엔 미래까지 꿰뚫어 보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미래를, 꿰뚫어 본다……!
[……이 외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으음, 동등한 격을 지니신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 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령이 없어요.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를 중시하셨으며, 냉혹하리만치 이성적이신 분이셨거든요. 어떨 때는,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지니신 것도 같았대요.]
언딘으로부터 지혜의 정령왕에 대해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며, 나는 멍하니 마인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의 영향을 받은 마리에트 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지혜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자신이 축복을 내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정령사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지요.”
그 말을 읊조리던 찰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설핏 슬픔을 머금고 어둑히 빛나는 듯했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가 이 세상과 인간을 더없이 증오하며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은 이디스 님께서도 은연중에 눈치채고 계실 겁니다.”
“……어째서, 그러는 건가요?”
“글쎄요. 그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증오해 왔다는 사실만은 명확하지요.”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정령왕들과는 근원 자체가 뒤틀린 듯한, 나를 향해 던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속 서슬 퍼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짙은 혐오를.
“아르카네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시도로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었고, 70여 년 전에는 끝내 세상을 완전히 뒤엎었던 거대한 재앙을 몰고 왔습니다. 그로 인해 어둠의 정령사와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을 지경으로 배척받게 되었지요.”
마인하르트는 부정할 수 없이 로베릭을 닮은 나의 눈동자를 슬픔을 머금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그 눈을 물려준 남자는 마리에트 님을 저버리고 한 평민 여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죽은 전남편이 있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 하나가 있었지요.”
샤스티아와 알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 거지……?
뜻밖의 흐름에 당황하던 그 순간.
“그 여인의 본래 이름은 샤스티아 프라이움. 프라이움이라는 성은 오래전 죽은 전남편의 것이었으며, 그 남자는 생명을 증오하는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숭배했던 정령사였습니다.”
“……!”
거센 충격에 휩싸인 나는 한동안 말을 이룰 수 없었다.
“샤스티아 프라이움과 알레아 대공녀는 세상의 배척과 탄압을 피해 평민으로 위장하고 숨어들었던 어둠의 정령사의 아내와 자식이었습니다. 그자는 어둠 속성을 타고난 정령사 중에서도 더없는 악질이었지요.”
그러는 와중에도 마인하르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부분의 어둠의 정령사들은 자신들에게 축복 아닌 저주를 내린 아르카네를 원망하고 기피합니다. 그러나 그자는, 오히려 아르카네를 열렬히 숭배하고 그를 향해 충성을 다했지요.”
머리가 아프다 못해 그 속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날뛰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속에서, 제국의 황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속성이 어둠의 정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에시메드와.
할아버지와 주디스가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기,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재앙의 개시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할 심정으로 황망히 말했다.
“어떻게……. 그런 과거를 지녔으면서, 대공비는 그렇다 쳐도, 그 정령사의 자식인 알레아까지 대공녀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요?”
어둠의 정령사의 아내와, 무엇보다 그의 피를 이은 친자식이 로샨 제국의 대공비와 대공녀가 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황제는 모르는 건가? 로베릭이 황제를 속였나?
그럼 로베릭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리에트를 저버리고 샤스티아를 선택한 거야?